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구재기(喜懼齋記)
희구재(喜懼齋) 기(記)
군(郡) 북(北)쪽에 한 집이 있으니 지명(地名)은 사동(沙銅)이라 이르니 해월선생(海月先生)의 구지(舊址)라. 이제 그
후손(後孫)들이 그 집을 지키고 있으니 어질고 효(孝)한 자라 내가 오래 이 군(郡)에 있어 그
행실(行實)이 다하고 또 일찍이 그 문(門)을 재조(再造)한 것은 유인(有仁)의 부친(之親)에 있음이라. 연령(年令)
83(八十有三歲)이며 유인(有仁)의 연령(年令)도 또한 60(六十)을 지나 3년(三年)이 경과(經過)한 지라. 모발(毛髮)이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하고 치근(齒根)이 3~4개(三四個) 밖에 남지 않고 그 모골(貌骨)이 상접(相接)하여 엄호(掩護)하기를 영아(嬰兒)
같이하여 항상(恒常) 옆에 있으니 누우나 일어날 적에는 반드시 의복(衣服)을 정돈(整頓)하고 이농기(耳聾氣)가 있어
언어(言語)가 불통(不通)할 때는 반드시 옆에서 붓으로 말을 대신해서 전달(傳達)해
주시고 혹(或) 명가(命駕)하실 적엔 반드시 몸을 떠받쳐 마상(馬上)에 부측(扶側)하고 또 뒤에 수행(隨行)을
하여 집까지 보호(保護)하다. 집이 본래(本來) 빈한(貧寒)해서 봉양(奉養)의 범절(凡節)이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양잠(養蚕)을 하여 명주를 짜고 양계(養鶏) 양돈(養豚)을 하여 고기를 대접(待接)하고 농사(農事)을 지어 음식(飮食)을
공양(供養)하니 맛이 입에 맞을 수가 없고 옷이 완전(完全)한 것이 있을 수 없으나 그 어버이
보양(保養)하는 데는 극(極)히 풍후(豊厚)했다. 슬프다. 만약(萬若) 사람들이 다 이 사람과 같으면
효자(孝子)가 딴데 있으랴. 일찍 군내(郡內) 인사(人士)들을 접(接)하면 모두 말하기를 아무개의 효의(孝誼)는
나이 겨우 8세(八歲) 때 모부인(母夫人)과 같이 길을 가다가 홀연(忽然) 미친 개가 나타나 모(母)의 발
뒤꿈치를 물었을 적에 어머니를 껴안고 슬피 울며 그 개가 문 자리를 입으로
빨고 그 개를 꾸짖으니 그 개는 곧 죽고 개에 물린 자리도 곧 나았다. 15세(十五歲) 시(時)에
어머니가 병이 들어 임종시(臨終時) 단지주혈(斷指注血)하여 명(命)을 연명(延命)한 사실(事實)이 있었다. 슬프다.
만약(萬若) 사람들이 누구든지 이와 같으면 대인(大人)이 안될 수가 없다. 당소(倘所)에 이르대
영지(靈芝)는 근본(根本)이 있고 예천(醴泉)은 근원(根源)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선춘기(鮮春期) 군가(郡家)에 있을 적에 높이 솟아 있는 운령(雲嶺)은 실상(實想) 좋은 물가에 동백(桐栢)이
있는 것을 감상(感想)한 것과 같아서 한 글로 상보(相報)해 가로대 내가 간절히 부자(夫子)의 희구(喜懼)의
훈계(訓戒)를 취하여 써서 오친(吾親)이 거(居)한 집에 게시(揭示)하니 자네가 나의 기(記)를 달아주게. 나는
들어보니 더 공경(恭敬)한 것이 감히 그 청하는데 외롭지 아니한 것보다 낫다. 얼마 전(前)에
내가 선성(宣城)을 지날 적에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배알(拜竭)한 적이 있는데 원(院)의 서(西)쪽 시내 위를 보니
한 높은 마루위 문방 사이에 편(扁)이 쓰여 였으니 이는 곧 농은(聾隱) 이선생(李先生)의 집이라 선생(先生)
또한 일찍이 거(居)하시는 곳이다. 대개 항상(恒常) 그 눈에 있다 하여 종신(終身)이 되도록 정성껏
봉양(奉養)한 뜻을 이르대 자내외 명명(命名)이 또한 그 의(義)라 이르므로 기록(記錄)한 것이 또한
옳지 않을까. 억별히 또한 인자(人子)를 위(爲)해 노친 받듬이로다. 남의 어버이를 친(親)히 한 자(者)는
남도 그 친(親)을 사랑하고 남의 형(兄)을 공경(恭敬)한 자(者)는 남도 그 형(兄)을 공경(恭敬)하나니 지금
자네의 당(堂)에 간절히 깊이 축하(祝賀)하는 바이다. 원(願)컨대 자네는 자손(子孫)이 갓 자라고
가정(家庭)이 화목(和睦)해서 세세년년(歲歲年年)에 이 낙(樂)이 항상(恒常) 향유(亨有)하여 그 가히 두른 한 자(者)는 다
없게하고 길건 자(者)는 무진(無盡)한 즉 전하(天下)의 낙(樂)이 어찌 이보다 더 낳을 수가 있으며 어찌
이에 더 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글로서 드리노라.
세(歲) 신유(辛酉) 5월(五月) 일(日) 전(前) 지군사(知郡事) 권준(權晙) 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