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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진사노암황공묘갈명(成均進士魯庵黃公墓碣銘)
성균진사(成均進士)인 노암황공(魯庵黃公)의 묘갈명(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중신(中信)이요 자(字)는 자정(子貞)이며 호(號)는
노암(魯庵)이고 성(姓)은 황씨(黃氏)로서 고려 때에 벼슬이 태자검교(太子檢校)였던
휘(諱) 온인(溫仁)의 어진 후예이다. 3(三)대를 내려서 휘(諱) 서(瑞)는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었으며 아들 종량(宗
亮)은 호부상서(戶部尙書)였고 그 아들 세영(世英)은 벼슬이 예빈시(禮賓寺)의
동정(同正)이며 그 아들 용기(龍氣)는 벼슬이 예빈정(禮賓正)이고 그 아들
길보(吉甫)는 벼슬이 병사(兵使)였으며 그 아들 득재(得載)는 벼슬이 현감(縣監)이요
그 아들 옥숭(玉崇)은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벼슬이 한성판윤(漢城판尹)이며
그 아들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니 공(公)에게는 고조부(高祖父)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는 우(瑀)이며 벼슬은 성주목사(星州牧使)이고
조(祖)의 휘는 응청(應淸)이니 임자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하고 효행(孝行)이 특이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이 제수되고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졌으며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고 있으니 세상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고 칭한다.
아버지의 휘는 거일(居一)이니 호(號)는 명계(明溪)이고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에 증직(贈職)된 영덕정씨(盈德鄭氏)로서
성균사성(城均司成)을 지낸 자성(自成)의 증손녀이며 징(澄)의 따님으로서
여사(女士)의 행의(行義)가 있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선조(宣祖) 19(十九)년 병술(1586(一五八六))에 공(公)을 낳으니
나면서부터 재질(質)이 특이하고 총명과 영특함이 뛰어나서 나이 15~6(十五、六)세가
되어서는 배움을 좋아하는 행의(行義)와 어질다는 명성(名聲)이 크게 떠들석했으며
기유년(己酉年)에 태학(太學)에 올라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에 사림(士林)의
의논이 괴리(乖離)된 방향으로 퍼져나갔으나 공(公)이 홀로 바르게
지키며 흔들리지 않으니 모두 그를 대단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인조(仁祖) 14년(1636(一六三六))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아들 연(𨬔)을
데리고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니 그 사실이 영양사란록(永陽四亂錄)에 실려 있으며
장여헌(張旅軒) 선생(先生)의 문하에 유학(遊學)하여 부지런히 학문에 힘써서
선생의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으며 일생(一生)의 큰 업적이 영천지(永川郡誌)에
실려있다.
인조(仁祖) 16년 무인(戊寅)(1638(一六三八))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53세였으며 영천군(永川郡) 화북(華北)의 단호동(丹湖洞) 노가곡(魯柯谷)
중봉(中峯)의 자좌(子坐)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니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된 호가 동봉(東峯)이며 이름 극립(克立)의
따님으로서 부덕(婦德)이 있어서 군자(君子)의 배필 역할을 잘했으며 묘(墓)는
합봉(合封)이다.
5남1녀(五男一女)를 길렀으니 맏아들 연(𨬔)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서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냈고 다음은 혜(鏸)이니 정묘년의 이괄(李适)의 난(亂)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賊)을 토벌(討伐)했다.
다음은 정(鋌)이요 다음은 일(鎰)이며 다음은 진(鎭)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였고
딸은 김굉좌(金宏佐)에게 출가했다.
윤(𨬔)의 계자(系子)는 영하(永河)이고 혜(鏸)의 아들 영하(永河)는 백부(伯父)에게
출계(出系)했고 다음은 필하(弼河)와 치하(治河)이며 딸은 남주명(南胄明)과
남도상(南道(怕))에게 출가했다.
정(鋌)의 아들은 성하(聖河)와 중하(仲河)이며 일(鎰)의 아들은 시적(時頔)이고
진(鎭)의 아들은 립(垃)과 길(坫)이요 영하(永河)의 아들은 수길(壽吉)이며
필하(弼河)의 아들은 세동(世東)이요 치하(治河)의 아들은 재흠(載欽)이며
성하(聖河)의 아들은 원길(元吉)과 정길(貞吉)이다.
중하(仲河)의 아들은 영숙(永淑)과 영선(永善)이요
시적(時頔)의 아들은 성징(聖澄)과 성종(聖宗)이며
립(垃)의 아들은 세호(世浩)이고 길(培)의 아들은 세룡(世龍)이며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公)이 그 덕행에 만족한 수(壽)를 누리지 못하여 그 쌓은 포부(抱負)를
펼치지 못하고 죽었으니 세상에 누구인들 후세 사람을 위해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리요. 지금 공의 살던 세상과는 멀어졌고 문헌(文獻)도 모두 없어졌으며
또 옛날에 세운 비문(碑文)은 곧 공의 종형(從兄)인 동명공(東溟公) 중윤(中允)이
지은 것이었는데 비(碑)가 갈라지고 이끼가 메워져서 분명하지 않아 읽을 수
없게 되니 후손들이 떳떳하시던 행적(行蹟)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서 장차 돌을
다듬어 묘도(墓道)의 비석을 개갈(改碣)할 계획으로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의
글을 책임지으므로 여러번 사양해도 되지 않아 세계(世系)는 간력히 서술하고
그 자손록(子孫錄)은 자세히 써서 후세(後世)에 천지무궁(天地無窮)토록 전하게
했다.
이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聿追大祖之諸業 대조(大祖)의 서업(緖業)을 잘 계승하며
克蒙賢師之奬詡 어진 스승의 칭찬과 격려를 크게 받았으니
可以徵典刑之紆 재능(才能)이 넉넉한 전형(典型)을 징험할 수 있다.
餘惟其龜頭蠕足 오직 그 거북 두겁과 용트림 바탕의 비석(碑石)은
垂千萬世而過者 족히 천만(千萬)년 내려가리니 지나는 사람들아
必式 반드시 본받으라.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지 아홉 번째의 정미(丁未)년(1907(一九○七)) 3월(三月) 초하루 날
종후인(宗後人)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 벼슬을 한 헌([土憲])이 짓다.
주1. 장여헌(張旅軒): 장현광(張縣光)의 호(號)가 여헌(旅軒)이다. 선조(宣祖) 때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報恩縣監)을 시작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辭退)하고 학향(學向)에 전념했다. 인동(仁同)의 동락서원(東洛書院)에 제향(祭享)되며 여헌문집(旅軒文集)이 전(傳)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