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암황교욱효행략(宿巖黃敎旭孝行略)
숙암(宿巖) 황교욱(黃敎旭)의 효행(孝行)을 간략히 기함
현재의 상감(上監) 42(四十二)년 을미(未)에 향중(鄕中)의 유학자(儒學者)
이목연(李穆淵)등 55(五十五)인이 연명(聯名)으로 안찰사(按察使)에게 글을 올려
청(請)하기를
“본군(本郡)에 사는 효자 황교육(黃敎旭)은 즉 선조조(宣祖朝)에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진 징사(徵士) 대해(大海) 황선생(黃先生)
휘(諱) 응청(應淸)의 9세손(九世孫)입니다. 학문을 쌓고 후학(後學)을 가르쳐
빛나는 명성(名聲)이 무성했으며 천성으로 타고난 효도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며 어려서 백부(伯父)의 후사(後嗣)가 되어 홀어머니를 30(三十)여년이나
봉양(奉養)하여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무진년에 서울의 별시(別試)에 응시(應試)하려고 올라갔는데 아침 어머니가 꿈에
보여서 그 날로 행장(行裝)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중로(中路)에서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말을 들으니 과연 그 날이 꿈에 보이던 날이었습니다.
한 달을 넘기고 집 뒤의 산록(山麓)에 장지(葬地)를 정하니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뒤라고 하여 엄금(嚴禁)하는지라 장례(葬禮)를 지낼 방도가 없어서 수개월 동안
짚자리를 깔고 상청(喪廳)을 지키는데 온몸에 부종(浮童)이 나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귀신불이 사흘 밤을 계속하여 묘혈(墓穴)로 점쳐 놓은
곳을 밝게 비쳐주는 지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 효심(孝心)에 감동(感動)되어 흔쾌히 안장(安葬)을
승락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모친의 연세가 70(七十)을 넘기도록 한 방에 기거(起居)하여 봉양했는데 노환(老患)이
심하여 항상 물고기를 낚아 원기(元氣)를 돕도록 하던 중 하루는 연달아 큰 붕어가
낚아지더니 갑자기 큰 뱀이 앞에 나타나서 낚시를 방해하는 듯하며 급한 사정을
알리는 듯 하는지라.
마음이 동요되어 걸음을 재촉하여 집에 돌아오니 환후(患候)가 막 숨을 거두려는
처지여서 붕어를 달여드려 연속 효험을 보아 15(十五)개월이나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신사년(辛巳年)에 생부상(生父喪)을 당하여 집에서 20(二十)리 거리 되는 산에 장례를
마쳤는데 매월 초하루와 보름 날에 성묘(省墓)함을 비바람이 사나워도 거르지
않았으며 하루는 산에 오르기가 피곤하여 무덤 가에서 잠깐 쉬어가려는 중에 꿈
속도 아닌 듯한데 한 노인(老人)이 급히 부르며 하는 말이 일기가 이렇게 사나운데
어찌 그렇게 잠이 빠졌는가 하므로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진눈깨비가 퍼부어
산 길을 분간할 수 없었는데 노인이 황홀하게 앞길을 인도하는 것이 뜬 구름의
그림자처럼 의희(依稀)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성묘길을 보호해 주는 듯이 십여차례 나타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산신령(山神靈)이 감동한 것이라 하니 이와같이 특이한 효행은
나라에서 정려문(旌閭門)을 내려 포상(褒賞)함이 마땅합니다”
라고 했다.
그렇지만 개혁(改革)이 되는 시대(時代)를 만나서 그 일은 결국 중도(中途)에
없어져서 지금까지 사림(士林)에게 한(恨)을 품게 하고 말았다.
공(公)이 순조(純祖) 33(三十三)년(서기 1833(一八三三)) 계사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性品)과 특이(特異)한 인품(人품)이었으며 자라서는 효도와
우애(友愛)를 독실히 행하고 겸해서 학문을 다스려 마음에 간직함과 행동으로 옮김이
너그럽고 순후(淳厚)함으로 일관(一貫)하여 남과 다투는 일이 없으니 이웃 마을과
향중(鄕中)이 모두 대해선생(大海先生)의 가정 학풍(學風)이라고 칭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살던 곳에 기이한 바위가 별자리처럼 늘어져 있는 것을 위하여
숙암(宿巖)이라고 호(號)하였으며 명망(名望)과 행의(行義)가 함께 높아
향중(鄕中)의 모범이 됐다고 말했다.
죽계(竹溪) 안택선(安宅善)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