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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황영수전(孝子黃榮洙傳)
효자(孝子) 황영수(黃榮洙)의 전기(傳記)
무릇 효도란 행동의 근원이요 인간도리(人間道理)의 상정(常情)이니 아비가
비록 자애(慈愛)롭지 못해도 자신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들으니 죽곡(竹谷)에 사는 선비 황영수(黃榮洙)는 관향(貫鄕)이 평해(平海)사람으로서
시조(始祖)의 휘(諱)는 낙(洛)이니 학사공(學士公)이며 휘(諱)
온인(溫仁)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이 금오위(金吾衛)의 대장군(大將軍)이었으며
휘(諱)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였으며 휘(諱) 응청(應淸)은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시호(諡號)가 문절공(文節公)이요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다.
휘(諱) 여일(汝一)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고
호(號)는 해월당(海月堂)이며 휘(諱) 중신(中信)은 진사(進士)로서 호(號)는 노암(魯庵)이니 증세(中世)의 현조(顯祖)이시다.
조부(祖父)의 휘(諱)는 재행(載行)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였으며 아버지의 휘(諱)는 보석(輔錫)이요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니 공(公)은 죽곡리(竹谷里)에서 출생하여 대대로 영천(永川)에서 살았다.
가정 형편은 청빈(淸貧)했으며 천품이 온화하고 어진 덕(德)을 닦아 오직 공경함으로써
대대로 이어온 세업(世業)을 지켰으며 밭 갈고 나무하는 것으로 생애(生涯)로 삼으면서
밤이 되면 부모님의 잠자리를 보아드리고 새벽이면 밤사이의
안부를 물으면서 무슨 음식을 드실 생각인가를 물어 하루도 부지런히 부모를
위해 힘쓰지 않은 날이 없었다.
부모님이 수년간이나 병석에 계실 때에도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백약(百藥)이 효력이 없어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려서
수십일 간이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으니 누구인들 감복(感服)하지
않겠으며 누구인들 경탄(敬嘆)하지 않겠는가. 그 부모님의 상고(喪故)를 당해서는
슬퍼서 가슴을 치는 모양이 절도(節度)를 잃을 정도였으며 제전(祭奠)을 드릴
때에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라 극진히 하여 유감(遺憾)이 없게 했다.
3(三)년간을 여막(廬幕)에서 지내며 나물밥을 먹으며 슬퍼하여 모습이 수척해지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뿐만도 아니라 지난 신해(辛亥)년에는 향중(鄕中)에서 그 효행(孝行)을 표창했고
심지어 서울의 성균관(成均館)에서도 표창해 주었으며 보화원(補化院)에서 주는 상도 받았으니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며 만민(萬民)이 칭찬하며 하례(賀禮)하고 하늘과 사람이 모두 감동(感動)했다.
황재옥(黃載玉) 형이 나를 찾아와서 전기(傳記)를 지어달라고 부탁하므로 내가
고집스럽게 사양해도 되지 않아 견문(見聞)도 얕고 식견(識見)도 적은 사람으로서
몇 줄 글을 간략하게 지으니 가히 땀이 날 일이요 부끄럽고 부러운 일이다.
황효자(黃孝子)에 대한 행인(行人)들 입비(口碑)가 영세(永世)토록 무궁하게
썩지 않을 것이다.
신해(辛亥) 11(十一)월에
순천(順天) 박림규(朴林圭) 삼가 기하다.
화북(華北) 죽곡(竹谷) 황만수(黃萬洙) 제단(提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