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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공유사((襄武公遺事)

襄武公遺事
公諱希碩即開國功臣 贈右議政諡襄武勳封平海君也黃之著於東國始自學 士公諱洛中世侍中諱裕中生三子長曰璡太子檢校次曰瑞評理諡忠節次曰墉 大匡諡忠敬寔為三派始分之祖忠敬公生諱太白刑曹典書典書公生諱祐兵曹 典書入國朝贈左議政議政公生諱天祿版圖判書亦贈領議政即公之考祖 曾也公生而天姿卓異才兼文武常讀周易論語平居恂恂然有儒子氣像而膂力 絕倫能使六尺雙劔赳赳焉有干城之略 太祖龍潛北藩公以草昧舊契際遇益 深甞遊安邊釋王寺寺僧欲轉餅砧大石而力不能動公一手搬入眾皆驚服 太 祖聞而彈指曰余得人矣恭讓乙丑倭敵百餘艘寇咸州等郡所在殺掠公與戰于 洪原大門嶺一舉大捷民賴以安時麗主與崔瑩欲事元而攻遼東以太祖為右 軍都統進屯威化霖雨連日軍心將變公時殿後軍因以順逆建議回軍一陣纔渡 全島覆沒人皆稱神曰萬軍得生黃公之力也太祖威德日盛中外推戴而忌圃 隱諸公議欲除之公力言不可竹橋之役終不預焉卒與群英協賛大業 太祖亟 稱曰寡躬之得有今日皆卿定策之功也仍賜功臣錄券帶礪有誓宥及子孫壬 申七月會盟則公在疚不與未及闋服而卒上親臨甚悼恩例賞賜特異於諸功臣 而官它其喪葬于開城府玉蓮坊負坎原 太宗為公長子以信淑翁主釐降焉 宣廟朝敎曰黃希碩許多子孫百世勿侵事役李相元翼啟曰黃希碩嫡孫則百世

勿侵庶孫則雖落講不侵軍役量宜收布如何允曰依前施行云云歷朝崇典此 其大略也配慎惠宅主三陟朴氏副正源祐女繼貞敬夫人延安李氏刑曹典書琪 亨之女生四男長象駙馬因再娶罷尉後官至兵曹判書次麟禮曹判書次鸞兵曹 正郎次鵠東萊府使子孫蕃衍其麗不億盖公之積蔭而然也嗚呼公之勳業載在 盟府漢則蕭曹唐則房杜太常議謚天官錄後其所以崇獎功臣不惟朝家之汗青 當時名公巨卿想必有撰述行錄而累經兵燹家獻無徵曷勝痛恨窃恐世代浸遠 後之視今反不如今之視昔故略採傳記俾為他日之考證焉
宗裔孫昞謹撰

양무공유사(『』=追記)
공의 휘는 希碩이니 개국공신인데 봉 平海君하고 증 右議政하며 시호를 襄武라하다。黃氏가 동국에 나타남은 學士공 휘 洛으로부터인데 중세에와서 시중 휘 裕中이라 하는 분이 아들삼형제를 두셔 장에는 휘 璡이니 태자검교요 다음은 휘 瑞이니 평리로 시호가 忠節이오 그다음은 휘 墉이니 삼중대광으로 시호를 忠敬이라 이 세분이 삼파로 나뉘인 조상님들 인데 충경공이 휘 太白을 낳으시니 형조전서로 본조에서 증 우의정하고 전서공이 휘 祐을 낳으시니 병조전서로 역시 증 좌의정하고 의정공이 휘 天祿을 낳으시니 판도판서로 역시 증 영의정이요 이어른들은 즉 공의 고조 증조 조 및 고위시 라 본조에 들어와 공이 추충협찬하야 개국원훈에 책록이니 그위삼대를 모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추증되셨다.공 이 생하심에 몸이크고 울음소리가 웅장하여 보고듣는 이들이 범상치 않다더니 자라에 기골이 장대하고 미목이 수려하며 안광이 불빛같고 인물이 준수한데 또 재주가 뛰어나 한가지를 가르치면 열가지를 해득하니 불과십여에 四서를 통달하고 삼경을 외우니 그 앉은자세와 걷는태도가 의젓하고 무게있어 뭇사람들이 공을 만나면 부지불각에 머리가 숙여짐을 깨닫 지 못하였다하더라 그리고 장대한 기골에 여력이 뛰어나 백근철퇴를 휘두르며 말을타고 활을쏘며 칼을쓰는 무예를 숭상 하니 六尺쌍검을 번개같이 휘두루고 활솜씨는 백발백중 선궁특기를 갖어 문자그대로 문무겸전한 어른으로 그용맹과 지 혜가 나라를 위하여 방패가되고 성벽이됨이 충분하다고들 칭하였다하더라 일찌기 李太祖와는 학문도 함께하고 병서도 토론하며 시국과 국정도 서로 근심걱정하든 뜻맞는 친구간이였더니 하루는 두 어른이 안변석왕사를 유람할새 절에 중들 이 떡치는 큰 돌판을 옮기려하오나 움직이지 않는지라 이것을 보신 공께서 벌떡 일어나 번쩍들어 원하는 제자리에 놓아 주니 중들이 놀라 어안이 벙벙 말을 못하고 太祖께서는 그 광경을 보고 黃공은 진실로 큰 장사라 내 이제야 사람을 얻 었노라 하며 더욱 가까이하기를 좋아하였다한다.『공이 북청주상만호시 북방의 여진족들이 승승장구하야 국경을 침범

