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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재황영국행장략(特秀齋黃永國行狀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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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特秀齋黃永國行狀畧
公姓黃諱永國字叔佐號家庭所命蕙史丈席所命特秀齋系出平海也黃氏自羅 代上世爲望族於東邦冠冕奕世麗忠壯朝有諱𤨭官崇祿大夫三重大匡輔國諡 忠敬我 朝有諱希碩開國元勳封平海君諡襄武於公十九代祖也十八代祖諱 麟禮曹判書十七代祖諱致祖工曹叅議十六代祖諱吉源繕工監正十五代祖諱 坤禮曹叅議祖諱基彦祖妣善山金氏進士昌洙之女葬夫節死轉達 天階命旌 閭考諱敎鎭通仕郞繕工監假監役妣南陽洪氏寬燮之女 高廟乙丑四月二十 五日酉時生于西上盤松舊第資品端肅志操高潔生之八朔而能跂嶷十朔而能 躑躅周歲而盡解言語三歲而能辨大小之別能知長幼之序誠孝友愛實本乎天 性五六歲學于考聰慧穎悟暫不離側而遂與舍兄又同門之人相遊其在同類之 際相無爾汝之失其在同學之徒又無爭鬪之亂如是有知覺而勤篤工夫考奇之 宗族鄕里稱之自少至長酒肆在於一里而不甞入焉市場在於十里而不甞觀焉 由是在於鄕里不斷讚揚稱譽之聲在於家庭不披楚撻傷心之怒焉其於事親之 節則晨昏無怠養志養軆克誠克孝其於居喪則六年居廬不脫經帶言而不語對 而不問其於忌祭則三日致齊思其居處笑語志意所樂所嗜其於家廟晨謁則年 當八十而不闕焉在於治家則以勤儉爲主以奢爲誠其於當用則雖多數而不惜 也其於濫用則雖少許而不費也宗族婚喪則量宜扶助焉人若忌故而貧不能自 供則必以升米給之人若遭喪葬而窮不能自足則必以斗米賻之在於冠婚喪祭 則多從先世之傳禮而或有修正焉其於學業則早受家庭工令之學而承孝陵叅 奉之筮仕與世相違晩始覺悟幡然有志於師門性理之學乙巳春徃于南面柯亭 里見柳先生諱麟錫號毅菴而始請受業公年四十一歲於丈席拜謁多年而晩時 請業自嘆其晩悟也其後丈席乎書箴誠之文而與之又命號以特秀齋曰汝居盤 松則汝之志節如松之特秀焉因而源源進拜問辨焉未幾年先生渡海未能追從 獨居山房飲膝跪坐而唯以六經之文文宋之書華重省毅四先生之文爲從事焉 素有誠一之性又兼百忍之心繼家聲而盡孝友之道撫宗族而有敦厚之誼儀容 有度嚴而且和敎誨有術詳而不煩不獨垂誠於家庭亦多勉進其後學乙酉八月 一日寅時以千年終于寢享壽八十一至于易簀而無一日間斷早起盥櫛整冠束 帶對案跪坐沉潛禮經蓋公好學之誠至老彌篤焉公之行蹟其如何哉今余弘窩 多感輔仁之深契又兼易敎之厚義不遠千里而委訪特秀齋公矣嗚呼公逝不在 秋榭荒凉與其長子誠根往拜墓所涕泗滂滂凡今之人兮孰知余心之傷敢竭微 誠以記公之行狀不可悉錄
  京畿道富平郡同門弟李哲儀謹錄


 특수재 황영국 행장략
공의 성은 황(黃)이요 휘는 영국(永國)이오 자는 숙좌(叔佐)라, 호를 가정에서 명한 바로는 혜사(蕙史)였더니 의암 유인석(柳麟錫)1) 선생께서 명한 바 특수재(特秀齋)라. 선계의 본관은 평해라. 황씨(黃氏)는 신라 때로부터 동방에 들어난 사족으로서 누누세세 존망을 받아왔으며 고려 충렬조에 휘 용(𤨭) 어른은 관이 삼중대광보국 시호가 충경(忠敬)이니 일인지하 만민지상이라, 이조 초에 휘 희석(希碩) 어른은 개국원훈으로 봉 평해군하야 시호가 양무(襄武)오 즉 공의 19대조니라. 18대조의 휘는 인(麟) 예조판서요, 17대조의 휘는 치조(致祖) 공조참의요, 16대조의 휘는 길원(吉源) 선공감정이요, 15대조의 휘는 곤(坤)이신데 예조참의요, 조의 휘는 기언(基彦)이고, 조비는 진사 선산 김창수(金昌洙)의 따님이시온데 붕성지통하야 절사하심에 종부지절의 소풍이 나라에 까지 전파되니 정려를 내림이라. 선고의 휘는 교진(敎鎭)이시니 통사랑 선공감 가감역이오, 선비는 남양 홍관섭(洪寬燮)의 따님이다.
