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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11

갑술중간발(平海黃氏世譜甲戌重刊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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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海黃氏世譜甲戌重刊跋
余嘗讀蘇氏譜至孝悌之心油然而生歎曰吾黃之貫平海者自學士公始焉 逮至金吾公爲中祖歷三世而檢校評理大匡公兄弟分爲三派世代雖遠其 初亦一也累經兵燹文籍不傳派系無徵魯衛之親視若楚越則吾宗疎漏之 感庸有其極粵自庚寅以來始設譜廳於豐之錦陽遂成完譜每修敦睦盖錦 海兩先生草輯而始也廼者壬申春錦翁宗嗣永來氏思所以尊祖保宗之義 勇發設譜於貫鄕之意而專人致書貫鄕諸宗會同敦議通論各邑設役於月 松先齋實累百年未遑之事而皇祖儼臨雲仍傍列推之一本眞孝悌之心油 然者是也族叔萬英氏暨中坤甫巨細凡百無不監任殫誠竭力且其冷手殘 枰主財主務事將就緖其幸也甚噫顧余蔑學參在讐校之列而不揣僭越畧 敍重刊顚末庸附于左
  甲戌後裔孫暉謹跋


 갑술중간발
 내가 일찍이 소씨(蘇氏)의 보학(譜學)을 읽다가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生)한다는 구절(句節)에 이르러서 탄식하여 말하되 우리 황씨(黃氏)의 관향(貫鄕)을 평해(平海)로 한 것은 학사공(學士公)으로부터 비롯하여 금오공(金吾公)이 중조(中祖)가 된 후(後)로 3세(三世)를 지나서 검교(檢校) 평리(評理) 대광(大匡)의 3형제분(三兄弟分)이 나누어 3파(三派)가 된 것이다. 세대(世代)가 비록 멀어졌어도 그 처음은 또한 하나로 같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병화(兵火)로 문적(文籍)이 전(傳)하지 못하고 파계(派系)의 증거가 없어 노위(魯衛)의 친(親)함을 초월(楚越) 즉 떨어져 상관이 없는 것같이 보고 왔은 즉 오종간(吾宗間)의 소루지감(疏漏之感)이 항상 그 극(極)에 처(處)해 있었다.
 지나간 경인년(庚寅年)에 보청(譜廳)을 풍기(豊基) 금양(錦陽)에 두어 드디어 1차(一次) 완보(完譜)를 이룬 후(後)로부터는 누차(累次) 돈목(敦睦)함을 닦아왔으나 이는 다 금계(錦溪) 해월(海月) 양선생(兩先生)의 초집(草輯)에서 시작(始作)된 것이다. 다시 임신년(壬申年) 봄에 금계(錦溪) 선생(先生)의 주손(胄孫) 영래(永來)씨(氏)가 조상(祖上)을 밝히고 종족(宗族)을 보호할 큰 뜻으로 평해대동보(平海大同譜)를 수보(修譜)할 것을 발의(發議)하여 통문(通文)을 평해(平海)와 각지방(各地方)으로 보냈더니 제종(諸宗)이 대거(大擧)하여 모여 합의(合議)를 보고 보청(譜廳)을 월송(月松) 추원재(追遠齋)에 설치(設置)하여 보역(譜役)을 시작(始作)하였다. 이와 같은 대동보사(大同譜事)는 백년(百年)에 한번 이루어지기 힘드는 일인데 선조(先祖)의 영혼(靈魂)의 가호로 꼭 조상(祖上)들이 임존(臨存)하시고 자손(子孫)들이 그 좌우(左右)에 뫼시고 앉아 합심협력(合心協力)하는 느낌으로 보사(譜事)가 진행(進行)되어갔다. 그럼으로 추원재(追遠齋)에 오는 사람은 동종(同宗) 누구나 다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우러남을 금(禁)치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족숙(族叔) 만영(萬英)씨(氏)와 동종(同宗) 중곤(仲坤)씨(氏)가 크고 작은 범백사(凡百事)를 돌보아 성력(誠力)을 기우렸으며 그들은 사경제(私經濟)도 넉넉지 못한데 보청(譜廳)의 재정(財政)도 사무(事務)도 모두 두 분이 도맡다시피하여 수년(數年) 동안을 불고(不顧) 가사(家事)하고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둘 때까지 시종일관(始終一貫)하였으니 종중(宗中)의 대행(大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호(嗚呼)라 회고(回顧)하건데 나와 같은 부족(不足)한 사람이 교정(校正)의 책임(責任)을 지고 집사(執事)의 일원(一員)으로 뒤따라왔으니 부끄러운 일이나 시말(始末)을 잘 안다는 핑계로 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중간(重刊)의 전말(顚末)을 대략(大略) 기술(記述)하여 용렬하게도 서문(序文) 말미(末尾)에 붙이노라.
  후예손(後裔孫) 휘(暉) 근발(謹跋)

b-111.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3 22:3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