많은 무리들이 백성을 괴롭히며 약탈하드니 우왕九년(一三八三)癸亥八月에는 여진족 괴수 胡拔都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들어와 양민을 약탈하니 단주 상만호 陸麗와 규합하여 단주의 용산 동해선등지에서 괴수 胡拔都와 격전을 계속하더니 도지휘사李成桂와 협력 대파하고』우왕十一年(一三八五)乙丑『四月에는 왜구 一百五十여척의 배로 육해군을 무수히 실고 들어와 함부로 살략함에 동북면 상원수 沈德符며 부원수洪徵이며 대호군 鄭承可등과 협력하여 홀면 평야등 지에서 일대격전으로 격파하였으나 또다시 그해』九月에는 역시 왜구가 百여척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니 『신임동북면 도원수 李成桂군 佟豆蘭이하 百여명과 공의 군사 五百여명이 규합』홍원군 대문령에서 왜구들과 싸워 격멸하니 적의 시 체가 계곡에 첩첩뿐아니라 피가 흘러 강물을 더하였다하며 百여척의 대적이 겨우 十여首만이 근근히 살아 천불산으로 도주하였다 하더 이외에도 빈번한 왜구침략에 전전승첩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안돈시켰고 나라의 안도에 방패가 되였 다한다 그후 王이 明나라를 치고 元나라를 섬기고자하야 우왕十四년(一三八八)戊辰五月에는 요동을 치고자 李成桂로 하 여금 요동출정 우군 도통사를삼고 대군을 인솔하야 압록강의 위화도에 진둔하였든바니 때마침 여름 장마비가 연일계속 개일줄을 모르며 군량은 뒤를따르지 못함으로 군사들의 마음이 많이 동요되고 있었다.이때 공은 후군을 거느리고 있다 가 천기를 보니 비는 좀처럼 개일것 같지않고 지리적으로 위화도는 수중에 잠길 우려가 있는곳이라 진지를 육지로 옮 길것을 건의하고 곧 대군을 이동시켜 강을건너 진을 옮기자 그날밤 더욱 큰비가 내려 위화도는 완전 폭몰되니 이에 모 든 군사들이 공의 신기묘산을 칭찬하며 공의 건의가 없었던들 수만의 대군이 수중고혼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라 하며 우 리들이 살게됨은 오직 黃공의 힘이라 하였다 한다.『또 공은 모든 참모와 도통수 李成桂와 함께 진구할것을 의논할때 공이 말하기를 우왕은 유약하고 국정에 어두우며 또 수시중崔瑩은 늙어도 기혼이 좋으나 인심과 근심을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또 군사에 뒷바침할 국력은 헤아리지 않고 다만 元나라와 고려 왕조간에 맺어진 대의를 저버리지 못하야 대원나 라 자체도 국운이 쇠하여 신흥 明太祖의 세력에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우리 高麗에게 원군을 청하는 처지인데 작은 우리나라 입장으로 원나라도 당치못하는 明太祖세력을 맞아서 막는것도 이이요 하물며 멀리 대군을 거느리고 나아 가서 그를 처 항복 받는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회군함이 옳다고 주장하였다.이에 모든 참 모들이 이구동성으로 黃공의 의견이 국가를 바로잡는 올바른 생각이라 하여 모두 회군을 찬성하였다.이에 李成桂는 왕 명은 진군이요 軍心은 회군이니 진군하자니 많은군사를 죽이게되고 싸움은 패할것이 명약관화하며 또 회군이면 왕명 거 역으로 역모에 몰일것이 십상팔구인지라 침식을 잃고 심사숙고 거듭 참모회의를 열었으나 회군 이외에 진군을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고로 부득이 굳은 각오로 회군을 명령하였다.이에 군사들은 李成桂의 위덕을 크게 흠모하여 만약에 조정에서 무리하게 李成桂를 회군의 역모로 역이용하여 제거하려 할때는 힘을 합하여 항거키로 모두 각자의 속마음을 정하고 있었다.조정에서는 전부터 李成桂의 세력이 너무 비대하여 짐을 보고 그 반대자들이 은연중 이를 제거하여 국 가의 위태로움을 면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던 수시중 崔瑩과 鄭夢周일파가 좋은 기회라 하였다하여 곧 회군을 멈추게하고 李成桂를 도통수에서 파직하려하였다.이 기미를 안 이성계의 세째아들 芳遠이 분개하여 장사들을 뽑아 崔瑩과 鄭圃隱 등을 제거하는 묘책을 세우고 부친에게 문의하니 부친이 꾸짖고 말리며 黃希碩공은 항상 옳고 좋은 일을 잘 정책하는 분이니 의견을 들어보아라 하였다.芳遠은 곧 공에게 그뜻을 고하니 鄭圃隱같은 분은 民望이 높고 학자인데 그와같은

c-121.1745408143.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4/23 20:35 저자 121.166.63.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