 고종(高宗) 을축(乙丑)(1864) 4월 25일 유(酉)시에 춘천 반송 구댁에서 공을 생하시니, 자질과 기품이 단숙하며 지조가 고결터니, 생후 8삭에 걸음을 디디고 10삭에 이르러 뛰어다님이 능하며, 돐이 다가옴에 말을 듣고 함이 서툼이 없으며, 3세를 당하여는 크고 작음은 물론 장유지서며 효도와 우애를 능히 분변하니 실로 천성이 본이로다. 5~6세에 글공부에 들어가니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또는 깨우침에 빼어나 가히 신동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잠시도 형들의 곁을 떠남이 없고, 또는 언제나 글 친구들과 서로 놀며 동유를 사귐에 있어서는 서로이 실례됨이 없으며, 동문 학도들과 절대 다투거나 난잡함이 없으니, 이와 같음은 지각이 있음이라. 글 공부에 부지런하며 벗들과 돈독하니 부형들께서 기특히 여길 뿐 더러 종족 또는 원근의 모두가 칭찬이었고, 어려서부터 장년에 이르도록 주막이 측근이나 드나들지 아니하고, 시장이 불원이나 구경함이 없나니, 말미암아 고로 인근 향리 노유의 찬양에 들램이오, 가정에 있음에도 종아리를 맞음에도 마음 상하여 흩어짐이 없음에, 그럼으로 부모를 섬김에 예절인 즉 새벽 어둠에 게으르지 않고 심신의 지극한 정성과 효도였으니, 거상을 당함에 6년 시묘에 질대를 벗지 않으며 말을 삼가 묻지 않으며, 기제를 당함에 삼일 재계함이 선세의 추원에 깊은 효이며 또는 즐거움을 즐기는 바, 사당을 매 새벽 알묘인 즉 80여세토록 궐한 바 없음이라.
 가정을 다스림에 근면검소함을 주로 사치를 경계나, 용처인 즉 비록 과다나 아끼지 않으며, 남용 즉 비록 극소나 허치 않음이라, 혹은 종족의 혼상사에는 마땅한 양의 부조를 하며, 만약 이웃집 기제 있어 그의 능한 바 없는 이는 되쌀을 반드시 주었으며, 상을 당함에 장을 치름이 궁하면 반드시 말쌀로써 부조함이라. 또는 관혼상제가 있음인 즉 대체로 세전예를 받음이나 혹 개정도 있음이라.
 학문을 수업인 즉 일찍이 가정 훈학지도로 효를 이으며 능참봉의 서사였든 바, 세상이 더불어 뒤바뀜에 시작이 늦어짐을 돌이킬 수는 없으나, 사문 성리학에 굳은 결심으로 을사(乙巳)년 봄 남면(南面) 가정리의 의암 유인석(柳麟錫)선생을 뵙고 수업을 청하였으니 공은 이미 41세요, 장석의 누년을 배알이나 수업의 시작이 늦어 자탄함은 경서를 깨우침에 늦었도다 함이라. 그후 선생께서 서책 잠개문과 더불어 호를 명하심이 특수재라, 가로되 네가 반송에 사는 즉, 네의 지절이 솔과 같음이 특별히 빼어남에 원인이 있음이라 하시고, 나아가 절을 올리고 분변을 들음이라.
 그후 몇 해 안되어 선생은 바다를 건너니 따름이 못되어 독신으로 산곡 방에 살며 검소히 무릎 꿇고 앉아 오직 육경지문(六經之文)2), 송문지서(宋文之書) 즉 송나라의 글과, 화·중·성·의(華重省毅)3) 4선생의 글로 종사함이라. 본성을 곧게 하나로 참고 또 참는 마음을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며, 선세를 이어 효우지도를 다할 것이며, 종족 간에는 돈목과 후의로 편안함이 있어야 하며, 거동에 있어는 용모와 행신에 예도를 지켜야 하며, 엄함에 있어서는 화목과 훈교로서 자세한 기술을 가르침이 있어야 함이라, 가정이 번거롭지 않으며 외롭지도 아니함에, 드디어 훈계로서 역시 많은 후학을 진출시켰다.
 을유(乙酉) 8월 1일 인시(寅時)에 천명을 마치니 향년이 81이요, 우금토록 수심함이나 하루도 끊임없이 일찍 세수하고 머리 빗어 관을 정제하고, 요대 단정하여 안상을 대하여 꿇어앉아 예경에 깊이 잠김이었노라. 이 모두는 공의 호학의 지성이오 노후에 이르러 더욱 돈독을 더함이라. 공의 행적이 이러 하오니 어떠하리까? 나는 크나큰 깨달음이 많아 어진 마음으로 도움의 깊은 인연이 있음이요, 또는 겸하여 후하신 의리로 가르침을 얻음이요.
 불원천리로 내방, 공의 행장을 맞기니, 슬프도다! 공이 가시고 아니 계시니 정사가 거칠고 서늘하노라. 그의 장남 성근(誠根)이 성묘를 함에 눈·콧물이 옷깃을 적시니 무릇 금세기 사람이런가 하노라. 누가 나의 마음 상함을 알리오. 감히 적은 정성이나 다하여 공의 행장으로써 기술함이나 가히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경기도 부평군 동문 제 이철의(李哲儀) 근록

1)
유인석(柳麟錫): 조선(朝鮮) 말기(末期)의 의병장(義兵將)(1842~1915). 자(字)는 여성(汝聖). 호(號)는 의암(毅菴). 강화도(江華島) 조약(條約)이 체결(締結)되자 제자(弟子)를 이끌고 상소(上疏)하여 반대(反對)하였으며, 의병(義兵)을 일으켜 부패(腐敗)한 관리(官吏)를 죽였다. 그 후 만주(滿洲)로 가서 항일(抗日) 투쟁(鬪爭)을 계속(繼續)하였다.
2)
육경(六經): 시경, 상서, 의례, 악경, 역경, 춘추
3)
조선시대 후기 화서학파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 성재 류중교(省齋 柳重敎),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
c-138.1748000508.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3 20:41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