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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공유사((襄武公遺事)

<WRAP 33em just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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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襄武公遺事
公諱希碩即開國功臣 贈右議政諡襄武勳封平海君也黃之著於東國始自學 士公諱洛中世侍中諱裕中生三子長曰璡太子檢校次曰瑞評理諡忠節次曰墉 大匡諡忠敬寔爲三派始分之祖忠敬公生諱太白刑曹典書典書公生諱祐兵曹 典書入國朝贈左議政議政公生諱天祿版圖判書亦贈領議政即公之考祖 曾也公生而天姿卓異才兼文武常讀周易論語平居恂恂然有儒子氣像而膂力 絕倫能使六尺雙劔赳赳焉有干城之略 太祖龍潛北藩公以草昧舊契際遇益 深甞遊安邊釋王寺寺僧欲轉餅砧大石而力不能動公一手搬入眾皆驚服 太 祖聞而彈指曰余得人矣恭讓乙丑倭敵百餘艘寇咸州等郡所在殺掠公與戰于 洪原大門嶺一舉大捷民賴以安時麗主與崔瑩欲事元而攻遼東以太祖爲右 軍都統進屯威化霖雨連日軍心將變公時殿後軍因以順逆建議回軍一陣纔渡 全島覆沒人皆稱神曰萬軍得生黃公之力也太祖威德日盛中外推戴而忌圃 隱諸公議欲除之公力言不可竹橋之役終不預焉卒與群英協賛大業 太祖亟 稱曰寡躬之得有今日皆卿定策之功也仍賜功臣錄券帶礪有誓宥及子孫壬 申七月會盟則公在疚不與未及闋服而卒上親臨甚悼恩例賞賜特異於諸功臣 而官它其喪葬于開城府玉蓮坊負坎原 太宗爲公長子以信淑翁主釐降焉 宣廟朝敎曰黃希碩許多子孫百世勿侵事役李相元翼啟曰黃希碩嫡孫則百世 勿侵庶孫則雖落講不侵軍役量宜收布如何允曰依前施行云云歷朝崇典此 其大略也配慎惠宅主三陟朴氏副正源祐女繼貞敬夫人延安李氏刑曹典書琪 亨之女生四男長象駙馬因再娶罷尉後官至兵曹判書次麟禮曹判書次鸞兵曹 正郎次鵠東萊府使子孫蕃衍其麗不億盖公之積蔭而然也嗚呼公之勳業載在 盟府漢則蕭曹唐則房杜太常議謚天官錄後其所以崇獎功臣不惟朝家之汗青 當時名公巨卿想必有撰述行錄而累經兵燹家獻無徵曷勝痛恨窃恐世代浸遠 後之視今反不如今之視昔故略採傳記俾爲他日之考證焉
宗裔孫昞謹撰


<typo fs:0.8em>  양무공유사(『』=추기(追記))
 공의 휘는 희석(希碩)이니 개국공신인데 봉 평해군(平海君)하고 증 우의정(右議政)하며 시호를 양무(襄武)라하다. 황씨(黃氏)가 동국에 나타남은 학사(學士)공 휘 낙(洛)으로 부터인데 중세에 와서 시중 휘 유중(裕中)이라 하는 분이 아들 삼형제를 두셔, 장에는 휘 진(璡)이니 태자검교요, 다음은 휘 서(瑞)이니 평리로 시호가 충절(忠節)이오, 그 다음은 휘 용(<fc:red>墉</fc)이니 삼중대광으로 시호를 충경(忠敬)이라, 이 3분이 3파로 나뉘인 조상님들인데, 충경공이 휘 태백(太白)을 낳으시니 형조전서로 본조에서 증 우의정하고, 전서공이 휘 우(祐)을 낳으시니 병조전서로 역시 증 좌의정하고, 의정공이 휘 천록(天祿)을 낳으시니 판도판서로 역시 증 영의정이요, 이 어른들은 즉 공의 고조 증조 조 및 고위시라. 본조에 들어와 공이 추충협찬하여 개국원훈에 책록이니, 그 위 3대를 모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추증되셨다.
