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보서(辛亥譜序)
신해보서
종족이 있으면 족보가 있으며 족보가 있으면 보서가 있음이니라. 보책은 깊고도 넓음은
그 씨족의 파계 근원을 밝힘이라. 서(序)라 함은 차례니 차례는 그 일의 처음부터 끝을 말함이라.
우리 동방에는 표하는 거족들이 있어 거족에는 족보가 있으며, 족보에는 서(序)가 있음이
오래 인지라.
우리 황(黃)씨 족보는 그 시초가 영조 경인(庚寅)년 풍기의 판각으로서 그 근엄과 체제가
소상하여 후인이 상고함에 능하지 않음이 없음이라. 그후 60여년 후 순조 신묘(辛卯)에
춘천 종장 승지 도(燾)씨가 첨의를 세워 족보를 다듬어 이에 마치니,
혹은 소홀하야 누보의 지탄이 없지 아니하며, 잡음이 있음에 나는 이것을 매양 한(恨)이러니
이로부터 20년이 넘어 경술(庚戌)년에 풍기 종인 헌주(憲周)씨가 도모하여
검교공 평리공 양파의 합보나 대광공 자손이 참여한 자 있어 이는 구보에도 있지 아니하며
그 내력을 들은 바도 없는 이를 양무공 제4자(子) 휘 곡(鵠)의 제2자(子)로 오록하야 인출이니,
계첩이 광포(廣布) 팔방이라 슬프도다. 이는 동족의 소목에 크나큰 실수요
이러한 일은 체통 전면에 먹을 칠함이라, 누구에게 그 책임을 매길 것인가?
이러하야 양무(襄武)공 종손 돈(墩)씨께서 이어 보소를 청안의 장내에 설치하고
통유하니 각처의 원근 종인이 합집하야 계책을 상의, 첨의가 합론, 경영에 착수함이나
유독 양한당 차자 휘 경신(敬身)파 자손이 처음에는 합의러니, 후에 이르러는 이의를 제기,
마침내에 이르러서는 누보하니, 우리는 비록 어쩔 수 없이 말하지 않으나
그대의 마음은 편안할까 아니할까 슬프도다.
우리 황(黃)의 번성하던 때의 아름다운 사적을 이미 선현들이 기술하였으니 중첩으로
말할 필요가 없으나
단 학사(學士)공이 건너오신 사적이 요즈음 나옴에
초곡(草谷)공의 집 세첩에 가로되 당(唐)나라의
학사로 되어있으니 이는 확실함이오 거짓이 아니라. 그런고로 이에 의하여 저록함이라.
즉 전날에 있지 아니 하였던 바라 이제 보소 종인 지(址)씨께서 일을 주간하여 치력하신
도흠(道欽)씨 종혁(宗爀)씨 서역에 탄성하시며 기타 고증의 일이며 교정의 역에
나는 멸식함에 이 임무에 마땅치 않음이나 외람이도 5개월을 참여 마침을 고함에,
우리 동보지인은 이 책을 보게된 즉 효우돈목의 마음이 유연하게 생함이니라.
철종 2년 신해(辛亥)(1851) 불초 예손 지선(之璿)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