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동기(沙銅記)
사동기(沙銅記)
진주(眞珠)로부터 울진(蔚珍)으로 또 기성(箕城)에 이르기까지 바닷가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비록 명산대천(名山大川)과 매우 아름답고 특출한 경관(景觀)은
없어도 관동(關東)의 청숙(淸淑)한 기운이 여기에 다했으니 그 청수한
기운이 다하여 지낼 수 없는 데에는 반드시 산세(山勢)의 굴곡(屈曲)해 내려오는
상서로운 기운이 하나로 뭉쳐 막혀진 것이 바로 그 곳 사동(沙銅)이다.
내가 처음 기성(箕城)으로 귀양살이를 올 때에 망양정(望洋亭)을 거쳐 남쪽으로
6~7리(六七里) 쯤 지난 곳에 이른바 사동(沙銅)이란 마을이 있었다. 그 산세(山勢)를
보면 줄지어 있는 모양이 기복(起伏)이 심하고 뛰는 듯하다가 달리는 듯하며
난새(鸞)와 봉황이 날개를 벌려 둘러 안은 듯한 곳에 한 마을이 형성(形成)된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기이(奇異)하게 생각하여 산세(山勢)가 굴곡하며 내려오는
상서(祥瑞)로운 기운이 하나로 뭉쳐진 기(氣)가 반드시 물체(物体)에 모아지고
또 사람에게 모아지는 것인데 물체가 그 기(氣)를 홀로 차지할 수 없고 또한
반드시 기골이 장대(壯大)하고 재주가 뛰어난 선비가 그 마을에 난 사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에 한림원(翰林院)의 황학사(黃學士)의 어른을
뵈오니 머리는 백발(白髮)인데 눈썹은 길고 화사한 빛이 얼굴에 가득하며 가슴에는
가득 화기(和氣)가 차 있는 듯하여 그분에게는 좋은 자제(子弟)도 있고 가문(家門)도
좋으리라 생각했었다.
2(二)년을 지난 여름에 황학사(黃學士)가 형조(刑曹)의 원외랑(員外郞)벼슬에
있으면서 양친(兩親)을 뵈오러 고향에 왔다가 하루는 나를 찾아 주었다.
황원외(黃員外)가 을유년(乙酉年) 과거(科擧)에 합격할 때에 내가 욕되게도
시관(試官)으로 있었기 때문에 황원외(黃員外)의 문사(文詞)가 풍부(豊富)하다는
것은 벌써 알았지만 오히려 거의 사람됨을 알지 못했는데 그와 여기에서
서로 만나 10(十)여일을 지내는 동안에 그와 더불어 흉금을 헤치고 언론(言論)하는
가운데 그의 문의(文義)가 뛰어나고 기량(器量)이 넓고 큰 것에 탄복한 연후에
비로소 산세(山勢)가 굴곡(屈曲)하여 내려오는 상서(祥瑞)로운 기운이 하나로
뭉쳐져 사람에게 모아진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황원외(黃員外)에게
있음이었다.
황원외(黃員外)가 일찍이 사동(沙銅)의 서쪽 마악산(馬嶽山) 밑에 당(堂)을
지어서 모시고 있는 어른의 거처(居處)하실 곳으로 삼았었는데 내가 일찍이 그
당(堂)에 올라서 바라보니 산이 기이(奇異)하지는 않으나 빼어나고 또 아름다우며
마을이 깊숙하지는 않으나 넓고 또 길며 높은 곳은 돌출(突出)하여 언덕이
형성(形成)되었고 낮은 곳은 무너진 듯 비탈이 되었으며 깊은 곳은 개울이 되었고
그윽한 곳에는 밭 두둑이 되었으며 넓고 넓은 큰 바다가 항상 침실(寢室)의 아래에
있으며 어촌(漁村)의 자그마한 집이 백사장(白沙場) 가에 은은하게 비쳐오며
어선(漁船)과 갈매기가 포구(浦口)에 오고 가니 참으로 명승지(名勝地)의
경관(景觀)이다.
당(堂)의 주위에는 곱게 핀 꽃이 향기를 뿜고 벽옥(碧玉) 같은 대나무가 무성하고
노송(老松)이 좌우를 둘러싸며 나열(羅列)해 있으니 비록 관현악(管絃樂)이
울리는 풍류가 떠들썩하지 않아도 또한 한 당(堂)의 즐거움을 제공하기에는
충분하다. 내가 보기에는 황원외(黃員外)는 나이가 아직 젊고 어른도 겨우
60(六十)세를 넘어서 건강하시고 병이 없으니 그는 벼슬을 버리고 이곳을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할 것이 없음이 분명하다.
세상이 밝게 다스려지고 있는 이 때에 진지(眞贄)한 낯빛으로 조정(朝廷)에
나아가서 위로는 임금님의 성치(聖治)를 돕고 아래로는 배운 학문(學問)을 펼쳐
호산(湖山)의 숙기(淑氣)를 국가(國家)의 원기(元氣)로 돌린 연후에 이 당(堂)으로
돌아와서 차조(찰기가 있는 기장) 술을 빚고 물고기를 낚아 여러 며느리와
여러 손자들과 더불어 존부공(尊府公)주1의 슬하(膝下)에서 시가(詩歌)를 부른다면
산천(山川)의 경물(景物)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도 그 수석(壽席)의
앞에서는 싱싱하게 즐거운 듯하리라.
그러나 청숙(淸淑)한 기운이 비록 천지(天地)와 산천(山川)의 기(氣)가 모아진
것이지만 배양(培養)하고 작성(作成)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진실로
내가 받은 바를 잘 배양(培養)하고 진작(振作)시켜서 결핍(缺乏)이 생기고 간단(間斷)이
생기게 하지 않는다면 인재(人才)가 무성하게 계속하여 배출(輩出)될
것을 점(占) 칠 수 있다.
장차 지란옥수(芝蘭玉樹)주2와 같은 훌륭한 자질(子姪)이 황원외(黃員外)의
가문(家門)에 충만함을 보리니 황씨(黃氏)의 복(福)이 대체로 끊어지지 않음이라.
황군(黃君)은 그것을 힘쓸지어다.
마을을 사동(沙銅)이라 이름한 것은 산(山)에서 취(取)한 것이다.
마악산(馬嶽山)이 백암산(白巖山)에서 근원하여 동쪽으로 50(五十)여리(餘里)를 뻗어내려 바다에
직면(直面)하여 웅크린 듯 멈췄으며 하천(河川)은 마악(馬嶽)의 서북(西北)에서
발원(發源)하여 바다로 흐르는데 해구(海口)에는 고산(孤山)이 있고 고산(孤山)의
북쪽에 포구(浦口)가 있으니 서경(西京)이 그 이름이다.
월(月) 일(日) 아계(鵝溪)주3가 기록하다.
주1. 존부공(尊府公): 남의 집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
주2. 지란옥수(芝蘭玉樹): 남의 선량(善良)한 자제(子弟)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주3.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