 공이 생하심에 몸이 크고 울음소리가 웅장하여 보고 듣는 이들이 범상치 않다더니, 자람에 기골이 장대하고 미목이 수려하며 안광이 불빛같고 인물이 준수한데, 또 재주가 뛰어나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해득하니, 불과 십여에 4서를 통달하고 3경을 외우니, 그 앉은 자세와 걷는 태도가 의젓하고 무게 있어 뭇 사람들이 공을 만나면 부지불각에 머리가 숙여짐을 깨닫지 못하였다하더라. 그리고 장대한 기골에 여력이 뛰어나 백근철퇴를 휘두르며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칼을 쓰는 무예를 숭상하니, 6척 쌍검을 번개같이 휘두루고, 활솜씨는 백발백중 선궁 특기를 가져, 문자 그대로 문무겸전한 어른으로 그 용맹과 지혜가 나라를 위하여 방패가 되고 성벽이 됨이 충분하다고들 칭하였다하더라.
 일찌기 이태조(李太祖)와는 학문도 함께하고 병서도 토론하며 시국과 국정도 서로 근심걱정하던 뜻 맞는 친구간이였더니, 하루는 두 어른이 안변 석왕사를 유람할새 절에 중들이 떡치는 큰 돌판을 옮기려 하오나, 움직이지 않는지라 이것을 보신 공께서 벌떡 일어나 번쩍들어 원하는 제자리에 놓아주니 중들이 놀라 어안이 벙벙, 말을 못하고 태조(太祖)께서는 그 광경을 보고 황(黃)공은 진실로 큰 장사라 내 이제야 사람을 얻었노라 하며 더욱 가까이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공이 북청주 상만호시 북방의 여진족들이 승승장구하여 국경을 침범, 많은 무리들이 백성을 괴롭히며 약탈하더니, 우왕 9년(1383) 계해(癸亥) 8월에는 여진족 괴수 호발도(胡拔都)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들어와 양민을 약탈하니, 단주 상만호 육려(陸麗)와 규합하여 단주의 용산 동해선 등지에서 괴수 호발도(胡拔都)와 격전을 계속하더니 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와 협력 대파하고』
 우왕 11년(1385) 을축(乙丑) 『4월에는 왜구 150여척의 배로 육해군을 무수히 싣고 들어와 함부로 살략 함에 동북면 상원수 심덕부(沈德符)며 부원수 홍징(洪徵)이며 대호군 정승하(鄭承可) 등과 협력하여 홀면 평야 등지에서 일대격전으로 격파하였으나 또다시 그해』
 9월에는 역시 왜구가 100여척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니 『신임 동북면 도원수 이성계(李成桂) 군 퉁두란(佟豆蘭) 이하 100여명과 공의 군사 500여명이 규합』 홍원군 대문령에서 왜구들과 싸워 격멸하니 적의 시체가 계곡에 첩첩뿐 아니라 피가 흘러 강물을 더하였다하며 100여척의 대적이 겨우 10여 수(首)만이 근근히 살아 천불산으로 도주하였다 하더라.
