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진중간보서(庚辰重刊譜序)
경진중간보서 (한글 추가 및 띄어쓰기)
인류(人類)에는 인류문화사(人類文化史)가 있고
민족(民族)은 민족발전사(民族發展史)가 있으며
씨족(氏族)에는 보전(譜典)이 있어
종족(宗族)이 가보(家寶)로서 조상(祖上)을 받들고 종친간(宗親間)의
정의(情誼)를 돈독(敦篤)히 하면서 서로 유대(紐帶)의
징검다리 역할(役割)을 하게 된다.
따라서 소목(昭穆)을 밝히고
질서(秩序)를 찾아 종족간(宗族間)의 정의와
화목을 도모(圖謀)하면서
선조(先祖)의 유지(遺志)와 유훈(遺訓)을 되새기고
전래(傳來)의 숭조목종(崇祖睦宗)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계승(繼承) 발전 선양(宣揚)하는 것이 후예(後裔)로서의
도리(道理)일 것이다.
우리 황씨(黃氏)도 학사공(學士公) 휘(諱)
낙(洛) 도시조(都始祖)께서 풍랑(風浪)으로
동해안(東海岸) 평해(平海) 월송포(越松浦)에 상륙(上陸),
대지(垈地)를 축조(築造)하신지 약(約) 2천년(二千年)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다.
우리 황씨(黃氏)도 그간(其間) 10여차(十餘次)에 걸쳐 수보(修譜)하였으나
아직 누보자(漏譜者)가 허다(許多)함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옛날 소노천(蘇老泉)이 서(序)에 이르기를
한 사람의 몸이 나뉘어져서 도인(塗人)이 되기에 이르렀다 하였고,
도연명(陶淵明)의 『시(詩)에 소목(昭穆)이 이미 멀어져 노인(路人)이
되기 쉽다』라고 하였다. 이를 미루어 보건대 족보(族譜)를 오래동
안 닦지 못한다면 번영(繁榮)한 가문(家門)은 더욱 번성(繁盛)하고
멀은 자는 더욱 소원(疏遠)해져서 서로
그 본지소목(本支昭穆)을 알지 못하게 되면 다만 동성(同姓)일
따름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도 자랑스러운 조상(祖上)들이
저멀리 신라(新羅) 고려(高麗) 이조(李朝) 시대(時代)까지
나라의 고관대작(高官大爵) 중책(重責)을 맡으신 어른과 학문(學文)과
덕망(德望)이 높으신 어른들이 대대(代代)로 연면(連綿)히
이어 왔지만 특(特)히 양무공(襄武公) 휘(諱) 희석(希碩)은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봉(封) 평해군(平海君)하시고
증(贈) 우의정(右議政)하며 시(諡) 양무(襄武)로
불천지묘위(不遷之廟位)가 현(現) 평해군묘원(平海君廟院)인 바
그(其) 형상(形像)이 너무 남루허실(襤褸虛實)하여 외래(外來) 참배객(叅拜客)을
안내(案內)하기에 민망(憫惘)할 정도로 금번 수보시(修譜時)에 공(公)의
후예(後裔)들이 서로 합심협력(合心協力)하여 일부(一部)라도
보수(補修)코저 한 바 의외(意外)로 많은 협조(協助)가 있어 거의 새로히
단장(丹粧)하여 그 위용(偉容)을 보게 됨은
공(公)의 후예(後裔)들이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리오.
이 모든 것은
보소(譜所) 임원(任員) 여러분과 남달리 침식(寢食)을 잊고
전심노력한 인모(麟模) 도총무(都總務)와 윤근(允根) 장재(掌財)의
공(功)이 유별(有別)이 크다고 생각(生覺)되여
여기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며, 그리고 본인(本人)은 원래(元來) 부족(不足)한
사람으로 아는 바 없어 감(敢)히 무사(蕪辭)로서 서문(序文)을
기술(記述)할 수 있으리오만은 다만 느끼는 바를 몇 줄 적어
말미(末尾)에 붙인다.
서기2001년 신사(辛巳) 유두(流頭) 상완(上浣) 후예손 전 속초동해경찰서장 총경 만근(萬根)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