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보서(辛亥譜序)
신해보서
우리 동방 사대부가들은 모두 족보가 있으니 족보란 위로는 조종의 근본을 연구하며 밝히고
아래로는 자손의 출생한
바를 밝힘이오, 이로서 족보를 이루지 않으면 조상을 추모하는 성의가 완만하여지고 종족 간에 돈목의 의가 없게 될 것임에 어진 군자들이 반드시 이를 급선무로 하여 족보를 하는 바라.
오직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는 비로소 학사(學士)공께서 바다를 건너
동방에 자리하심이 우금 1820여년이요, 신라를 말미암아 고려에 이름에 명공거경과 문장덕업이
대대로 이어 빛이 났도다. 그러나 계첩이 전해지지 못함으로서 문헌상 증빙이 없어
금계(錦溪) 해월(海月) 양선생의 박학다문 하심에도 오히려
자세치 못함으로 찾고 거두고 모아 겨우 초보를 다듬어 오직 후세에게 바라는 바였더니 지난 경인(庚寅)년에 판보를 처음 이룩하여 풍기의 금양에 오래도록 그를 전함이 조상의 추원과 후예 등의 돈목에
성의를 가히 짐작함이라. 그후 신묘(辛卯)년에 춘천의 승지 도(燾)씨가 자기의 누보를 이유로
족보를 편찬이니 혹 소홀히 누보한 것과 근엄한 체통을 실추함이 있어 우리의 평해 황(黃) 종인은
이를 유한으로 여기는 이가 없지 않더니 경술(庚戌)년 가을에 다시 수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3파 자손이 합보를 도모키 어려워 검교 평리 양파는 풍기에서, 대광공파는 청안에서 보소를 설치
각조 기조로 각파 기파하였으나 오직 검교공 지파와 해월공 지파 자손이 풍기보에 누락한 분들이
청안보에 입보를 원하니 슬프도다. 이를 조상님들이 보신다면 다 같은 자손인데 누구는 후하게 하고
누구는 박하게 하겠는가? 하물며 해월공 증손 석오(錫五)씨가 청안보에 합보할 뜻을 서찰로
간청하니 첨의가 한가지로 합의나, 단지 그 단자가 늦음으로 원보에 합류치 못하고 추편에 입록이니
후인은 상고해보기 바란다.
원고가 조판에 이르니 종인 등이 나에게 서문을 촉탁키로 나는 보소에서 머물매 아는 바가
약하여 이것을 권미에 붙여둠이라。
숭정기원후 4 신해(辛亥)(1851) 2월 하순 후예손 돈(墩) 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