 이외에도 빈번한 왜구침략에 전전 승첩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안돈시켰고, 나라의 안도에 방패가 되었다 한다. 그 후 왕(王)이 명(明)나라를 치고 원(元)나라를 섬기고자 하여 우왕 14년(1388) 무진(戊辰) 5월에는 요동을 치고자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요동출정 우군 도통사를삼고 대군을 인솔하야 압록강의 위화도에 진둔하였든바니 때마침 여름 장마비가 연일계속 개일줄을 모르며 군량은 뒤를따르지 못함으로 군사들의 마음이 많이 동요되고 있었다.이때 공은 후군을 거느리고 있다 가 천기를 보니 비는 좀처럼 개일것 같지않고 지리적으로 위화도는 수중에 잠길 우려가 있는곳이라 진지를 육지로 옮 길것을 건의하고 곧 대군을 이동시켜 강을건너 진을 옮기자 그날밤 더욱 큰비가 내려 위화도는 완전 폭몰되니 이에 모 든 군사들이 공의 신기묘산을 칭찬하며 공의 건의가 없었던들 수만의 대군이 수중고혼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라 하며 우 리들이 살게됨은 오직 黃공의 힘이라 하였다 한다.『또 공은 모든 참모와 도통수 李成桂와 함께 진구할것을 의논할때 공이 말하기를 우왕은 유약하고 국정에 어두우며 또 수시중崔瑩은 늙어도 기혼이 좋으나 인심과 근심을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또 군사에 뒷바침할 국력은 헤아리지 않고 다만 元나라와 고려 왕조간에 맺어진 대의를 저버리지 못하야 대원나 라 자체도 국운이 쇠하여 신흥 明太祖의 세력에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우리 高麗에게 원군을 청하는 처지인데 작은 우리나라 입장으로 원나라도 당치못하는 明太祖세력을 맞아서 막는것도 이이요 하물며 멀리 대군을 거느리고 나아 가서 그를 처 항복 받는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회군함이 옳다고 주장하였다.이에 모든 참 모들이 이구동성으로 黃공의 의견이 국가를 바로잡는 올바른 생각이라 하여 모두 회군을 찬성하였다.이에 李成桂는 왕 명은 진군이요 軍心은 회군이니 진군하자니 많은군사를 죽이게되고 싸움은 패할것이 명약관화하며 또 회군이면 왕명 거 역으로 역모에 몰일것이 십상팔구인지라 침식을 잃고 심사숙고 거듭 참모회의를 열었으나 회군 이외에 진군을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고로 부득이 굳은 각오로 회군을 명령하였다.이에 군사들은 李成桂의 위덕을 크게 흠모하여 만약에 조정에서 무리하게 李成桂를 회군의 역모로 역이용하여 제거하려 할때는 힘을 합하여 항거키로 모두 각자의 속마음을 정하고 있었다.조정에서는 전부터 李成桂의 세력이 너무 비대하여 짐을 보고 그 반대자들이 은연중 이를 제거하여 국 가의 위태로움을 면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던 수시중 崔瑩과 鄭夢周일파가 좋은 기회라 하였다하여 곧 회군을 멈추게하고 李成桂를 도통수에서 파직하려하였다.이 기미를 안 이성계의 세째아들 芳遠이 분개하여 장사들을 뽑아 崔瑩과 鄭圃隱 등을 제거하는 묘책을 세우고 부친에게 문의하니 부친이 꾸짖고 말리며 黃希碩공은 항상 옳고 좋은 일을 잘 정책하는 분이니 의견을 들어보아라 하였다.芳遠은 곧 공에게 그뜻을 고하니 鄭圃隱같은 분은 民望이 높고 학자인데 그와같은

