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황각민묘갈명(鶴고黃覺民墓碣銘)
학고(鶴阜) 황각민(黃覺敏)의 묘갈명(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각민(覺敏)이요 자(字)는 각부(覺夫)이며 호(號)는
학고(鶴皐)이니 평해(平海)에서 세계(世系)가 나온 황씨(黃氏)이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에 한(漢)나라의 학사(學士)였던 휘(諱) 낙(洛)이
시조(始祖)가 되며 중세(中世)에 휘(諱)는 서(瑞)요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익대공신(翊戴功臣)이었기 때문에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호(陞號)하도록
했으며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서 휘(諱) 옥숭(玉崇)은 벼슬이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고
아들은 휘(諱)가 우(瑀)이니 목사(牧使) 벼슬을 했으며 아들의 휘는
응청(應淸)이니 선조(宣祖) 때의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여 특별히 진보현감(眞寶縣監)이
제수(除授)되었으며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리고
사림(士林)에서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하고 있는데 이 분이 세상에서
말하는 대해선생(大海先生)이다.
아들은 휘(諱)가 유일(有一)이요 호(號)는 호곡(虎谷)이니 종형(從兄)인
해월공(海月公) 휘(諱) 여일(汝一)과 더불어 일찍이 학봉(鶴奉) 김선생(金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으며 선조(宣祖) 20(二十)년(서기 1587(一五八
七)) 정해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직첩(職牒)의 내봉(內封)을 뜯어
보지도 못하고 병으로 여관(旅館)에서 졸(卒)하여서 성균정자(成均正字)에 증직(贈職)되었다.
아들은 휘가 중길(中吉)이니 선무랑(宣務郞)이요 그 아들은 휘가 선(銑)이요
호(號)는 춘소(春昭)이니 백졸암(百拙菴) 유선생(柳先生) 휘(諱) 직(稷)의
문하에서 배움을 받아 스승의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으며 아들은 휘가
명노(命老)요 호(號)는 백졸재(百拙齋)이며 그 아들은 휘가 세평(世平)이니 공(公)의
아버지로서 숨은 덕행(德行)이 있었고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처사(處士)
임손(任巽)의 따님으로서 사복재(思復齋) 정(定)의 후예이다.
영조(英祖) 계묘년 10(十)월 15(十五)일에 공이 전도(傳道)마을 집에서 출생하니 총명하고
영특하여 범상한 아이들과는 놀지도 않았으며 15(十五)세도 안 되어서 벌써 엄전하기가
어른의 거동이 있었으며 장년(長年)이 되어서는 조부(祖父) 앞에서
수학(受學)했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배움을 체득(體得)하여 게으름 없이
부지런하였다. 부모의 곁에 있을 때에는 응답(應答)이 공경하며 자제(子弟)로서 한가지
일도 과실을 범하지 않았으며 종족(宗族)을 대함과 손님과 친우를 접대함에도
정성스러우며 신중하여 모든 행동이 법도가 있었다.
노경(老境)에 이르러서는 한가롭게 지내다가 경자년 11(十一)월 6(六)일에 별세하니
78(七十八)세의 수(壽)를 누렸다.
서문(西門)의 임좌(壬坐) 둔덕에 장례를 지냈으며 증손(曾孫)인 수곤(壽坤)이
벼슬하여 귀하게 된 때문에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로 사복시정(司僕寺正)
벼슬이 증직(贈職)되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인 예안김씨(禮安金氏)로서 참봉(參奉)을 지낸
원걔(元凱)의 따님이며 기제일(忌祭日)은 공과 같은 날이요, 묘(墓)는 서문(西門)의
임좌(壬坐)에 있는 공의 묘와 합봉(合封)이다.
아들 넷을 두었으니 동헌(東憲)은 출계(出系)했고 동간(東幹)과 동좌(東佐)와
동필(東弼)이 있는데 동간(東幹)은 이중(履中)을 계자(系子)로 했고
동좌(東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아들 필중(必中)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건중(建中)과 치중(致中)과 범중(範中)이
있으며 딸은 월성(月城) 이창룡(李昌龍)에게 출가했고 동필(東弼)은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으니 아들 이중(履中)은 동간(東幹)에게 출계(出系)했고 아들
민중(敏中)이 있으며 딸은 인동(仁同) 장심구(張審矩)와 야성(冶城) 송정용(宋鼎鎔)에게 출가했다.
이중(履中)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으니 아들은 수범(壽範)과 수기(壽箕)와
수극(壽極)이요 딸은 함창(咸昌) 김기조(金基祚)와 월성(月城) 이장화(李章華)에게
출가했으며 동중(東中)은 아들 하나와 딸 다섯을 두었으니 아들 수곤(壽坤)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부호군(副護軍) 벼슬을 했고 딸은 월성(月城)
이응소(李應韶)와 진성(眞城) 이도섭(李道燮)과 선성(宣城) 김낙원(金樂遠)과
반남(潘南) 박표중(朴標中)과 함창(咸昌) 김진대(金鎭大)에게 출가했으며
민중(敏中)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아들은 수종(壽鍾)과 수찬(壽瓚)과
수두(壽斗)이며 딸은 안동(安東) 권동하(權東夏)에게 출가했고, 남은 자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이 살던 세상은 멀어져서 묘(墓)가에 서 있는 나무가
벌써 아름드리가 되었지만 묘도(墓道)에 비명(碑銘)을 아직도 세우지 못했으니
후손된 사람들이 공의 떳떳했던 행적(行跡)이 오래 될수록 쉽게 없어질까
두려워서 장차 비석(碑石)을 다듬어 묘도에 세울 계획으로 어느날 후손인 세명(世明)과
주손(主孫)인 기순(基舜)이 소백산 밑의 초가에 사는 나를 찾아와서
비문(碑文)에 나타낼 글을 지어 달라고 자못 청하는 지라. 내가 늙고 혼몽하여
사양했으나 그의 청(請)이 더욱 간절하여 감히 분수에 넘침을 잊고 드디어
차례대로 서술(敍述)하고 명(銘)을 말하노니
質禀純慤하고 타고난 천성이 순박하였고
行篤倫常이라 행실은 인류(人倫)과 강상(綱常)에 독실했다.
績躬旣厚에 몸에 쌓은 덕의(德義)가 이미 더터우니
克世而昌이라 세상을 잘 살아 번창하였다.
嶷嶷西山이여 서산(西山) 같이 높고 높은 그 덕망은
百世典型이라 백세(百世)를 내려가며 모범이 되겠네
鑱辭揭美하니 비석(碑石)에 말을 새겨 아름답게 나타내어
昭示無疆이라 천지가 무궁토록 밝게 표시(表示)하노라.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여 아홉번째 무신년(서기 1968(一九六八)) 11(十一)월 갑자일에
족후손(族後孫)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헌([土憲])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