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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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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재황종길묘갈략(優遊齋黃鍾吉墓碣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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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優遊齋黃鍾吉墓碣略
公諱鍾吉字律初系出平海平海之黃以高麗金吾將軍溫仁爲鼻祖而自其下連 七代高官大爵至國初兵曹判書象以後雖不大顯亦不絕冠冕者五六世而其後 微日珽日震明曰澈曰尚正公高曾祖禰也她三陟金氏學生震澤女公 英廟己 西十二月十六日生 正廟庚申七月十四日卒壽七十二娶南陽洪益瑞女歿于 先公十六年至是合葬于江陵鶴山辛坐之原無子有女四人俱士妻長適洪仁性 次崔應漢次金永漢次宋得心公歿之五年余出守三陟陟東海上古悉直郡去王 京七百里魚鱉鱗介之與處風氣不井以北俗撲質文學不興余上任訖進掾吏問 陟荒矣是豈有隱居治文學者乎曰無有惟竹西樓下黃老人以經學名嶺以東咸 稱老人爲賢士余喜甚即往見與之語果名行自持經明學邃君子人矣於是延爲 上客稱黃老師多聞所未聞其學諸經中最深於易中庸所著圖與錄窮剔旨歸刻 抽妙奧然其書隱世無知者惜乎不生於三河豊鎬之間翱翔乎諸儒彦之林相與 磨礱則當益高矣公本居江陵窮不能自存浮寄陟中教授村童以爲食然其窮經 自如也客遊三十年始得族人子皆簡爲子曰吾有子矣吾可歸死故鄉矣持衆所 助錢物器用買屋還江陵而余亦其年罷官歸其後十年有懷剌請謁者問爲誰曰 我黃告簡也父死已八年矣且死有遺言兪公有文章吾所著聞見錄中庸圖公既 許爲序矣誌吾墓公必不辭我死汝其往請焉皆簡不敢忘謹取以來敢請余按圖 披錄泫然淚下且嘉皆簡能述父志乃爲序以踐前言若誌者將以借其言壽其人 行美於無窮也余豈其人哉逝者之意也乃爲銘 銘曰余在陟州時以詩贈公其 詩曰海曲天荒處高人得老師玄言入深奧素位在流離意欲窮朱子身親見伏 羲平生觀妙理悟處亦文詞有欲知公公在此詩
  繕工監副正杞溪兪漢雋撰


 우유재 황종길 묘갈략
 공의 휘는 종길(鍾吉)이오, 자는 율초(律初)인데, 계출이 평해라. 평해의 황(黃)은 고려 금오장군 휘 온인(溫仁)을 중조로 하여, 그 아래 연7세를 고관대작으로 국초에 이르러 병조판서 휘 상(象) 이후 비록 대현은 아니나, 역시 관면은 끊임없이 5, 6세를 지나 그 후미는 왈 정(珽), 왈 진명(震明), 왈 철(澈), 왈 상정(尚正)은 공의 고조 증조 또는 조고 및 부이니라. 선비는 삼척 김(金)씨인데 학생 진택(震澤)의 여라.
 공이 영조(英祖) 기유(己酉)(1729) 12월 16일에 생하여, 정조(正祖) 경신(庚申) 7월 14일에 졸하니, 수가 72러라.
 남양(南陽) 홍익서(洪益瑞)의 여로 취배나, 공보다 16년 전 졸하였으나, 이제 이를 합장하노니 강릉 학산의 신좌(辛坐) 지원이오. 하오나 무남에 유 4녀이온데 모두 선비의 아내니라. 장녀는 홍인성(洪仁性)을 맞이하였고, 차녀는 최응한(崔應漢)을, 3녀는 김영한(金永漢)을, 4녀는 송득심(宋得心)을 맞았노라.
