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보서(甲戌譜序)
갑술보서
우리 성의 시초는 기성이었으나 평해로 고쳐진지도 이미 오랜 옛날이다.
또는 우리 종족이 세계(世系)를 닦고 보첩을 이룸도 여러차례,
경인판보 간행으로부터 경술, 경진, 임인에 이르기까지 무려 네차례나 된다.
일찍이 선생과 부로의 명문 정필로 서문, 발문, 기문이 되어 있음에
보사의 혁혁한 기록이 적지 않으나 혹은 상세하며 혹은 간략하며,
각각 때도 다르고
글도 다르기는 하나 그 사실의 대의인 즉 대동소이하다 아니할 수 없다.
거짓됨을 고치고 우그러짐을 바로잡아 강상을 붙들고 윤리를 펴서
엄하게 규범을 세웠으니 뒷날에 일하는 사람이 마땅히 옛날의 예에 의하며 모방하며 보가의 규칙을
떨어뜨리지 아니할지니라. 이 말세의 비운에 즈음하여 세태가 변해가니 장차 어떻게 변천될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나 만약 이대로 몇십년을 지나게 된다면
다시는 옛날 세대의 법칙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슬프고 가련하다. 우리들의 빈한하고
천한대 사로잡힌 제종들은 나라를 잃고 고향을 등져 거개가 천민이 되고
말았으니 그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무엇이라 말할 것인고.
이들의 근본과 처음을 생각할 때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다행히도 종족 내에 뜻있는 군자가 남아 있어
실낱같은 기맥을 일으켜 대동보의 의논을 제기하고 보청을 평해
월송 추원재에 두어 평해관향대보로써 이름을
한 것은 선덕을 따라 후예를 경계하여 관향을 굳게 지키자는 크나큰 뜻인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병란의 뒤에 문헌이
황박하여 증거가 없음으로서 통문을 발송ㅎ기를 멀고 가까움을 망라하여 보내어
동종을 규합한 즉 호응자 중 십중 오에 불과, 태반이 빠짐으로
족보가 원만치 못한 형편이니 진실로 통탄할 일로 생각하나 어찌하리오.
옛부터 전래하기를 검교 평리 대광 3종파가 합단으로 동보함을
곧 대동이라 하였고, 그리고 새로 입보자는 본인 뜻과 원함에 따라
단자를 정하되 시일이 없음으로 자세한 것을 수선할 겨를이 없어
보규의 엄한 것만을 말하고, 다만 연대와 그 당시의 내력의 여하를 증거삼고
거짓된 것을 바르게 하고 끊어진 것을 붙이고, 오직 돈목에 힘써
이 보첩을 도모해 이루어 널리 펴고져 하였다.
다행이 100세대의 뒤까지라도 이 뜻이 남게 된다면
관향 평해의 이름이 썩지 않을 것이며 성씨의 전함이 이로써 영원히
힘있게 될 것이다.
만약 후인들이 이 보책을 펴볼 때 선조님들의
훈공거경과 문장덕업이 밝게 빛나 조종의 깊은 근원과 두꺼운 뿌리가
만세의 기업으로 무궁히 전해질 것임을 잘 알리라.
이러니 우리 종중의 다행이 이보다 무엇이 더 클 것이 있으리오.
이제 동보자는 함께 학사공과 금오공의 자손이 아님이 없나니,
선대를 받들어 저술하여 이를 후세를 위하여 물려주는 도리가 이보다
더 앞설 것이 없나니라.
그러나 이 일은 진실로 크고 힘은 모자라
구보 양식에 따르지 못하고 활판으로
인쇄하니 권수가 줄어 15권의 1질이 되었다. 지금같이 재정은 곤란하고
물가는 높은 때에 이만큼 이루게 된 것도 요행이라 생각된다.
만약 주간자가 경제에 능통함과 계획이 치밀함이 없었던들 어찌 능히
이 거창한 사업을 유종의 미로 거두었으랴?
이는 모두 중곤(中坤) 종인과 만영(萬英) 병(昞) 사흠(思欽)
제씨의 조리있는 성력에서 나오는 것인 즉 그 어진 공로를 깊이
사례하는 동시에 제종 유사들의 수년간 고달픔을 무릅쓰고 끊임없는
수고에도 감사를 드린다.
족보가 이미 완성됨에 서문이
4~5편에 그치지 않을 것이나 종중 첨의가 관향보란 천년에 처음인 바
풍기 장파에서 한 말씀 없을 수 없다함에 정중히
맡김으로 나의 멸식으로는 감히 감당키 어려워 나 이미 상우(相遇)씨와 함께
저울질하여 왔고 또 종의를 쫓지 않을 수 없어 전말의 대략를 말해두노라.
갑술(甲戌)(1934) 4월 상순 을유일에 후예손 영래(永來) 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