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황세술유적(孝子黃世述遺蹟)
효자(孝子) 황세술(黃世述) 유적(遺蹟)
무릇 효도(孝道)란 백(百)가지 행실의 근본이다. 효로써 선대(先代)를 위하면
정성스러우며 효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성스럽고 효로써 남을 사귀면 신의(信義)가
있으며 일상생활의 행위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백세(百世)가 지난 후에도
효자라면 오히려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효도는 사람에 있어서 큰 것이
아니겠는가.
효자(孝子)의 성(姓)은 황씨(黃氏)요 휘(諱)는 세술(世述)이며
평해황씨(平海黃氏)의 후예(後裔)로서 해월선생(海月先生) 휘(諱) 여일(汝一)의
현손(玄孫)이요 처사(處士)인 휘(諱) 증(增)의 아들이다.
세상에 나면서부터 천성이 순진하고 효도(孝道)로웠으며 항상 부모의 얼굴빛으로
불편 여부를 살펴 부모의 마음에 들도록 효도하기를 흡사 바보처럼 뜻을 어김이
없었다.
새벽과 저녁에 문안(問安)드리는 일과 부모의 몸과 마음을 봉양함에 있어서
정성과 공경을 갖추어 극진히 하여 부모만 생각하고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6(六)년 동안 여묘(盧墓)생활을 하며 피눈물이
베개와 자리를 적시며 슬퍼하는 효성이 사람들을 감동케 하여 나무하는 아이와
소 먹이는 목동(牧童)들이 지금도 그 곳을 지나다니며 그 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효자골이라 한다.
국기일(國忌日)주1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고기가 없는 나물밥을 먹었으며 이웃 마을에
초상(初喪)을 당했다는 말을 들으면 또한 술과 고기를 차리지 못하게 했고 사람을
접대하거나 자기 일을 행할 때에도 한결같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남과 다투는
일이 없으니 원근(遠近)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높이 복종하며 해월선생(海月先生)의
집안 얼굴이라고 칭찬했다.
시조공(始祖公)의 단소(壇所)에 옛날부터 비(碑)도 없고 또 비각(碑閣)도 없었는데
공(公)이 종중(宗中)의 선배(先輩)들과 더불어 계획을 협의하여 짚신과
청려장(靑藜杖)주2 차림으로 각군(各郡)을 두루 돌아다니기를 비바람이 부는 날도
폐하는 일이 없었으며 정성을 다하여 자재(資材)를 모아 비(碑)를 건립하고
단(壇)을 쌓아서 지금까지 멀리 선조를 추모(追慕)함에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과연
누구의 힘이었던가.
공(公)의 효행에 대해서는 이농와(李聾窩) 형록(亨祿)과 장노헌(張魯軒)
동준(東浚)과 같은 제공(諸公)들의 유집(遺集) 글 속에 자세히 올라 있으며
선조(先祖)를 위한 사업에 힘을 다한 업적(業績)도 강릉(江陵)의 종인(宗人) 휘(諱)
택정(宅正)이 사실(事實)을 서술한 글 속에서 볼 수 있다.
무릇 군자(君子)가 덕(德)을 심고 공(功)을 닦는 것은 장차 후세대(後世代)를
위해 남기는 것인데 공은 이미 대(代)를 이을 후사(後嗣)도 없고 단단한
혈성(血誠)은 단지 양친(兩親)을 섬김과 위선(爲先)하는 사업에 있어서 차라리 몸이
죽어도 후회없이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그 세상 사람들이 명예(名譽)를
구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거리가 먼 것이다. 내가 늦게 태어나서 비록 공이
살던 세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시(常時)에 남몰래 늙은 어른들께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일과 향중(鄕中) 선배들의 문자(文字) 속에서 접(接)할 수 있었는데
지금 또 보사(譜事) 때문에 마침 시조공(始祖公)의 선재(先齋)에 모여서 때때로
공손히 절 드리니 이끼 낀 비석(碑石) 머리와 단(壇)가의 늙은 소나무에는
어슴프레 공의 손때가 아직도 새로운 듯하여 자못 사람들로 하여금 격세(隔世)의
감회(感恢)를 참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공의 자손이 마침내 세계(世系)를 잇지 못하니 누가 능히 제안(提案)하여
각파(各派)의 여러 종친(宗親)으로 하여금 그 당시에 공이 성력(誠力)을 다해
이룩한 사실(事實)을 알게 하겠는가.
가만히 생각하니 전해지는 말이 점점 없어지고 공의 기풍(氣風)의 영향(影響)이
더욱 멀어 질까 두렵기 때문에 유적(遺蹟)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우리
종인(宗人)들이 보고 감화(感化)하도록 하노라.
족손(族孫) 병(昞) 삼가 짓다.
주1. 국기일(國忌日): 국왕(國王)이나 왕비(王妃)의 제삿날
주2. 청려장(靑藜杖): 명아주대로 만든 지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