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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황경일묘갈명(處士黃慶一墓碣銘)
處士黃慶一墓碣銘 直箕城縣之西虎田負壬之原有宰如而封者는 寔處士黃公衣潟之藏而 論撰不備證하야 響無憑하니 其十世孫正英이 爲是之懼하야 詢干諸宇 宗하고 將伐石謬責으로 懸詩於余하니 顧年耗精散에 有不敢是役而盖 以契而不以文也요 亦不獲終辭하야 遂強昏而叙之曰公의 諱는 慶一이 요 字는 景元이요 姓은 黃氏니 其先은 中朝人也라 學士諱는 洛이니 桴海以東하야 泊于平海하시니 爲始貫之祖요 東京時에 有諱瑞니 以 翊戴勳僉議評理侍中으로 諡를 文節이라 陞縣爲郡하고 入我 朝하야 有諱玉崇이 漢城判官이라 自是로 爲東土著閥하야 或以文學行義之篤 이요 或以簪組甲之榮하니 於公에 曾祖以上六世也라 祖諱는 瑀니 星 州牧使요 考諱는 應淸이니 以孝로 聞於朝하야 命棹楔後로 以弓旌超 하고 授通訓大夫眞寶縣監하니 即世稱大海先生也라 妣는 蔚珍張氏니 江界府使伯孫之子漢輔之女斗 嘉靖丙寅에 擧公于正明先第하야 犀角이 200 豐滿하고 聰識이 絶倫하며 甫上學에 不煩提督而曉解文義하니 八九
歲時에 先大海公이 呼韻命賦하시면 公이 應口輒對에 句法이 警絶하니 大海公이 因出示從子海月公曰此哥與而兒中允이 俱以才藝로 迥出同 輩하니 異日家戶重拓之望이 在若等矣라하더라 自是로 文詞日進하야 聲譽大噪러라 審에 移居于寧海元邱하니 鄉士爭相揖而願交하며 長道 以軸으로 遇坎而蹶于하고 霄之木이 觸雷而折하니 實丁亥三月三日이 라 見于世纔二十二라 實蹟이 載寧海府誌하다 其棚也에 遠近士友가 爭執挽謀而悼之하니 公之見慕於人者多類此러라 配務安朴氏參議世淳 의 女니 無育하야 以仲兄子中美로 爲嗣하고 女는 金是相이라 墓는 在虎田先瑩下雙封이라 於乎라 公以篤厚之資와 超邁遇之才로 若久於 世면 大可以法宮之賞이요 小可以扶世敎淑人心이은마는 而乃瑞草琦 花之朝榮暮悴는 又何也오 昔에 王子安李長吉數君은 雖早世하야 爲 可寃이나 而膝閣高軒之文으로 膾炙人口하니 寃可洩也라 而公則無零 之瑙句之箱麓하야 無以供球璧之玩하니 是亦重可悲也오 且弟仍이 中 賛하야 至八世孫敎旭號宿巖이 有誠孝特行하니 邑倅가 使臺로 交章
褒啟라 有七子하니 喹淇瀅瀷渺溶澯이요 十二世孫石英은 文而世其家 者也 中英正英喆英極英斗英達英浩英壽英舜英智英德英澤英은 各房 子也요 十二世孫暾子載塤은 其世嫡也라 遂爲銘하노니 銘曰 敻想黃 公은 麗鮮無族이라 海爺賢庭이요 月翁同塾이라 胡門闊侃은 柳氏家 法이라 三棣交輝에 六經是嚼이라 其來有爲러니 其去何條고 惟虎之 原은 瀧崗之麓이라 焰紫淑氣가 繞封不熄이라 我銘玄石하니 永來百 世이라 처사(處士) 황경일(黃慶一)의 묘갈명 漢陽趙獻基謹撰 곧 기성(箕城縣의 서쪽 호전(虎田) 임방(壬方)을 등진 둔덕에 봉분(封墳)이 우뜩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처사(處士) 황공(黃公)의 무덤인데 비문(碑文)이 불비하여 평생의 이력(履歷)을 증명할 근거가 없으니 그의 십세손(十世孫)인 정영(正英)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종중(宗中)사람에게 물어보고 장차 비 석(碑石)을 세우기 위해 비명(碑銘)의 글을 잘못 나에게 책임지우는 지라. 생
