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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선생묘갈명략(東溟先生墓碣銘略)
동명선생(東溟先生)의 묘갈명(墓碣銘)을 략기(略記)함
공(公)의 휘(諱)는 중윤(中允)이요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호(號)는
동명(東溟)이라 했고 성(姓)은 황씨(黃氏)로서 해월선생(海月先生) 휘(諱)
여일(汝一)의 아드님이다.
조부의 휘(諱)는 응징(應澄)이요 호(號)를 창주(滄州)라하며 판결사(判决事)
벼슬에 증직(贈職)되었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으며 고조(高祖)의 휘(諱)는 보곤(輔坤)이니 생원(生員)이었으며 고려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지내고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를 받은
휘(諱) 서(瑞)가 그의 현조(顯祖)이시다.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서 호(號)가 구봉(龜峯)이며 휘(諱) 수일(守一)의
따님이며 둘째 어머니는 한양최씨(漢陽崔氏)이니 병사(兵使)벼슬을 지낸 원(垣)의
따님이요 계비(繼妣)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서 덕원군(德原君)인 추(樞)의
따님이며 성종대왕(成宗大王)의 4세손(四世孫)인데 공(公)은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소생(所生)이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10(十)년 정축(丁丑)(서기 1577(一五七七)) 5(五)월 7(七)일에
천전(川前)(: 내앞)의 외가(外家)에서 출생하시니 골상(骨相)이 범상한 아이들과 달랐으며
말을 잠깐 들어도 곧 잊어버리지 않으니 조부이신 창주공(滄州公)이 기뻐서
말하기를 “우리 집이 글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나이 15~6(十五、六)세가
되어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두루 읽었으며 부친께서 경재잠(敬齋箴)과 심잠(心箴)을
손수 써서 주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도적들을 피해 호전(虎田)에 갔을 때에 마침
산재(散在)한 왜적에게 붙잡혔는데도 신색(神色)이 조금도 변치 않고 태연하니 늙은
적장(賊將)이 이상하게 여겨 놓아 주었다.
병신년(丙申年)(서기 1596(一五九六))에 대암(大菴) 박선생(朴先生)휘(諱) 성(惺)의
가문에 장가들었는데 그로 인하여 대암선생(大菴先生)의 문하에서 배움을
받게 되었다.
경자년(庚子年)에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을 가서 뵈옵고 여러 달 강론을
듣고 질의(質疑)를 했는데 선생께 많은 격려(激勵)와 칭찬을 들었다.
임인년(壬寅年)에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에 지나칠
정도로 애통해 했으며 을사년(乙巳年)(서기 1605(一六○五))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다.
정미년(서기 1607(一六〇七))에 아버지이신 해월공(海月公)의 임지(任地)인
영천(永川)에 가서 모시고 살았는데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이 지나가는 길에 들러서
해월공(海月公)과 여러날 강론(講論)하고 토론(討論)했으며 공(公)도 많은 질
문을 하여 어려움을 풀었다.
경술년(서기 1610(一六一〇))에 요사한 정인홍(鄭仁弘)이 이회재(李晦齋)
이퇴계(李退溪)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는 일을 헐뜯고 배척하여
팔도(八道)의 유생(儒生)들이 정인홍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변명의 상소(上疏)를
잇따라 올렸는데 공이 본도(本道)에서 올리는 두 번째 상소의 소수(疏首)가 되어
연속 세 차례의 상소를 올렸다.
임자년(서기 1612(一六一二))에 처음 관직에 나아가서 갑인년(서기 1614(一六一四))에
직장(直長)의 벼슬이 제수되고 2(二)월에 전적(典籍)벼슬이 배명되었는데 그 때에
모반(謀返)의 허위사실을 고변(告變)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出)해야 한다는 논의(論議)가 제기되자 공은 곧 사직서(辭職書)를 올리고 귀향했다.
