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보서(戊戌譜序)
戊戌譜序
사람은 대개 족(族)이 있고 족(族)은 반드시 보(譜)가 있는 것이다. 족(族)이 보(譜)가
없으면 선조(先祖)의 계통(系統)을 상고할 수 없고 후손(後孫)들의 소목(昭穆)을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동족(同族)이 서로 상대(相對)해도 길가는 사람처럼 무관심(無關心)하게
된다면 동족(同族)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이 바로 작보(作譜)하는 소이(所以)이다. 그러므로 명문(名門)과 거족(巨族)은 이 족보(族譜)를
편수(編修)하지 않는 이 없다.
생각(生覺)컨대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는 학사공(學士公) 휘(諱) 낙(洛)이라는 어른께서 동국(東國)에
오심으로써 비롯해서 평해(平海)에 인거(因居)하심에, 후세(後世) 형제(兄弟) 3인(三人)이
각각(各各) 봉관(封貫)하여
평해(平海)가 제1위(第一位)라. 이로부터
규조연편(圭組聯翩)1) 즉 높은 벼슬이 계속 이어졌고
명공거경(名公臣卿)의 대훈위업(大勳偉業)이 혁혁히 빛났으며 또 철인(哲人) 달사(達士)와 문장덕행(文章德行) 등
명인(名人)들이 대대(代代)로 끊이지 않아 울연(蔚然)히 동방(東方)의 명문화족(名門華族)을 이루고
겸하여 후손(後孫)들이 크게 번창(繁昌)해 팔도(八道)에 퍼져 사는 수가 헤아릴 수 없을만치
많아졌으니 진실로 그 번연(繁衍)함을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아조(我朝) 중엽(中葉) 만력(萬歷) 병오(丙午)에 수보(修譜)를 시작(始作)한 이래 거금(距今) 3백유여년(三百有餘年)에
몇차례 중간(重刊)한 일이 있었으나 그간 사소(些少)하고 간략(簡略)한 차이(差異)는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진심갈력(盡心竭力)하고 규례(規例)을 준수(遵守)한 것은 일치(一致)했었다.
그 후(後) 1세기(一世紀)가 지난데다 수개성상(數個星霜)이 더한 지금에 와서 각파(各派)의 자손(子孫)이
크게 번연(繁衍)하였으니 만일(萬一) 수보(修譜)하지 않는다면 종파(宗派)와 분파(分派)를 분변(分辨)하기
어렵고 또 소원(疏遠)해지는 폐풍(弊風)을 구(救)하기 어려운 고(故)로 수보(修譜)할 일이 심히
급급하더니, 지난 을유(乙酉) 1945년(一九四五年)에 시국(時局)이 분분(紛紛)하였고 경인(庚寅) 1950년(一九五○年)에
625동란(六二五動亂)을 겪었은 즉 어느 겨를에 손이 미쳤겠는가?
다행(多幸)이 이제 세속(世俗)과 인심(人心)이 조금씩 안정(安定)되어감으로 정유(丁酉) 1957년(一九五七年)
봄에 종의(宗議)가 발기(發起)되어 보소(譜所)를 설치(設置)하고 각도(各道)의 제(諸) 종중(宗中)에
통고(通告)하여 널리 계단(系單)을 수합(收合)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파(同派) 종인(宗人)이
다수(多數) 북지(北地)에 있어서 수단(收單)할 길이 없음으로 주로 구보(舊譜)에
의(依)하여 시인(是認)하고 조종(操縱)하였지 궐략(厥略)한 것은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또한 선대(先代)를 잇고 그 후음(厚蔭)을 남겨주는 길인 줄로 안다. 그러나
실로 감탄(憾歎)됨이 끝이 없다.
이 보사(譜事)가 수년(數年)만에 완성(完成)하였으니 의심(疑心) 나는 것은 바로 잡아
개정(改正)할 것과 보첨(補添)할 것은 사흠(思欽) 도근(道根) 및 원모(元模) 등 제씨(諸氏)가 편철(編綴)하였다.
이들 종사(從事)한 분들의 서사(書寫)와 수선(修繕)한 성심(誠心)이 놀라왔으며, 주력(主力)한 분은
인모(麟模)이니 더욱 가상(可償)한 일이다. 또한 그 뿐 아니라 각(各) 문중(門中) 유사(有司)의
근면지성(勤勉之誠)도 본받을만한 일이었다. 외관상(外觀上)으로는 그저 전대(前代)의
예사(例事)로 생각(生覺)하기 쉬우나 시세(時勢)의 변천(變遷)에 제약(制約)되고
경제(經濟)에 몰려 마음을 조이면서 보사(譜事)를 완성(完成)하였으니 모든 공사(工事)에
함께 노력(努力)하신 많은 종인(宗人)들의 노고(勞苦)를 오늘에야 비로소 알만하다.
처음에는 대동보(大同譜)를 편수(編修)하려 하였으나 비단(非但) 일이 거창할 뿐 아니라
종의(宗議)를 합치(合致)시킴이 어려웠으므로 다만 충경공파(忠敬公派)의 구보(舊譜) 양식(樣式)에 의(依)하여
인간(印刊)하고 10분지1(十分之一)로 감권(減卷)하여 1질(一帙)로 한 것이다. 지금같이 재정(財政)이
귀(貴)하고 물가고(物價高)에 시달리는 때에 이만한 역사(役事)를 치루었다는 것만도
다행(多幸)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천견박식(淺見薄識)한 내가 외람히도 총무(總務)의 직책(職責)에 참여하여 큰 허물없이
보사(譜事)를 마친 것은 제종인(諸宗人)이 두호(斗護)해주신 덕택(德澤)으로 안다. 보사(譜事)가
끝나 인판(印版)에 붙이려고 윗사람들에게 보고(報告)함에 나에게 서문(序文) 쓸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의 학문(學問)이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아는지라
사피(辭避)하였지만 끝내 사양할 수 없어 대략 신편(新編)과 속편(續編)의 전말(顚末)을
적어 구보(舊譜)의 서문(序文)에 붙여두는 바이다. 충경공(忠敬公) 백중(伯仲) 양파(兩派)도
각각(各各) 수보(修譜)한다는 말이 있다.
무술(戊戌)(1958년(一九五八年)) 소춘(小春) 하한(下瀚) 후예손(後裔孫) 의모(義模) 근서(謹書)
연편(聯翩): 연이어 계속하다. 그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