각해 보니 내가 나이도 많고 정신도 산만하여 감히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할 듯 하며 세의(世誼)로 보아서도 글이 짧은 것으로 또한 끝내 사양했으나 할 수 없어서 드디어 노혼(老昏)한 것을 무릅쓰고 서술(敍述)해 말하노니 공(公)의 휘(諱)는 경일(慶一)이요 자(字)는 경원(景元)이며 성(姓)은 황씨(黃氏)이니 그의 선대 (先代)는 중국(中國)사람이다. 학사(學士)인 휘(諱) 락(洛)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평해(平海)에 정박 (定泊)하시니 이 분이 관향(貫鄕)의 시조(始祖)이며 고려(高麗) 때에 휘(諱) 서(瑞)는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서 첨의평리시중(僉議評理侍中)의 벼슬을 하고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가 내렸기 때문에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호(陞號)하게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諱) 옥승(玉崇)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라。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드러난 문벌(門閥)이 되어 혹은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독실했고 혹은 높은 관작(官爵)과 과거(科舉擧)에서 장원(壯元)의 영광(榮光)을 누렸으니 공에게는 증조(曾祖) 이상 六세(世)이다. 조부(祖父)의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아버지의 휘 (諱)는 응청(應淸)이니 효행(孝行)으로 조정(朝廷)에 알려져서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선비로서 대부(大夫)의 반열(班列)에 올라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로 진보현감(眞寶縣監)의 벼슬이 제수(除授)되었으니 이분이 세칭(世稱) 대해선생(大海先生)이시다. 어머니는 울진장씨(蔚珍張氏)이니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백손(伯孫)의 아 들 한보(漢輔)의 따님이며 명종(明宗) 二十一년(서기 一五六六) 병인에 정명 (正明)의 선제(先第)에서 공(公)을 낳으니 기골(氣骨)이 풍만(豐滿)하고 총명과 식견(識見)이 특출하여 겨우 배움에 나아가서부터 공부를 보살펴 주지 않아도 문의(文義)를 밝게 풀어나갔으며 八、九세 때에 선친(先親)이신 대해공(大海 公)이 운(韻)을 부르며 부(賦)를 지으라고 명하시면 공(公)이 운(韻)이 입에서 떨어지자 곧 대구(對句)를 말하였는데 글구(句)를 짓는 법이 놀랍게 절묘하니 대해공(大海公)이 그 글귀를 조카인 해월공(海月公)에게 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이 아이와 너의 아이 중윤(中允)이 모두 같은 또래 중에서 재주가 특출하니 후 일에 우리 가문(家門)을 크게 넓힐 희망이 이 아이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 로부터 글재주가 날마다 달라져서 명성(名聲)이 크게 떠들석 했으며 학문이 성 수한 뒤에 영해(寧海)의 원구(元邱)에 집을 옮겨 사니 영해(寧海)의 선비들이 서로 읍(揖)하며 친교(親交)를 맺기를 원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발걸음이었는 데 액운(厄運)을 만나 병이 들어 요절(夭折)했으니 실로 정미년 三월 초三일 이며 세상을 산 것이 겨우 二十二년인데 실적(實蹟)이 영해부지(寧海府誌)에
