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보서(庚寅譜序)
경인보서
평해의 우리 황씨는 동한 건무년대에 비롯 우금에 이르되 1740여년전 한(漢)나라로 부터 배로써 바다를 건너
평해 월송포에 상륙과 더불어 황(黃)장군께서 지금의 유허지에 송원을 조성하셨다는 사실은 기성고사로부터 전함이나, 이 모두
아득히 멀고 먼 옛적이라 자상함이 불가니라.
신라를 말미암아 고려에 이르기까지 큰 벼슬과 귀한 소임 또는 학문과 명망이
전후 연면하였것만 그간의 문적이 없어지고 또는 보첩이 전치 아니하니
각기 흘러 옮긴 고장을 관향으로 삼음이라.
그중에도 기성의 본적은 잃치않고 파계의 근원은 오직 우리 금오공으로 중조로 하야 이조 중엽 명종 년간에
나의 선조 금계(錦溪)선생께서 처음 초보를
부집1)하시니 이어 해월(海月)선생 및 남당(南塘)공께서 보첩을 닦으시고
또 근자에는 증숙조 처정(處正)께서 수록,
삼종조부 상종(尙鍾)께서 신적을 넓이 찾아 수필로 보첩을 완성했으나 급함이 아님으로 간행을 멈추었던 중
갑신(甲申)(1764)년에 장단의 일가 섭(燮)씨께서 외손 김여강과 더불어 합의하여 양무공(襄武公)파보를
인쇄, 한권을 가지고 천리(千里)길을 달려와 보이니
그 성의와 노고는 대단했으나 손록의 계대가 오차가 많음으로 고증의 자료 수집으로 인하여 2년을 넘겨 병술(丙戌)년에 논의,
보소를 풍기 금양으로 옮긴 그 다음해 가을 섭(燮)씨께서 상복을 하고 준령을 넘어와 족인 일(鎰)씨께 그 일을 주간케하고
유사를 정하여 계파 단자를 거두어 기축(己丑)년 여름에 비로소 인판을 다듬고 자획을 새기며 출판에 들어가 수미 6년 간에 보사가
이제 완성을 보니 참으로 종중의 경사며 대행이니라.
옛날 해월(海月)선생께서 초보를 닦으실 때 평리(評理)공이 금오(金吾)공의 후손인 줄을
미쳐 알지 못하고 그 서문에 도발미상일조지탄(徒發未詳一祖之歎)이라고 하여 누가 과연 한 할아버지의 자손인지
자세히 알 수 없음을 탄식한 것이나, 지난번 장단보 역시나 대광공의 윤서를 찾지 못함이
옛날에 당시의 박식하고 뜻있는 선비들이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의 그 위차와 세계에 의심이 있던 바이니
이제야 구명하여 분명한즉, 평리공이 금오공의 후예이오 대광공이 평리공의 아우가 됨이니
삼파 서차와 소목 항렬이 질서 분명하니 후손들의 유감이 없게 됨이니 이야말로 종중의 다행이 아닐수 없다.
기타 부록의 모든 파는 장적이나 자기의 가보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며 옳타하오나 이미 구보에 빠진 것을 구태여
이번에 편입할 수 없기로 이는 후일을 기다릴 수 밖에 없노라.
보사가 이미 이루어짐에 제종중이 윤구(潤九)가 금계공의 종손이며
또 보소 옆에 살며 참여 시종을 듣고 본 바니 몇줄의 서문을 쓰라기에 종사에 관함이니 감히 불초함을 사퇴치 못하고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오호라 우리 황씨(黃氏)의 이어 흐름이 유서가 오랜 역사며 보책 중에 실려있는 선현들 중에는 많은 분들의
훈업과 공덕이 뛰어나 세인의 칭송이 자자하니 종족 후손들은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무릇 우리 모든 일가와 후손들은 보첩을 봄에 있어서 마땅히 서로 면려하여 조상의 유덕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보첩을 완성한 동종들의 힘쓴 공덕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니 각자 노력하기 바란다.
그리고 보사 진행과 경비의 다과 등에 대하여는 나의 아우가 기록한 바를 권말에 첨부하였으니 다시 부언치 않겠다.
영조 46년(1770) 경인(庚寅) 정월 후예손 윤구(潤九) 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