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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포공황도상행장략(澹圃公黃道尚行狀略)
담포공 황도상 행장략
공의 휘는 道尚이오 자는 望九요 본관은 평해라 신라때에 學士이신 휘 洛께서 중국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처음 平海에
오시어 사셨으니 그 어른이 곧 시조이시다.그후 세월이 흘러 조선조에 이르러 휘 希碩어른이 계셔 太祖창업을 도와 개
국원훈에 녹권을 하사 받았다. 이어 平海君으로 봉하고 시호를 襄武로 내리니 양무공의 시세손에 휘克一은 병자호란의
무공훈작을 받으며 또한 振武原從功臣의 녹권을 받았다.이 어른은 곧 澹圃公의 고조요 증조의 휘는 遇清인데 통정대부
요 조의 휘는 光赫이오 考의 휘는 貴賢이오 妣는 안동權씨 大成의 따님이니라 西紀一六七四年甲寅에 진보면 광덕리에서
출생하셨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좋은 과실을 만나면 반드시 가져와 부모에게 드리고 어른이됨
에 부모의 년기는 높고 가세는 어려워 명리를 버리고 학문을 전념치못하고 농무에 열중하며 부모에게 지체를 받드는데
심혈을 기울려 몸에 좋다는것과 입에맞는 음식을 떨침이 없었고 喪에 이름에는 애절함이 예에 넘침이며 매삭망에는 불
피풍우로 성묘를 극진히 하였으며 처사에 공평하고 이치에 마땅하며 남에게는 신의를 지키고 관대하니 세상으로 부터
환심을 받았다.어느날 漢川의 남쪽 玉流亭 북쪽 澹方浦란곳의 모래언덕에 숲이 우거져있어 그곳을 지나다가 완연한 소
년이 숲속에서 슬피 비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괴상히 여겨 다가가본즉 그 소년은 간대없고 목동들이 큰 나무밑에 모여
큰 자라를 거꾸로 달아놓고 구어 먹으려하는데 자라가 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우는지라 측은한 마음이 생겨 갖고있던
북어 한 떼와 바꾸어 강물에 놓아주었는데 그 자라가 좋아라는 듯이 깊숙히 들어가서는 몇번이고 머리를 돌리어 보고갔는
지라 그런후 그날밤 꿈에 낮에본 손년이 나타나 공에게 고하기를 내가 불행히도 아이들에게 잡히어 죽을것이나 공의 은
덕을 입어 다행히 수중으로 살아 돌아왔으나 그 은혜를 갚을길이 만무하니 저 담방초 황무지가 주인이 없음이니 공의
이름으로 표목을 四변에 세워두면 뒷날에 영험이 있을 것 이라고 여러번 강조하며 사라졌다 한다. 극히 괴이한 의심이
나서 이상히 여겨 말과 같이 표목을 하여 세웠더니 몇일이 되지않아 큰 비가 내려 강물이 넘쳐 모래와 돌덤이 숲을 말
끔히 쓸어버리고 옥토로 변하여 한 농장이 되었다. 그후 친상을 당함에 강동쪽 나산에 장지를 정하고 장례날에 이르러
는 큰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 상여가 건너지 못하여 창황해하며 돌아가려고 할 즈음 강물이 홀연 갈라져 상여는 무사히
건너든바나 조객이 미처 다 건너지 못하고 물이 다시 합쳐졌다 함이며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날 밤 이상한 기운이 묘
소에 걸쳐 서기가 뻗쳐있는 것을 맞은편 각산리 사람들이 모두들 보고 남들이 서기묘라 일컬었다 한다. 공이 만년에 호
를 담포(澹圃)라 하였다. 마침내 공의 장지도 나산의 선영 아래의 辰좌원 하였다. 부인 안동權씨 역시 같다.슬프도다.
공의 일상 행동은 윤리에 밝고 사람을 사귀는데 신의가 있고 만물을 어질게 대하니 가히 군자의 도를 모두 갖추었다.
子夏의 말에 사람이 비록 배우지 못했더도 행실만 잘하면 나는 배웠다고 말하리라 한 것이 공을 두고 이름인 듯하다. 자라가 공의 덕을 갚은일은 거짓말 같으나 그러나 옛 사람중에는 뱀을 구원타가 구슬을 얻고 개미집을 건너 등과를
했다는 것과 같이 자라는 水族中 영리한지라 자주 이런말이 세상에 떠돌고 자라 형제집 말도 있으니 이에 어찌 이집
일만 의심할것인가? 공의 후손 基洪과 주손 相鉉이가 집에 전해오는 유사 한통을 갖고와서 나에게 장문을 책임 지우니
그런 일을 할만한 사람이 못되나 대대로 이어온 정분을 못이겨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감히 우와같이 서술하였노라.
예주 申弘浩 삼가 장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