무모한 짓을 함은 옳치 못하다 하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芳遠은 듣지 않고 결행하고 말았다 한다. 공은 임의 동지 밀직사를 거쳐 도진무로써 정예 五千軍으로 수도 개경을 지키고 있었다. 공양왕四년(一三九二)壬申四月 李成桂 낙마상을 계기로 수시중등이 이씨 배척운동을 전개함에 공은 완벽한 방비로 협찬이였든바 임의로써 李芳遠의 반격으로 四月四日 선죽교 사건이 터짐에 정국은 완전 전복되었다. 공은 다시 一萬정예군으로 李成桂를 호위하니 좌시중 배극염등 민심과 군심이 왕조에서 떠나 李成桂에게로 돌아오니 곧 군심이 추대되어 동년 즉 壬申七月十六日丙申수창궁 정전에 새 왕조 즉 李太祖가 등극 보위를 성취하였었다. 국조실록에는 襄武공이 개국공신에 추봉이라 되어있으나 일각에서는 동년 즉 壬申七月二十八日 제일착 개국공신 봉 十五인중 일인이 시라한다.』고로 공은 상의중추원사 도평의사 가정대부 문하시랑(商議中樞院事都評議使嘉靖大夫門下侍郎)을 거쳐 숭록대부 찬성사(崇祿大夫贊成事)로 추충 협찬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推忠協賛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에 책록과 함께 봉 평해군(平海君)하다.太祖께서 늘 가라사대 寡躬이 오늘날 나라를 얻게됨은 오직 경의 정책과 공이 크다하여 공신록권과 훈장을 내리며 서명 즉 임금이 신하에게 하는 맹서에 자손음직 유급후세(蔭職宥及後世)에게까지 너그럽게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또 그공을 논할진데 정상(不遷之廟位)이의존할지니라 하였다 한다. 이어 帶와 礪를 하사함이었다 한다.나라를 세움에 임금과 모든 신하가 함께 모여 천지신명과 종묘사직에 고하는 역사적인 회맹에 공은 환후가 깊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다 드니 그후 太祖三年甲戌八月戊辰朔 初三日庚午에 생을 마치시니 太祖께서 심히 슬퍼하사 모든 정사를 철조하시고 친히 임하사 조의하고 의안대군에게 하명하사 제전을 행하시고 은혜로서 상을 내리시되 다른 모든 공신들보다 특별히 다르게 하여 조정의 주선으로 그 초상을 마친 다음 개성부 옥연방 부감원 子좌로 장례를 모셨다. 太宗이 공을 위하야 장자 象에게 信淑옹주로써 이강 즉 임금의 딸이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인데 이는 堯임금의 딸이 리(釐)를 필부舜에게 강가케 한고사에서 인용된 말이다.宣祖조에와서 교서에 이르기를 黃希碩의 허다한 자손은 百世토록 사역 즉 구역 이역 천역에 침범하지 말것이라 하였으며 李정승 元翼의 장계에 이르기를 黃希碩의 적손인즉 百世토록 물침하고 서손인즉 비록낙강이라 할지라도 구역에 침범치 아니하며 널리 인재를 등용함이 어떠하겠나이가 한즉 윤허하시기를 지난날에 의거하야 시행하라 하셨으니 역대조정의 승봉지전의 대략을 기술하노라 배위는 愼惠宅主 삼척朴氏니 부정源祐의 女요 예배는 정경부인 연안李氏니 형조전서 琪亨의女라 四남을 두셨으니 장남은 象이니 부마로서 재취니 罷尉되어 선원보에 실려있지않으며 뒤에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고 다음은 麟이니 예조판서에 이르고 그다음은 鸞이니 병조정랑에 이르고 또 그다음은 鵠이니 동래부사에 이르렀으며 자손이 번창하여 그 빛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것은 공이 덕을 쌓은 연고이라 하겠다.오호리 공의 훈업과 사적이 맹부 즉 충훈부에 기재되어있고 그 사실인즉 옛 한나라의 명신 蕭何나 曹參이오 당나라의 房玄齡과 杜如晦에 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하겠다. 조정에서 이름으로 예조에서 결의하여 시호를 襄武로 정하고 이조에서 기록된 사실인만큼 조정에서 이러한 공신들의 행록을 찬술한것이 반드시 있었을것으로 생각되나 여러차례의 병화로 집에있는 문헌에 증거가 없으니 어찌 통탄함을 금할수있으리오 가만히 생각한즉 세대가 더 멀어져 뒷날에 오늘을 보는것이 도리어 오늘날에 옛날을 보는이만 같지 못할가 두려워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대략을 기록하여 다음날의 고증을 삼게하노라.
종예손 昞 근찬

c-121.1746152004.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02 11:1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