을묘년(서기 1615(一六一五)) 가을에 편수관(編修官)의 벼슬로 소환되었고
병진년(서기 1616(一六一六))에 또 옥사(獄事)가 일어났지만 공은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수(編修)하는 관계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지 못했다. 얼마 안되어 정언(正言)벼슬이
배명(拜命)되었는데 곧 상소를 올려서 대비(大妃)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라고
하니 광해군(光海君)이 크게 성내어 벼슬을 파직(罷職)하고 내쫓으므로 그 날로
고향에 돌아와서 산중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정사년(서기 1617(一六一七))에 흉흉한 의논이 다시 일어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깊숙이 가두는 사건이 있어서 선공(先公)께서 그 때에 동래부사(東萊府使)로
계시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공조참의(工曹參議)의 벼슬을 내리며
소환(召還)하여 연속 부임하라고 재촉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간당(奸黨)들은 결단코 멈추지 않고 9(九)월에 공에게 헌납(獻納) 벼슬을 제수한
것은 장차 시험해 보려는 뜻이었다. 공이 잠시 동안 벼슬에 나아갔다가 친환(親患)
때문에 사직서를 올리고 돌아왔는데 계속하여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제수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기미년(서기 1619(一六一九))에 전직(前職)인 헌납(獻納)벼슬에 부임하라고
재촉하였는데 그 때에 북방의 변경(邊境)이 소란하여 명(明)나라에서 군대를 징발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이 때는 사직서(辞職書)나 올리고 자신의 편리만을 취할 때가
아니라” 하고 드디어 5(五)월에 뢰자관(賚資官)에 취임하여 요동(遼東)에 나아갔다가
7(七)월에 돌아와 복명(復命)했으며 9(九)월에 지평(持平)벼슬에 배명되었다.
경신년(서기 1620(一六二○))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偕)로 첨추(僉樞)벼슬에
올랐는데 얼마 안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를 배명받고 4(四)월에 명(明)나라에
주문특사(奏聞特使)로 뽑혀가서 5(五)월에 명나라 도성(都城)에 다다르니 마침 명나라
황제(皇帝)가 승하하여 사신(使臣)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여가가 없었으며 9(九)월에
돌아와 복명(復命)했다. 신유년(서기 1621(一六二一))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소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으며 또 좌부승지(左副承旨)
겸 봉조하(奉朝賀) 벼슬에 옮겼다가 8(八)월에 용천부사(龍川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오랑캐 기마병(騎馬兵)이 강을 건너 선천(宣川)을 공격하여 명나라 장수를
습격하니 광해군(光海君)이 비변사(備邊司)로 하여금 정당(政堂)에서 대책회의를
열도록 했는데 공이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로서 참석하여보니 대신(大臣)들의
의논이 적(賊)을 견제(牽制)하자는 계획에 불과하여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적(賊)의 세력이 더욱 급박해졌다.
공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사실(史實)을 인용하여 아뢰니 도승지(都承旨)가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황(黃)아무개는 화친을 주장하는가”라고 했다.
공은 곧 사직(辞職)을 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임술년(서기 1622(一六二二))에 부친의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전과 같이
지켰으며 계해년(서기 1613(一六一三))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먼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廢妃)하자는 주장에 부동(附動)한 죄를 들어서 죽이기도
하고 귀양도 보냈는데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공은 승정원(承政院)에서
화의(和議)를 외쳤다 하여 해남(海南)에 귀양보내라는 명이 있어서
부친의 영위(靈位)에 곡(哭)을 하며 하직하고 그 날로 등정(登程)하니 백주(白洲)
이공(李公)이 어사(御史)로서 공을 해남까지 압송(押送)할 나졸(拿卒)에게 잘
보호하라고 당부했다. 적소(謫所)에 도착하여서는 독서(讀書)로 일삼았으니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공이 상시로 찾아와서 토론하다가 그의 종제(從弟)인
선진(善進)과 선일(善一)을 보내어서 공에게 배움을 받게했다.
을축년(서기 1625(一六二五))에 위에서 그의 억울한 사정을 살펴서 서산(瑞山)으로
적소(謫所)를 옮기도록 배려했으며 경오년(서기 1630(一六三○))에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계유년(서기 1633(一六三三))에 비로서 면죄(免罪)를
받아 고향에 돌아왔다.