 공이 졸하기 전 五년에 내가 삼척부 수로 나가니 삼척은 동해의 옛 실직군으로 서울이 七百리로 해안 변개지하야 더불어 이 북과는 풍속과 기절이 아울지 아니하고 세속의 본질이 서로 부딪쳐 문학이 흥성치 않음이라 내 삼척의 임기를 다할 즈음에 아 전에게 물은바 삼척은 본시 거친곳이라 이 어찌 숨은 문학지사가 있으오리가만은 없지는 않치요 오직 죽서루 아래에 한 黃씨 노인이 있으되 경학으로써 그 이름이 대관령동의 노유 모두들 이르기를 어진 선비라 하거늘 나는 듣자하니 매우 기뻐하야 즉후 찾아가 뵈오니 과연 듣든바와 같이 자중하고 경명학이 깊숙하야 실로 군자의 품격일너라 마침 이때 한 높은 손이 와 이르되 黃노사라 이름이니 이미 널이 알려진 바오나 내 듣지 못함이라 그의 학문이 모든 글중에 가장 이 해롭고 쉬움은 중용에 있는바를 도해로써 저록하여 중생의 이해에 쉽도록 하기 위함이라 깍고 추려서 묘리있게 궁구함 이나 그러나 그 글이 세상에 숨어 아는 이가 없으니 애석하도다 풍호지간에 삼하가 나지 않으며 모든 선비는 숲속에서 노닐지 않을진데 서로히 다듬은즉 마땅히 숭고일지라 공이 본시 강릉에 살아 빈궁으로 자립 생존이 매우 어려워 부운갈 이 떠돌다가 삼척 고을에 부처살매 마을의 동자들에게 가르침을 줌으로써 생계를 유지함이나 그러나 그의 궁핍함은 여 전함이라 객향에 머문지도 어언 三十여년에 처음 얻음은 아들 眚簡이라 아들하야 가로되 내 이제 아들이 있음이니 내 이제 늙었거늘 내고향으로 돌아가 죽음이 옳은지라 하고 소장했던 살림의 기물이며 재산을 챙기어 강릉으로 돌아가 가 옥을 마련 살림을 베풀더이다. 나 역시 그해에 파관하고 돌아왔더니 그후 십년인데 한자료를 품은 이 보기를 청하거늘 누구이고 물으니 그의 답에 가로되 나는 黃貴簡이로소이다.부친이 이세상을 떠난지 이미 入년이오 또한 임종에 유언이 로되 兪공이 문장이 유여하니 내 저술인바나 기록에 중용도를 보고 들은바러니 兪공이 이미 허하야서를 하였으니 나의 묘에 묘갈기인데 사양치 않으리니 내 죽거든 너는 그이에게 청언하라 하였나이다 하며 眚簡이 굳이 불망하고 삼가 취하 기를 청하야 옴이 간청이어늘 내 그 헤여진 도획을 상고 기록을 살핌에 눈물이 절로 흘러 떨어지노라 이는 뽑簡의 아름 다운 성효며 능숙한 노 부친의 저술에 감동하야 이어 서를 하야 전언을 밟음으로서 기술함을 장차 그 말을 빌려서 오래 도록 미려함을 무궁합이니 내 어찌 그러한 사람이 될수 있으리오 어찌 가신분의 뜻을 읽으리오 이어 명을 하노니 銘왈 내 삼척 고을에 있을때에 그의 시문으로써 공을 더하였더니 그 시에 왈 구불 구불한 해변은 하늘이 내린 거친곳이나 높 은 노사를 얻음이라 검은 말은 깊이깊이 묻어두고 순소한 그위는 흘러 떠남에 있나니 주자의 궁한 욕심의 뜻이요 복희 의 보는 친한 몸이니라 평생을 보아도 이치가 기묘하니 문사가 절절히 깨달음을 줌이라 공의 지식에 욕심이 있음은 공 의 시서와 문장이 존재함이러라
선공감부정 기계 兪漢雋 찬

c-112.174601051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4/30 19:55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