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황선신묘갈략(忠烈公黃善身墓碣略)
충렬공 황선신 묘갈략
강화도의 부녀자 아동 초부 또는 어부들까지도 3충(三忠)을 다 전송하니 과연 3층은 누구 누구인가? 중군의 황선신(黃善身) 천총의 강흥업(姜興業)
구원일(具元一)이라. 3층의 죽음이 한날이요, 그 의가 또한 한가지나
아장으로써 먼저 적을 막아 싸울 것을 주장함도
황(黃)공이오, 피병이라도 이끌고 성밖에 나아가 적을 막기 위해
전사하기를 선창함도 황(黃)공이라.
공의 자는 사수(士修)요 평해인으로 문하시랑 평해군 양무공 휘 희석(希碩)의
7세손이라. 융경 경오(1570)생이오, 정유(丁酉)년 무과에 급제하여 초계군수를 거쳐
훈련원정에 이르렀더니, 정축(丁丑) 호란에 주장이 방비를 해이하게 함으로
재삼 간청하나 주장 김경징(金慶徵)의 무리가 조롱하고 경멸하여
노장은 겁을 내도다 하며, 장강의 천작이 참호가 있으니 호병이 어찌 날라 들어오리요, 공에게 늙고 무기력한 군사 1초대를 예속시켜 방수케 하리라 하거늘,
공이 강흥업(姜興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일이 이쯤 되면 우리들이 오직 한번 죽을 뿐이다 하고, 진해루 아래로 내려가 죽기로 싸워서 적군 수백명을
죽이고 힘이 다하여 적에 사로잡혀 굴복치 않고 죽으니라.
그후 15년에 효종대왕(孝宗大王)이 경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차탄 왈,
내 일찍 황선신(黃善身)이 연로하고 그 용모가 범인과 다름이
없는 고로 사람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은 것이므로 그 인품을 몰랐도다 하시고, 유사께 하명하야 정려문을 세우고 증직하여 충렬사에 배향케 하고
그 자손을 관에 등용케 하니라.
내가 추찰할 때 당일에 순절한 이 많은 바나, 공경들은 대절을 사랑하고
명문 자제들은 명분과 절도와 의리를 숭상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
것이므로, 그들이야 마땅히 그러하려니와 공같은 해도의 외롭고 늙은
한 무인이 비록 갑옷을 벗어버리고 초림 중에 잠복하여 생명을 보전하였다 할지라도 누가 다시 그 잘못을 책하리요. 그런데 곧 의연히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을 그 뜻이 성패를 따진 것도
아니요, 어찌 구구한 후세의 이름의 가치를 얻기 위함이었겠는가?
진실로 충심이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고, 용기는
용렬한 주장의 충격에서 격동된 것이라. 다만 죽음이 헛되지 않고 나의 직분을 다한 것일 뿐이니 나머지 사람은 족히 말할 바 아니로다.
충렬사에 합사된 여러 군자들을 보니 또한 늠름하여 더욱 존경하게 되는도다.
공이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 사후군 한사람이 도망가지 않고, 공을 따라
공의 죽음을 지켜 보다가 시체를 묻은 곳을 알아 두었더니,
급기야 난리가 평정되고 시체 등을 다시 선영으로 이장할새,
그 사후군의 말에 쫓아 공의 시신을 찾아 장령리 사왕동에 귀장하니라.
강(姜)천총이 공의 뒤를 따라 죽고 구(具)공은 주장을 꾸짓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리고 사후군의 성명은 잃어 모른다 한다.
강화 유수 겸 진무사 이복원(李福源)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