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보발(甲戌譜跋)
甲戌譜跋
내가 일찍이 소씨(蘇氏)의 보학(譜學)을 읽다가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生)한다는
구절(句節)에 이르러서 탄식하여 말하되, 우리 황씨(黃氏)의 관향(貫鄕)을
평해(平海)로 한 것은 학사공(學士公)으로부터 비롯하여 금오공(金吾公)이 중조(中祖)가 된 후(後)로
3세(三世)를 지나서 검교(檢校) 평리(評理) 대광(大匡)의 3형제분(三兄弟分)이 나누어 3파(三派)가 된 것이다.
세대(世代)가 비록 멀어졌어도 그 처음은 또한 하나로 같다.
그 동안
여러차례 병화(兵火)로 문적(文籍)이 전(傳)하지 못하고 파계(派系)의
증거가 없어
노위(魯衛)1)의 친(親)함을
초월(楚越)2) 즉 떨어져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보고 왔은 즉 오종(吾宗) 간(問)의 소루지감(疏漏之感)이 항상 그 극(極)에 처(處)해 있었다.
지나간 경인년(庚寅年)에 보청(譜廳)을 풍기(豊基) 금양(錦陽)에 두어 드디어 1차(一次) 완보(完譜)를
이룬 후(後)로부터 누차(累次) 돈목(敦睦)함을 닦아왔으나 이는 다 금계(錦溪) 해월(海月)
양선생(兩先生)의 초집(草輯)에서 시작(始作)된 것이다.
다시 임신년(壬申年) 봄에 금계(錦溪) 선생(先生)의
주손(胄孫) 영래(永來)씨가 조상(祖上)을 밝히고 종족(宗族)을 보호할 큰 뜻으로 평해대동보(平海大同譜)를
수보(修譜)할 것을 발의(發議)하여 통문(通文)을 평해(平海)와 각지방(各地方)으로 보냈더니
제종(諸宗)이 대거(大擧)하여 모여 합의(合議)를 보고 보청(譜廳)을 월송(月松) 추원재(追遠齋)에
설치(設置)하여 보역(譜役)을 시작(始作)하였다.
이와 같은 대동보사(大同譜事)는 백년(百年)에 한번
이루어지기 힘 드는 일인데 선조(先祖)의 영혼(靈魂)의 가호로
꼭 조상(祖上)들이 임존(臨存)하시고 자손(子孫)들이 그 좌우(左右)에 뫼시고 앉아
합심협력(合心協力)하는 느낌으로 보사(譜事)가 진행(進行)되어갔다. 그럼으로 추원재(追遠齋)에
오는 사람은 동종(同宗) 누구나 다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우러남을 금(禁)치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족숙(族叔) 만영(萬英)씨와 동종(同宗) 중곤(仲坤)씨가 크고 작은 범백사(凡百事)를 돌보아
성력(誠力)을 기울였으며 그들은 사경제(私經濟)도 넉넉치 못한데 보청(譜廳)의
재정(財政)도 사무(事務)도 모두 두 분이 도맡다시피하여 수년(數年)동안을 불고(不顧) 가사(家事)하고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둘 때까지 시종일관(始終一貫)하였으니 종중(宗中)의 대행(大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호(嗚呼)라! 회고(回顧)하건데 나와 같은 부족(不足)한 사람이 교정(校正)의 책임(責任)을
지고 집사(執事)의 일원(一員)으로 뒤따라 왔으니, 부끄러운 일이나 시말(始末)을
잘 안다는 핑계로 외람(猥濫)함을 헤아리지 않고 중간(重刊)의 전말(顚末)을
대략(大略) 기술(記述)하여 용렬하게도 서문(序文) 말미(末尾)에 붙이노라.
후예손(後裔孫) 휘(暉) 근발(謹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