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c3-033

문서의 이전 판입니다!


기해평리공파보서(己亥平理公派譜序)

己亥平理公派譜序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성군(聖君)께서 세운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그래서 옛날부터 백성(百姓)을 가르치는 방법(方法)이 조선(祖先)을 섬기고 그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겨레와 친합(親合)하는 것은 곧 선대(先代)를 기쁘게 받드는 것이므로 이것을 만세계(萬世界) 인간(人間)의 기강(紀綱)으로 세우고 있다.
 대저 사람이 누구나 부조자손(父祖子孫) 관계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물도 한가지로 한 근원(根源)에서 나오는 것이요, 아래로 훑어 볼 때 한 뿌리의 나무도 여러 갈래의 가지로 각각(各各) 나뉘는 것과 같이 사람도 오늘날 한 조상(祖上)의 자손(子孫)으로 수백만(數百萬)의 겨레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런 고로 옛날부터 사람들이 종족(宗族)을 중(重)하게 여겨 위씨(韋氏) 화수회(花樹會)1)와 이천월일지규(伊川月一之規)로써 이를 좋아 하였느니라. 이에 族譜로 祖上을 밝히고 또 그 宗族을 연결시켜 왔느니라.
 우리 黃氏가 이 나라에 두루 퍼져 있으나 오직 學士公이 鼻祖가 되는 것만은 모두 잘 알고 있는 事實이다. 그리고 年代가 멀다 하나 지금 여기 世系를 考證한다면 平海 長水 昌原으로 貫鄕을 달리 쓰되 그 始祖는 다 같다. 平海를 本貫으로 하는 우리들은 金吾公으로 中祖를 삼고 三兄弟 분이 나누어져 三派가 되고 所謂 大同이라는 것은 이 三派의 合同을 말하는데 不外한 것이다.
 甲戌 平海大同譜 以來 이미 二十六年이 되었다. 그 동안 宗中에 德望있는 어른들이 차례로 돌아가시고 只今의 世態는 날로 갈수록 퇴폐하여 祖先의 뜻을 이어 修譜할 길이 막연해 보이므로 지난 丁酉年 十月 中丁에 月松 先壇 省掃하는 날 各處 宗人들이 齊室에 모여 奠祀를 올린 후에 修譜할 것을 議論하여 보았으나 意見이 區區하여 다음 宗會로 미루고 말았다. 그 후 다음 해 三月에 다시 總會를 열어 三派 大同譜 事務 條例를 決議하고 成文 布告한 뒤에 本人과 世元 斗星 두 族人과 함께 豊基와 淸安 두 宗宅을 訪問하여 決議된 經緯의 전말을 大綱 말하고 酬議한 決果 世態의 연고와 經濟의 어려움으로 莫重大事를 치루기 至難하다는 뜻을 앞세워 환영치 않으므로 不得已 決裂되고 派譜를 決行키로 마음을 굳힌 후 族宗 載元과 함께 赤手空拳으로 南部 地方을 다녀 七個月만에 收單을 마치고 돌아와 中抄한 것을 正書를 해서 다음 해 三月에 完成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 가운데 느끼는 바는 이 修譜하는 大義가 先代를 追慕하고 宗族을 護衛하며 同宗間 敦睦을 爲主하는 先代로부터 이어오는 뜻을 後世들이 繼承하는 當然之 事業인데 여기에 貳異를 갖는 宗人들의 心情을 理解할 수 없다. 모름지기 그들의 再考의 餘裕를 갖는 것을 希求한다.
 대저 士族 之家에 譜牒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한 집안에 아름다운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世道人心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는 點에도 留意하여야 한다. 이러한 說은 程張 夫子께서 이미 說罷하여 널리 傳해온 사실이다. 다시 附言치 않기로 하노라. 가만히 生覺하니 族祖 極英氏와 族弟 載元君이 함께 침식을 잊고 凡百事를 담당하여 先系를 밝히고 世德을 지었으나, 大同 修譜를 이루지 못하고 派譜에 그쳤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나는 元來 不足한 사람으로 아는 바 없이 어찌 감히 蕪辭로써 先父老의 記述 밑에 序文을 둘 수 있으리요마는 다만 느끼는 바에 지나지 않은 것만을 몇 마디 말해둔다.
  己亥 四月 上浣 後裔孫 載宇 謹序

1)
화수회(花樹會): 하겸진(河謙鎭)[1870~1946]의 문집 『회봉집(晦峰集)』에 의하면, “옛날 위씨(韋氏) 일가가 꽃피는 나무 밑에서 모여 술을 마시고 친목을 도모하였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장소에는 상관없이 일가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을 화수회라 하고 각 파의 모임이나 대종회를 막론하고 화수회라 하였다.
c3-033.1747178323.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4 08:18 저자 121.166.63.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