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평리공파보서(己亥平理公派譜序)
己亥平理公派譜序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성군(聖君)께서 세운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그래서 옛날부터
백성(百姓)을 가르치는 방법(方法)이 조선(祖先)을 섬기고 그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겨레와 친합(親合)하는 것은 곧 선대(先代)를
기쁘게 받드는 것이므로, 이것을 만세계(萬世界) 인간(人間)의 기강(紀綱)으로 세우고 있다.
대저 사람이 누구나 부조자손(父祖子孫) 관계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물도 한가지로 한 근원(根源)에서 나오는 것이요,
아래로 훑어 볼 때 한 뿌리의 나무도 여러 갈래의 가지로 각각(各各)
나뉘는 것과 같이, 사람도 오늘날 한 조상(祖上)의 자손(子孫)으로 수백만(數百萬)의
겨레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런 고로 옛날부터 사람들이 종족(宗族)을
중(重)하게 여겨 위씨(韋氏)
화수회(花樹會)1)와
이천(伊川)2) 월일지규(月一之規)로써 이를 좋아 하였느니라.
이에 족보(族譜)로 조상(祖上)을 밝히고 또 그 종족(宗族)을 연결시켜 왔느니라.
우리 황씨(黃氏)가 이 나라에 두루 퍼져 있으나 오직 학사공(學士公)이
비조(鼻祖)가 되는 것 만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事實)이다.
그리고 연대(年代)가 멀다 하나 지금 여기 세계(世系)를 고증(考證)한다면
평해(平海) 장수(長水) 창원(昌原)으로 관향(貫鄕)을 달리 쓰되 그 시조(始祖)는 다 같다.
평해(平海)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우리들은 금오공(金吾公)으로 중조(中祖)를 삼고 3형제(三兄弟) 분이
나누어져 3파(三派)가 되고 소위(所謂) 대동(大同)이라는 것은 이 3파(三派)의
합동(合同)을 말하는데 불외(不外)한 것이다.
갑술(甲戌) 평해대동보(平海大同譜) 이래(以來) 이미 26년(二十六年)이 되었다. 그 동안 종중(宗中)에
덕망(德望)있는 어른들이 차례로 돌아가시고 지금(只今)의 세태(世態)는 날로 갈수록
퇴폐하여 조선(祖先)의 뜻을 이어 수보(修譜)할 길이 막연해 보이므로,
지난 정유년(丁酉年) 10월(十月) 중정(中丁)에 월송(月松) 선단(先壇) 성소(省掃)하는 날 각처(各處) 종인(宗人)들이
재실(齋室)에 모여 전사(奠祀)를 올린 후에 수보(修譜)할 것을 논의(議論)하여 보았으나
의견(意見)이 구구(區區)하여 다음 종회(宗會)로 미루고 말았다. 그 후 다음 해 3월(三月)에
다시 총회(總會)를 열어 3파(三派) 대동보(大同譜) 사무(事務) 조례(條例)를 결의(決議)하고 성문(成文)
포고(布告)한 뒤에, 본인(本人)과 세원(世元) 두성(斗星) 두 족인(族人)과 함께 풍기(豊基)와 청안(淸安) 두 종택(宗宅)을
방문(訪問)하여 결의(決議)된 경위(經緯)의 전말을 대강(大綱) 말하고 수의(酬議)한 결과(決果),
세태(世態)의 연고와 경제(經濟)의 어려움으로 막중대사(莫重大事)를 치루기 지난(至難)하다는
뜻을 앞세워 환영치 않으므로, 부득이(不得已) 결렬(決裂)되고 파보(派譜)를 결행(決行)키로
마음을 굳힌 후 족종(族宗) 재원(載元)과 함께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남부(南部) 지방(地方)을 다녀
7개월(七個月)만에 수단(收單)을 마치고 돌아와, 중초(中抄)한 것을 정서(正書)를 해서
다음 해 3월(三月)에 완성(完成)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 가운데 느끼는 바는
이 수보(修譜)하는 대의(大義)가 선대(先代)를 추모(追慕)하고 종족(宗族)을 호위(護衛)하며 동종간(同宗間)
돈목(敦睦)을 위주(爲主)하는 선대(先代)로 부터 이어오는 뜻을 후세(後世)들이 계승(繼承)하는
당연지(當然之) 사업(事業)인데, 여기에 이의(貳異)를 갖는 종인(宗人)들의 심정(心情)을 이해(理解)할 수 없다.
모름지기 그들의 재고(再考)의 여유(餘裕)를 갖는 것을 희구(希求)한다.
대저 사족지가(士族之家)에 보첩(譜牒)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한 집안에
아름다운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도인심(世道人心)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는 점(點)에도 유의(留意)하여야 한다. 이러한 설(說)은
정장(程張)3)
부자(夫子)4)께서
이미 설파(說罷)하여 널리 전(傳)해온 사실이다. 다시 부언(附言)치 않기로 하노라.
가만히 생각(生覺)하니 족조(族祖) 극영(極英)씨와 족제(族弟) 재원(載元) 군(君)이 함께 침식을 잊고
범백사(凡百事)를 담당하여 선계(先系)를 밝히고 세덕(世德)을 지었으나, 대동(大同)
수보(修譜)를 이루지 못하고 파보(派譜)에 그쳤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나는 원래(元來) 부족(不足)한 사람으로 아는 바 없이 어찌 감히 무사(蕪辭)로써
선부로(先父老)의 기술(記述) 밑에 서문(序文)을 둘 수 있으리요마는 다만 느끼는
바에 지나지 않은 것만을 몇 마디 말해둔다.
기해(己亥) 4월(四月) 상완(上浣) 후예손(後裔孫) 재우(載宇) 근서(謹序)
2. 남편(男便)의 높임말
3. 공자(孔子)의 높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