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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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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헌황명하행장략(懈軒黃命河行狀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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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懈軒黃命河行狀略
公諱命河字子潤號懈軒平海人中世有諱瑞翊戴元勳諡文節人國 朝諱 玉崇判漢城是爲公七代祖也曾祖諱道一以學行調尙衣院別提祖諱中寔 通政考諱石建通德郞妣安東權氏是經之女大司成惊之后以 寧陵辛卯 三月二十二日生公干溫溪里第禀姿穎悟年甫七八歲愛學於家庭有聞輒 誦出語焉驚人小宰姜公錫圭時謫本郡一見以汝南顏子稱之公仍講究經 藉琢磨鉛繫於文無不能而西坡吳公道一以文章司命見公製大加奬詡又 從與之洛閩諸書靡不評討而惟時名公鉅卿樂與唱酬者如東里李公殷相 相國李公台佐玉川趙公德鄰瓶窩李公衡祥芝村金公邦杰保閒安公鍊石 皆文章道義之交也不幸十二度發解再占蓮桂竟以誤規見拔時人惜之於 乎公生于大海海月兩先生之門承襲遺範盡其居喪奉先之節而模範於鄕 間矜式於後學足以有爲於需世而落拓激昴乃輯國朝故事七卷帖退陶先 生贈錦溪先生手筆盥薇莊玩以寓其尊賢之誠而適值歲札私賑百五十斛 營邑奬褒朝廷特下崇資而累辞 天官御史呉命峻又薦公以文學行義之 卓異啓聞于 朝特除寢郞云云退築霞亭頤養溪堂亭是泉石而堂即奬學 之所也丕變山水之窟蔚爲文獻之方歲乙未正月十一日考終于寢亭年六 十五嗚呼平日遺什及諸賢文字井付欝攸公之曾孫琰懼其嘉範懿蹟愈久 而愈泯屬不佞而撰次馬余以末學倍切山仰之感况世誼旣篤不可以非人 辞謹受而撮其志學之實篤行義之謹勅以埃後立言君子云爾
聾窩李亨祿謹狀


 해헌(懈軒) 황명하(黃命河)의 행장(行狀)을 략기(略記)함
 공(公)의 휘(諱)는 명하(命河)로 자(字)는 자윤(子潤)이며 호(號)는 해헌(懈軒)이니 평해(平海)사람이다.
 중세(中世)에 휘(諱)가 서(瑞)이며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를 받은 어른이 있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서 휘(諱)가 옥승(玉崇)이며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분이 공(公)에게는 칠대조(七代祖)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도일(道一)이니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상의원(尙衣院)의 별제조(別提調)의 행직(行職)을 지냈으며 조부(祖父)의 휘는 중식(中寔)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에 올랐고 아버지의 휘는 석전(石建)이니 통덕랑(通德郞)이었으며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시경(是經)의 따님이요 대사성(大司成) 벼슬을 지낸 종(棕)의 후예로서 효종(孝宗) 2(二)년 신묘(辛卯)(서기 1651(一六五一)) 3(三)월 22(二十二)일에 온계리(溫溪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품(天禀)이 영특하시어 나이 겨우 7~8(七·八)세에 가정에서 배움을 받았는데 글을 들으면 곧 외울 수 있었고 말을 잘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소재(小宰) 강공(姜公) 석규(錫圭)가 본군에 와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공을 한 번 보고 여남(汝南)의 안자(顏子)라고 칭찬했다.
 그리하여 공이 경전(經傳)과 사적(史籍) 등을 강구(講究)하고 재능을 갈고 닦아 학문(學文)에 능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서파(西坡) 오공(吳公) 도일(道一)이 문장가(文章家)로서는 당할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지우고 또한 공과 더불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書)를 논(論)하고 토의(討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그 당시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기꺼이 더불어 시(詩)를 주고 받았으니 동리(東里) 이공(李公) 은상(殷相)과 전승인 이공(李公) 태좌(台佐)와 옥천(玉川) 조공(趙公) 덕린(德麟)과 병와(瓶窩) 이공(李公) 형상(衡祥)과 지촌(芝村) 김공(金公) 방걸(邦杰)과 보한(保閒) 안공(安公) 연석(鍊石) 등은 모두 문장(文章)과 도의(道義)로 맺은 교분이었다.
 불행하게도 열두번의 향시(鄕試)와 두 차례의 과거(科擧)에도 끝내 뽑히지 못했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그를 애석해 했었다.
 아! 공이 대해(大海) 해월(海月) 두 선생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선대(先代)가 물려 준 규범(規範)을 계승하여 상제(喪制)와 조상(祖上)을 받드는 범절을 다하여 향중(鄕中)에서는 모범이 되고 후학(後學)들에게는 본보기로 존경받아 족히 세상에 크게 쓰여질 인물(人物)이었는데 불우(不遇)해짐에 감정이 고조(高調)하여 곧 국조고사(國朝故事) 일곱 권 책을 편집하고 퇴계선생(退溪先生)이 금계선생(錦溪先生)에게 주신 수필(手筆)을 서첩(書帖)을 만들어 장미 이슬로 손을 씻고 장중히 완독(玩讀)하며 현자(賢者)를 추존(追尊)하는 정성을 기울였다. 그 때 마침 흉년이 들었는데 사가(私家)의 곡식 150(一百五十)섬을 내어 빈민을 구휼하니 감영(監營)과 본읍(本邑)에서 포상(褒賞)이 내려지고 조정(朝廷)에서는 특별히 높은 품계(品階)를 내렸지만 여러번 사양했다.
 상감(上監)의 명을 받은 어사(御史) 오명준(呉命준)이 또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특출한 사람이라고 공을 천거(薦擧)하니 조정에서 장계(狀啓)를 받고 특별히 참봉(參奉)을 제수했다고 한다.
 물러나서는 하정(霞亭)을 짓고 계당(溪堂)에서 마음을 수양하는 바른 성정(性情)을 길렀으니 하정(霞亭)은 곧 천석(泉石)을 즐기는 곳이요 계당(溪堂)은 즉 후학(後學)을 장학(奬學)하는 곳이었다.
 산수(山水)만 아름답던 고장을 문헌(文獻)이 성(盛)한 지방으로 변화시켰는데 을미년(서기 1715(一七一五)) 정월 11(十一)일에 침방(寢房)에서 천명(天命)이 다하여 운명(殞命)했으니 향년이 65(六十五)세였다.
 아! 공이 평일에 남긴 저술(著述)과 제현(諸賢)들과 주고 받은 시문(詩文)이 모두 화재(火災)를 당해 소실(燒失)되었는데 공의 증손(曾孫)인 염(琰)이 그 훌륭한 모범과 떳떳했던 행적(行蹟)이 세월이 더 오래될 수록 더욱 없어질까 두려워서 나에게 행장(行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는지라 내가 배움이 없는 후학(後學)으로서 산같이 높이 우러르는 감회가 더욱 간절한데 하물며 세의(世誼)가 이미 깊은 처지로서 행장을 지을 사람이 못된다고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받아서 학문에 독실(篤實)했던 뜻 가짐과 행의(行義)가 근칙(謹勅)했던 사적의 요점을 취하여 서술하고 후세의 경계(警誡)가 될 훌륭한 말을 남길 군자(君子)를 기다릴 따름이다.
  농와(聾窩) 이형록(李亨祿) 삼가 짓다.

b-054.1748468564.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9 06:4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