실려있다. 그를 장사 지낼 때에 원근(遠近)에 사는 선비벗들이 다투어 만사(挽詞)와 제 문(祭文)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했으니 공이 남들로부터 존모(尊慕)의 대상이었음이 모두 이러했다. 배위(配位)는 무안박씨(務安朴氏)이니 참의(參議)벼슬을 지낸 세순(世淳)의 따 님이나 아들을 두지 못하여 중형(仲兄)의 아들 중미(中美)를 후사(後嗣)로 삼았고 딸은 김시상(金是相)에게 출가했으며 묘(墓)는 호전(虎田)에 있는 선대(先代)의 분영(墳塋) 밑에 공의 묘와 쌍봉(雙封)이다. 아! 공이 독실하고 순후(淳厚)한 자질과 특출한 재주로서 만약 세상을 오래 살 수 있었다면 크게는 가히 조정(朝廷)에 몸을 담을 영예(榮譽)가 있었을 것이요 작게는 세상의 교회(敎化)를 담당하여 인심(人心)을 선도(善導)했을 것인데 도 리어 상서(祥瑞)로운 풀과 아름다운 꽃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든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옛날에 왕발(王勃)과 이장길(李長吉)은 비록 일찍이 죽은 것이 원통한 일이나 왕발이 지은 등왕각(謄王閣) 서문과 이장길이 지은 고헌과(高軒過)라는 글은 널리 세상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원한을가히 풀었다 하겠으나 공은 작은 글귀하나 책상자에 남은 것이 없어서 구슬같은 글을 감상할 수 없으니 이것이
또한 거듭 슬픈 일이다. 또 후손이 중세(中世)에 쇠체(衰替)하였다가 팔세손(八世孫) 교육(敎旭) 호 (號)는 수암(宿巖)에 이르러 효성(孝誠)과 특별한 행검(行檢)이 있어서 군수 (郡守)가 조정에 포장(褒獎)이 내리도록 장계(狀啓)를 올렸다. 아들이 일곱사람 있으니 규(漆)와 기(漢)와 벽(瀅)과 익(瀷)과 진(황)과 용(溶)과 찬(涤)이요 십세손(十世孫)인 석영(石英)은 문학(文學)으로 그 가문(家門)의 대(代)를 이은 사람이며(中英)과 정영(正英)과 철영(喆英)과 극영(極英)과 두 영(斗英)과 달영(達英)과 호영(浩英)과 수영(壽英)과 순영(舜英)과 지영(智英) 과 덕영(德英)과 태영(澤英)은 각집의 아들이요 십이세손(十二世孫) 돈(暾)의 아들 재훈(載塤)이 그의 적손(嫡孫)이다. 드디어 명(銘)을 하노니 명(銘)에 가로대 멀리 생각하오니 황공(黃公)께서는 고려와 조선조(朝鮮朝)에 번성했던 씨족이라. 대해선생(大海先生)의 어진 아 들로 태어나고 해월공(海月公)과 같은 학당에서 글을 배웠다. 호문(胡門)에 화기롭고 강직한 것은 당나라 류비(柳玭)의 가훈(家訓)이었다. 삼형제가 서로 배움에 힘쓰니 육경(六經)의 글을 모두 익혔다. 타고난 재질(質)은 세상에 쓰일 것인데 죽음으로 가는 길은 어이 그리 빨랐던 고 오직 호전(虎田)의 임좌(壬坐) 둔덕은 선대(先代)의 분영(墳塋)이 있는 산록
이다. 붉게 타오르는 맑은 기운이 봉분(封墳)을 둘러 싸고 멈추지 않네 검은 비(碑) 돌에 내가 명(銘)을 하노니 백세(百世)토록 영원히 전해지리라。 한양(漢陽) 조헌기(趙獻基) 삼가 짓다. 註一。王 勃:唐代의 詩人。字는子安。詞藻가 奇鹿하여 四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交趾로 가는 길에 南昌에 들러 都督閻伯嶼를 위하여 지은 滕王閣序는 有名하다. 二。李長吉: 唐나라 宗室의 人士李賀의 字이며 詩文이 特出하였으나 二十七歲로 夭折했다. 三。柳北의 家訓: 唐나라 때의 名門의 子孫。小學外篇에 있는 柳氏家訓을 지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