갑술년(서기 1634(一六三四))에 죄명을 씻고 다시 벼슬에 올라 직첩(職帖)이 내려졌다.
을해년(서기 1635(一六三五))에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날마다 서사(書史)를 즐겨
탐구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냈으나 정축년(서기 1638(一六三八))에 남한산성(南漢山城)
밑에서 청(淸)나라와 굴욕적(屈辱的)인 화친(和親)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슬프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산협(山峽)을 여기저기 우거(寓居)하여
일정한 거처가 없이 살았으며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노증련(魯仲連)을 참으로 생각케 하는구나 동쪽으로 숨은 그 대의(大義)는 헛말이
아니었네” 라고 하며 외종제(外從弟)인 표은(瓢隱) 김공(金公)과 더불어 틈만
있으면 회포를 풀다가 무자년(서기 1648(一六四八)) 3(三)월 29(二十九)일에 침방(寝房)에서
천명(天命)을 다하였으니 향년(享年)이 72(七十二)세였다.
군(郡)의 북쪽 무방(墨防)에 있는 신좌(辛坐)를 등진 둔덕에 장례(葬禮)하였으며
배위(配位)인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아들이 없어서 셋째 아우인
중헌(中憲)의 아들 석래(石來)를 계자(系子)로 삼았으며 두 딸은 군수를 지낸
조정웅(曹挺融)과 참봉(參奉)을 지낸 정기덕(鄭基德)에게 출가했다.
석래(石來)의 세 아들은 규(圭)와 기(基)와 근(墐)이며 네 딸은 호군(護軍)을
지낸 이후재(李厚載)와 서한진(徐翰振)과 정석규(鄭錫圭)와 박태후(朴泰厚)에게
출가했고 규(圭)의 세 아들은 세중(世重)과 세항(世恒)과 세태(世泰)이며 두
딸은 손명걸(孫命杰)과 동추(同樞) 벼슬을 한 권대성(權大成)에게 출가했으며
기(基)의 두 아들은 세장(世鏘)과 세종(世鍾)이요 딸은 박시점(朴時漸)에게
출가했고 현손(玄孫)이 열세 사람이니 상하(相夏)와 헌하(憲夏)와 경하(景夏)와
사하(師夏)와 정하(鼎夏)와 여하(呂夏)와 종하(鍾夏)와 우하(宇夏)와 주하(宙夏)이며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이 영특한 자질을 타고나서 원대(遠大)한 뜻을 가지고 어려서는
해월공(海月公)의 가정교육에 유염(揉染)되고 자라서는 대암공(大菴公)의 문하에서
감화(感化)를 받아 견문(見聞)이 날로 어지고 행리(行履)가 날로 득실했으며
또 사수(泗水)와 입암(立岩)의 사이를 오가며 학문의 잘잘못을 바로잡아서
일상생활로부터 관직의 진퇴(進退)에 있어서 의리(義理)로 판단함에 이르기까지
깊이 궁구(窮究)하고 세밀히 분석(分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스승과 학우(學友)들
사이에서 얻은 학문(學問)의 힘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아! 세상은
사람이 좋게 성취(成就)되는 것을 미워하는지라. 광해주(光海主)의 조정에
소명(召命)되어 승정원(承政院)의 회의 때에 화친(和親)을 주장했다는 구실로
번번이 공을 견제하니 아! 참 심한 일이로다. 그 당시 공으로 하여금 소명(召命)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고 밑 돌았다면 음해(陰害)하려는 화근(禍根)이 장차 병석에
있는 부친에게 파급(波及)되었을 것이니 사람의 자식된 도리로서 이런 처지에
어떻게 처신(處身)해야 마땅하겠는가? 동계(桐溪) 정선생(鄭先生)이 죄의
정상(情狀)을 살펴서 용서하자는 청을 올린 것은 공정한 판단에서 나온 것이며
하늘이 밝게 내려다 보시어 면죄(免罪)의 명이 내려져서 공의 억울한 한(恨)이
비로소 천하에 밝혀지게 되었으니 오히려 한(恨)될게 무엇이겠는가? 드디어
그 대략적인 행의(行誼)의 요점을 취하여 명(銘)을 말하노니
명망(名望)이 높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큰 유학자(儒學者)의 동생으로 자라났다. 충(忠)과
효(孝)의 행의(行誼)가 완전했으며 덕(德)과 예(藝)의 학문을 겸하였도다. 근
본(根本)이 있음이 이와 같으니 어디에 쓰인들 마땅하지 않으리오. 위험을 무
릅쓰고 임금에 대하여 대비(大妃)에게 효도하라고 아뢰었도다. 저기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이길래 참소하여 교묘하게 죄를 씌우나 흰 구름 위에 파리가 점을
찍었고 구유(歐臾)가 둥근 모양 잃어버렸네. 대현(大賢)인 정동계(鄭桐溪)의
