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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33

우농(愚農) 황공(黃公) 묘갈명(墓碣銘)

우농(愚農) 황공(黃公) 묘갈명(墓碣銘)
 우농(愚農) 황공(黃公)이 별세하신 지 30(三十)여 년이 가까운 동지달 어느날 그 자제 응기(應起)씨가 70(七十)이 넘은 노령으로 내가 사는 영주 유당(由堂) 우사(寓舍)에 찾아와 선대(先代)의 가장(家狀)을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선대인(先大人)께서 가학(家學)을 이어 가난함을 근심치 않고 경학(經學)에 힘썼으나 불행하게도 웅대(雄大)한 뜻을 품고 산림(山林)에 묻혀 살게 되었습니다. 만년에 자제들에게 의(義)로운 방법으로써 가르치고 능히 집안의 규범(規範)을 준수하시다가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불초(不肖)한 제가 나이 70(七十)이 넘어 지난날을 미루어 상고하건대 많은 잘못을 어찌 다 감당하겠습니까. 부군(府君)의 천추(千秋)의 묘역(墓域)이 황폐(荒廢)하고 침울(沈鬱)하여 온갖 풀이 무성한데 어느 사이 늙음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백대(百代) 일가의 의분(誼分)으로 은혜로운 한 말씀을 주시면 넉넉치 못한 가문(家門)에 오랜 세월 바탕이 될 것이며,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영광이 되어 어찌 몸 둘 곳이 있겠습니까.」한다.
 나 또한 늙고 병든 몸이라 어찌 능히 이 일을 하겠는가 마는 하는 수 없이 그 행장(行狀)을 살펴 서술하노니, 공의 휘는 병성(昞星)이요, 자는 극서(極瑞)며, 우농(愚農)으로 자호(自號)하였다. 멀리 고려 초에 관(官)이 금오위장군(金吾衛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이신 휘 온인(溫仁)이 관향(貫鄕)을 받은 상조(上祖)가 된다. 4(四)대를 전하여 휘 용(𤨭)은 관(官)이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이며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다. 공이 휘 태백(太白)을 생하니 증 우의정(右議政)이요, 휘 우(祐)를 생하니 증 좌의정(左議政)이요, 휘 천계(天繼)를 생하니 호는 잠재(潛齋)며,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냈다.
 공이 서울에서 선성현(宣城縣)에 낙향하니, 고을 사림들이 능히 추대하고 예우한 사실이 선성지(宣城誌)에 실려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사이 잠재공(潛齋公)의 묘역과 비갈(碑碣)이 허물어지고 글자가 깎이어 문자의 뜻을 명확히 알기 어려움에 우농공(愚農公)께서 분연(奮然)히 정성들여 돌을 다듬고 천추(千秋)의 묘역(墓域)을 고쳐 세우니 가문의 자랑이었다. 그 해가 경자(庚子)(: 1960(一九六〇)) 3(三)월 어느 날이었다. 이에 공의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성이 백세 후에도 전해지지 않겠는가. 8(八)대를 전하여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다. 경학(經學)에 해박 정통하였고 시부(詩賦)를 잘하였으며, 사리(事理)에 통달하였으니 이에 목현(木峴)의 세장조(世庄祖)이시다.
 여러 대를 전하여 휘 구석(九錫)의 호는 학남(鶴南)이요, 가선(嘉善)이다. 공께서 이금실[인금(仁今)]에서 목리파(木里派) 목소공(鶩巢公)의 후사(後嗣)로 들어감으로부터 크게 문호(門戶)를 개척하여 모두가 큰 은혜를 입었다.
 고조의 휘는 태진(泰鎭)이며 호는 낙서(洛西)이다. 증조의 휘는 오원(五源)이며 호는 운파(雲坡)인데 통정(通政)에 추증되었다. 조의 휘는 종철(宗哲)이요 호는 서산재(西山齋)며 참봉이다. 고의 휘는 영구(英九)요 호는 야은(野隱)이며, 비는 유인(孺人) 아주신씨(鵝州申氏)와 유인 밀양박씨(密陽朴氏)다. 생고(生考)의 휘는 찬구(燦九)요 호는 겸재(謙齋)며 종사랑(從仕郞) 임(任) 문충의(分忠義)이다. 비는 단인 경주최씨(慶州崔氏) 용준(龍俊)의 따님으로 고종 경인(庚寅)(: 1890(一八九〇)) 10(十)월 9(九)일에 공을 풍산(豊山) 목현(未峴) 옛집에서 낳으셨다.
 공은 태어나심에 특이한 자질이 있었고 지혜가 능히 일찍이 뛰어나 7(七)세 때에 조부 서산재(西山齋)공에게 몽해(蒙解)를 수업 받음에 능히 글자와 어휘를 알아 교육의 독촉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일찍이 선생과 어른의 문하에서 배움을 청하여 고인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듣고 감발(感發)한 바가 있었으며 어버이 명으로 계부(季父) 야은공(野隱公)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또 일은 사실을 따랐으며 학문(學文)은 집안의 업이 되었고 효우(孝友)는 집안의 다스림이 되었다.
 어버이가 계심에 뜻을 지극히 하여 몸소 봉양(奉養)을 다하였고 어버이가 돌아가심에 생양(生養)의 예절을 맞추어 슬픔의 형용을 다하였다. 진실로 평일에 바탕되어 길러진 사실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니 종당(宗黨)이 함께 추대하였고 남들도 믿고 복종하였다. 무신(戊申)(: 1968(一九六八))년 10(十)월 5(五)일에 세상을 뜨시니 수(壽)는 79(七十九)였다. 묘는 죽전산(竹田山) 갑좌(甲坐)의 둔덕이다. 배는 예천임씨(醴川林氏) 점혁(占赫)의 따님으로 공보다 먼저 병신(丙申)(: 1956(一九五六))에 졸하니 묘는 죽전(竹田) 쌍건달(雙乾達) 좌좌(子坐)이다.
 2(二)남 4(四)녀를 두었으니 남은 세기(世起)·응기(應起)요, 여는 청송 심재운(沈載雲)·안동 권윤환(權閏煥)·상락 김재윤(金在允)·순흥 안희규(安熙圭)이다. 손은 현수(鉉洙)·상수(相洙)·득수(得洙)·율수(律洙)·대수(大洙)·길수(吉洙)·종수(宗洙)는 장방(長房)으로 출계했고, 시영(時永)은 계방(季房)으로 출계했다. 증손 상철(相喆)은 현수(鉉洙)가 생하였고, 상인(相仁)·상봉(相奉)·상석(相奭)은 시영(時永)이 생하였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하여 이르니,

근원이 깊은 물은 맑으며, 뿌리가 무성한 나무는 잎도 무성하나니,
이러므로 군자(君子)는 그 넉넉한 후손을 기뻐하느니라.
아름답도다 부자(父子)의 도(道)여, 덕음(德陰)으로 서로 가려주니,
하늘이 어찌 보답이 없으리, 앉아 기다려 계기(契機)를 잡을 지니라.
죽전(竹田)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곳, 봉분(封墳)이 있는 이곳 정결하고 깊은 곳에,
옥돌에 비문을 새기노니, 천년토록 밝게 보일 지니라.

  갑술(甲戌)(: 1994(一九九四)) 11(十一)월 하순에
  종하(宗下) 황세섭(黃世燮) 삼가 찬하노라.

c32-033.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20:2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