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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재황종길묘갈략(優遊齋黃鍾吉墓碣略)
우유재 황종길 묘갈략
공의 휘는 종길(鍾吉)이오, 자는 율초(律初)인데, 계출이 평해라.
평해의 황(黃)은 고려 금오장군 휘 온인(溫仁)을 중조로 하여,
그 아래 연7세를 고관대작으로 국초에 이르러 병조판서 휘 상(象) 이후
비록 대현은 아니나, 역시 관면은 끊임없이 5, 6세를 지나 그 후미는 왈 정(珽), 왈 진명(震明), 왈 철(澈), 왈 상정(尚正)은 공의 고조 증조 또는 조고 및 부이니라. 선비는 삼척 김(金)씨인데 학생 진택(震澤)의 여라.
공이 영조(英祖) 기유(己酉)(1729) 12월 16일에 생하여,
정조(正祖) 경신(庚申) 7월 14일에 졸하니, 수가 72러라.
남양(南陽) 홍익서(洪益瑞)의 여로 취배나, 공보다 16년 전 졸하였으나,
이제 이를 합장하노니 강릉 학산의 신좌(辛坐) 지원이오. 하오나 무남에
유 4녀이온데 모두 선비의 아내니라. 장녀는 홍인성(洪仁性)을 맞이하였고,
차녀는 최응한(崔應漢)을, 3녀는 김영한(金永漢)을, 4녀는 송득심(宋得心)을
맞았노라.
공이 졸하기
전 五년에 내가 삼척부 수로 나가니 삼척은 동해의 옛 실직군으로 서울이 七百리로 해안 변개지하야 더불어 이 북과는
풍속과 기절이 아울지 아니하고 세속의 본질이 서로 부딪쳐 문학이 흥성치 않음이라 내 삼척의 임기를 다할 즈음에 아
전에게 물은바 삼척은 본시 거친곳이라 이 어찌 숨은 문학지사가 있으오리가만은 없지는 않치요 오직 죽서루 아래에 한
黃씨 노인이 있으되 경학으로써 그 이름이 대관령동의 노유 모두들 이르기를 어진 선비라 하거늘 나는 듣자하니 매우
기뻐하야 즉후 찾아가 뵈오니 과연 듣든바와 같이 자중하고 경명학이 깊숙하야 실로 군자의 품격일너라 마침 이때 한
높은 손이 와 이르되 黃노사라 이름이니 이미 널이 알려진 바오나 내 듣지 못함이라 그의 학문이 모든 글중에 가장 이
해롭고 쉬움은 중용에 있는바를 도해로써 저록하여 중생의 이해에 쉽도록 하기 위함이라 깍고 추려서 묘리있게 궁구함
이나 그러나 그 글이 세상에 숨어 아는 이가 없으니 애석하도다 풍호지간에 삼하가 나지 않으며 모든 선비는 숲속에서
노닐지 않을진데 서로히 다듬은즉 마땅히 숭고일지라 공이 본시 강릉에 살아 빈궁으로 자립 생존이 매우 어려워 부운갈
이 떠돌다가 삼척 고을에 부처살매 마을의 동자들에게 가르침을 줌으로써 생계를 유지함이나 그러나 그의 궁핍함은 여
전함이라 객향에 머문지도 어언 三十여년에 처음 얻음은 아들 眚簡이라 아들하야 가로되 내 이제 아들이 있음이니 내
이제 늙었거늘 내고향으로 돌아가 죽음이 옳은지라 하고 소장했던 살림의 기물이며 재산을 챙기어 강릉으로 돌아가 가
옥을 마련 살림을 베풀더이다. 나 역시 그해에 파관하고 돌아왔더니 그후 십년인데 한자료를 품은 이 보기를 청하거늘
누구이고 물으니 그의 답에 가로되 나는 黃貴簡이로소이다.부친이 이세상을 떠난지 이미 入년이오 또한 임종에 유언이
로되 兪공이 문장이 유여하니 내 저술인바나 기록에 중용도를 보고 들은바러니 兪공이 이미 허하야서를 하였으니 나의
묘에 묘갈기인데 사양치 않으리니 내 죽거든 너는 그이에게 청언하라 하였나이다 하며 眚簡이 굳이 불망하고 삼가 취하
기를 청하야 옴이 간청이어늘 내 그 헤여진 도획을 상고 기록을 살핌에 눈물이 절로 흘러 떨어지노라 이는 뽑簡의 아름
다운 성효며 능숙한 노 부친의 저술에 감동하야 이어 서를 하야 전언을 밟음으로서 기술함을 장차 그 말을 빌려서 오래
도록 미려함을 무궁합이니 내 어찌 그러한 사람이 될수 있으리오 어찌 가신분의 뜻을 읽으리오 이어 명을 하노니 銘왈
내 삼척 고을에 있을때에 그의 시문으로써 공을 더하였더니 그 시에 왈 구불 구불한 해변은 하늘이 내린 거친곳이나 높
은 노사를 얻음이라 검은 말은 깊이깊이 묻어두고 순소한 그위는 흘러 떠남에 있나니 주자의 궁한 욕심의 뜻이요 복희
의 보는 친한 몸이니라 평생을 보아도 이치가 기묘하니 문사가 절절히 깨달음을 줌이라 공의 지식에 욕심이 있음은 공
의 시서와 문장이 존재함이러라
선공감부정 기계 兪漢雋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