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보서(丙辰譜序)
병진보서
오직 우리 황(黃)이 성을 얻음에 역대가 역시 태고니라.
처음에 학사(學士)공 휘 낙(洛)께서 중국 한조로부터 교지의 사신으로 인하여
표도함이 동국 평해하여, 월송 굴산 아래 머물고, 예손이 인하여 본관으로 하다.
후세에 삼형제가 있으니 장에는 갑고(甲古)시니 기성군이요,
차에는 을고(乙古)시니 장수군이오, 삼에는 병고(丙古)이시니 창원백이러라.
삼관의 후손이 산재 팔역하니 그의 베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나
연이나 평해의 선조는 휘 갑고(甲古)시니라. 이후로 휘 온인(溫仁)께서는
관이 금오장군 태자검교요, 증손에
삼형제가 계셔 장의 휘는 진(璡)이시니 관이 검교군자감이시요,
차의 휘는 서(瑞)이시니 관이 금자광록대부평리문하시중 시호가
충절이요, 삼의 휘는 용(𤨭)이시니 관이 삼중대광보국 시호가 충경(忠敬)이라,
인하여 삼파로 나뉘어 같은 소리로서 호응하며 동기로써
아끼고 구원터니 세대가 멀어짐에 후손이 번성하니 이는 한 조상의 자손이라.
옛적에 장공예(張公藝)라는 이가 9대를 한 집에서 살아 친함이
있었다 하더니 이에 비유하건대 오직 우리도 즉 일가의 지친이라,
일가 지친으로서 대동합보하면 어찌
선조를 사모하고 후예들의 너그러운 본뜻이 아니리요.
세속이여 윤강이 무너지고 족의가 소원해지니 이는 떳떳치 못하여
두려워 하노라.
지나간 수년 전에 세원(世元), 기청(氣淸), 덕출(德出) 및 첨종이 누차
토론한 바 재실이 협책으로 전사 시에는 원근의 첨종제관들이 회합하야
일야 숙박에도 곤란이 막심하와 종회의에 이를 공론한 결과
각향 첨종과 바다를 건너온 종인 준구(浚九)와 더불어 종인 제위에
서신으로 상의하고 대면으로 논의하여 통유사를 발하니
비록 이때에 경제사정은 곤란이나 돌아보건대
그 재실이 너무나도 협책함에 부득이라 하며 몇해 사이로 힘을 모아
또 힘을 들여 준공을 한 뒤에 또는 구재실 및 주사가 연구세심하야
풍마우세로 주연이 후폐하야 폐실지경이니라.
종회 석상에서 밤을 새워 촛불을 밝히고 서로히 공론하나
속수무책이러니 차제에 마침 의논회의석에 때를 맞추어 일본에 사는
종인 준구(浚九)씨가 와 참여하여 한심한 광경을 보더니
단독 힘으로 성의를 다하여 일백수십만원의 헌성금으로 원상복구 준공하니
모선의 성심은 영세불망이라 급당차시하여
재실 상하체와 주사는 이제 완공을 필함이나,
분관의 선조 기성군 이하 4대위의 제단입비며 단소의 정문 증축중건으로
영주 세명(世明)의 통유문에 인하여 종회 석상에서 공론 발문하와
각처에 유사를 지정 파견이라, 특견유사로는 경주의 윤범(潤範), 청송의
영호(永浩), 영주의 세명(世明)이 2개 성상에 각도 각군 각읍으로 순회
종중함에, 야밤의 숙박에 따뜻함이 아니며, 주간에도 역시
불피풍우로 기백만원의 찬조금을 모아, 입비며 제단 완축과 문루를 준공하니,
비록 몇백년의 뒤에라도 어찌 위선의 자랑이
되지 않으리오. 그러한즉 그 공사에 감시한 이는 기청(氣淸) 진현(鎭玄)군이오 .
또는 작년 10월 중정(中丁) 전날 저녁에 회장과 모모첩종으로
각향 첨종 회의석상에서 품고 가로되 갑술(甲戌)대동보 이후로
그 중간에 각파별 수보나 그러나 지금의 이러한 때를 당하여
후세 자손이 년대 침원하고 규모절차도 미상하리니,
차시에 대동합보가 어떠하뇨 문의한 즉 종중의 첨원이 다함께 유유지설로
찬동이라. 그후 풍기의 영종(永宗)에게 청안의 인모(麟模)로 상의하여
통문을 발하니 각처 배송 후 각기 각파 수단하여 즉 보청을
특설 평해 월송 선재로 하니, 평해는 즉 시조의 수관지향이라 선재는 즉
예손들의 추원지소니라. 시조의 예손으로 돈목 강의하야 연사로 회동 합력하면
진심으로 소감에 반드시 너나 할 것 없이 이 일에 신속이 돌아가
합단을 반드시 이룩하여 돈목으로 대사를 마친다면 근근이 한가락 남아있는
기틀을 보존하고 백여대를 흘러도 한 책에서 강구이면 위로는 부로(父老)의
전래 계훈을 이어받음이오, 아래로는 자손 등의 밝은 안목을 남김이라,
감히 참람하고 수선한 말로 그 소감의 뜻을 드리며
간략한 전말을 서술하노라.
단기4309년 세재 병진(丙辰)(1976) 10월 상순 후예손 재우(載宇)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