한 말씀에는 사리(事理)의 판단에 차질이 없어 상감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렸으니
나라에 무고(誣告)한 죄명 사라지게 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누워있으니 만사가
탄식만을 자아네게 하네. 절통한 마음이 풍천(風泉)에 깊어 산야(山野)에 발
자취를 남기었도다. 그렇게 살다가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무방(墨坊)의 언덕에
잠들었도다. 내가 이 비석에 명(銘)을 말하여 공평(公評)한 의논(議論)을 계
시(揭示)하노라.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지음
주1.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호(號). 관직(官職)은 대사헌(大司憲). 조식(曹植)과 이황(李滉)에게 성리학(性理學). 선조(宣祖) 6년(六年)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대사헌(大司憲)에까지 올랐으며 명문장가(名文章家)로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주2.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호(號). 선조(宣祖) 때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현감(縣監) 좌랑(佐郞)등을 지냈으나 광해주(光海主) 때에 참판(參判),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學問)에 전념했다.
주3. 정인홍(鄭仁弘): 중종(中宗), 인조(仁祖) 조(朝)의 대북파(大北派)의 영수. 조식(曹植)의 문인(門人).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직(官職)에 올라 이산해(李山海),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옹접을 주장하여 광해(光海)가 즉위(卽位) 후에 대사헌(大司憲)에 기용되고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大妃)를 폐비시킨 주역(主役)이며 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참형(斬刑)되었다.
주4. 이회재(李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호(號). 중종(中宗) 때에 문과(文科)에 올라 정자(正字), 정랑(正郞), 부사(府使) 등을 거쳐 명종(明宗)이 즉위(卽位)한 후에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올랐으나 사직했다.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주리학(主理學)의 개척자(開拓者)이며 정치가(政治家)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면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五。李退溪:李滉의 號。朝鮮中期大學者。官職으로는 兩館大提學을 歷任한 뒤에 故鄕에 은퇴하
여 朱子學을 集大成한 大儒學者로서 陶山書院을 창설하여 後進養成에 힘써 많은 人才를
배출했다.
六。疏 首:上疏를 올리는 儒生의 우두머리。
七。永昌大君:宣祖의 継妃인 仁穆大妃의 아들로 태어나서 鄭仁弘이 영수인 大北派에 의하여 계측
옥사 때에 살해되었음.
八。仁穆大妃:宣祖의 継妃로서 永昌大君의 어머니이며 光海君에 의하여 西宮에 幽廢되기도 했다.
九。尹善道:號는 孤山 海南人이다. 光海君 때에 成均館의 儒生으로 權臣 이이첨 일당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流配되는 등 一生을 거의 流配生活로 一貫하고 그의 時調는 鄭澈의
歌辭와 더불어 朝鮮詩歌의 雙璧을 이루고 있다.
十。鄭桐溪:鄭蘊의 號이다. 永昌大君의 처형이 人倫에 어긋남을 上疏함。江華府使를 참수하라
고 주장하여 十年間 제주의 大靜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仁祖反正 후 석방되어 大司諫、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十一。魯仲連:中國戰國時代의 齊나라 高士
十二。金道和: 號는 拓菴이며 義城人이다. 學問에 정통했고 遺逸로 천거되어 義禁府都事를 지냈
으며 義兵將으로 功勳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