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c3-040

문서의 이전 판입니다!


대해선생행장(大海先生行狀)

 大海先生行狀
 先生의 諱는 應清이요 字는 清之며 自號를 大海라 하다. 高麗 僉議評理 諱 瑞의 後孫이다. 曾祖의 諱 玉崇은 漢城判官이요, 祖의 諱 輔坤은 生員이요, 考는 諱 瑀는 通訓大夫 星州特使이며, 비는 三陟 金氏 諱 濱의 女이다. 嘉靖 甲申年에 先生이 나셨으며 어려서부터 特異한 稟質이 있어서 學을 좋아하고 힘쓰더니 壬子年에 進士試에 合格되었다가 庚申年에 別科에 入試하여 策文의 題目이 착하지 못한 말을 보고 對答하지 않고 退場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門을 닫고 學業에 힘쓰며 德行을 닦으니 遠近 사람들이 모두 그 高尙한 人格에 稱頌이 藉藉하였다 한다. 이로 甲申年에 朝廷의 薦用으로 禮賓 參奉을 삼았으나 이에 赴任하지 않았으며 다시 延恩殿 參奉을 除授하니 거듭 辭退할 수 없어 不得已 赴任하였다. 그러므로 위에는 特命하여 公으로 하여금 朴淵 爆布 開城 一帶의 觀光을 任意로 鑑賞케 하는 特典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甲午年에 掌樂院 別坐를 除授하였더니 때마침 임금의 大駕가 義州로부터 돌아오니 先生은 스스로 身分에 맞지 않음을 느껴 억지로 허리를 구부려 闕下에 나아가서 四弊語를 글로서 올린 것이 甚히 切中하여 임금이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드디어 眞寶 縣監으로 뽑아 쓰는지라. 곧 赴任하여 戰亂으로 흩어지고 도망한 百姓들을 모아 잘 撫摩하여 再建하니 고을이 다시 完全히 回復되었더라. 그 後 辭職하고 돌아와 正寢에서 考終하니 虎田壬坐에 葬事하였다.
 先生의 人格은 忠孝가 出天하여 定省之禮와 旨甘奉養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르지 않고 平生을 한결같이 섬기매 遠近 사람들이 平海 黃門에 文會이 새로 誕生하였다고 稱頌이 藉藉하였다. 內艱喪을 當하니 呼天痛哭하는 중 피를 吐하였으며 墓下에서 二年間을 蘆墓사리를 하는데 끝마치는 날까지 粥으로 生活하였다. 그러나 父親의 寢所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새벽 일찍이 問安드리고 內庭에는 들르는 일이 없이 蘆幕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 後 다시 外艱喪을 當하니 그 哀慕함이 前喪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그 出天의 至誠이 官民을 感動시켜 드디어 官에서 나라에 그 孝誠을 狀啓하여 萬歷戊寅年 여 朝廷에서 先生을 孝子로 旌門을 세워 表彰하였다.
 先生은 天稟이 慎重하여 그 言語와 動作이 사람으로 하여금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수그러지도록 하는 千萬斤의 무게가 있었다. 平素의 起居는 옛날 聖賢들의 참된 人生의 法度를 따라 澄潔한 一室에 端正히 앉아 항시 經書를 탐讀하며 그 實踐에 힘썼다. 室內 四壁上에는 聖句等을 써서 붙여 左右銘으로 삼았다.
 또 詩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中의 한 句節을 紹介하면
黎羹栗飯養殘軀 여갱속반양잔구 명아주국 조밥에 늙은 몸이 修養되니
晨起衣冠讀典謨 신기의관독전모 새벽녁에 일어나서 衣冠을 정제하니
莫道先生無用處 막도선생무용처 나홀로 옛사람의 모범이 되었은 즉
一身都是一唐虞 일신도시일당우 선생은 나더러 쓸모없다 말을 마소.
이 글의 뜻은 내 한몸은 도무지 唐虞와도 같아서. 그 自得의 즐거움은 대개 이것으로서 可히 生覺해 볼 일이다. 나이 많고 德이 높음에 遠近 學徒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訓誨에게 으르지 않으며 冠婚喪祭 四禮에도 밝아 깨닫기 어려운 대문을 잘 講論하며 理解케 하였으며 月川 趙先生 穆과 大庵 朴先生 惺과 같은 名士들과도 書疏로 往復하여 서로 닦고 행함을 같이하니 鄕邑이 모두 따라 變化함에 사람들이 平海고을은 禮儀의 문이라 일컬었더라.
 先生이 斯文의 功이 이와 같이 크니 당시 平海에 귀양살이하던 鵝溪 李相國이 그 德行을 크게 慕悅하고 平常時 公의 德行에 關한 記錄을 읽고 얻음이 컸다 하니 先生이 이르기를 나는 學에 從事한 바 아니나 다만 내가 動靜得失을 대강 얻었음이라 하고 비유하기를 비로 먼지를 撓亂하게 쓸어붙이면 먼지가 쓴 것보다 더 일어나는 법이니 이와 같이 부산하게 쓸어서 먼지를 일으키느니보다 오히려 쓸지 않아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비유키를 우물을 치는데 요란하게 물을 흔들어도 오히려 우물이 더 濁하여지는 이보다는 우물을 가만히 두어 스스로 맑아지는 것이 오히려 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靜은 動보다 힘이 크다는 데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鵝溪가 嘆服하고 正明村記를 著述하여 스스로 깨우침으로 했다. 先生은 靜으로서 神人合一의 神秘境을 깨달아 人間의 德義의 道를 實踐하는데 새힘을 얻었던 것이다. 先生이 歿한 뒤에 고을 사람들이 先生을 追慕하여 祠堂을 세우고 俎豆로써 享祈하였다 한다.
  鶴沙 金應祖撰

c3-040.174700627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2 08:31 저자 121.166.63.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