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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46

처사황학행장(處士黃㶅行狀)

處士黃㶅行狀
 처사(處士) 황공(黃公)의 휘(諱)는 학(㶅)이요 자(字)는 학중(學中)이며 호(號)는 만취(晩翠)니 기선(其先)은 평해인(平海人)이다. 고려(高麗) 대광보국(大匡輔國) 휘(諱) 용(𤨭)의 후손(後孫)이며, 조(祖)의 휘(諱)는 미정(美晶)이니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군(護軍)이요, 고(考)의 휘(諱)는 석문(錫文)이며, 비(妣)는 함안(咸安) 조씨(趙氏)니 어계(漁溪) 선생(先生) 여(旅)의 후손(後孫)이다.
 영묘(英廟) 무인(戊寅) 2월(二月) 16일(十六日)에 청운리(靑雲里) 제(第)에서 공(公)이 나셨다. 유시(幼時)로 부터 독(讀)을 좋아하더니 부친(父親)이 일찍 볏논에 새를 보라하니 책(冊)을 끼고가서 읽기를 쉬지 않는지라, 또 산(山)에 가서 시목(柴木)을 해오라 하니 책을 읽지 못함을 한(恨)하더니, 성장(成長)함에 후암(厚岩) 권(權) 선생(先生) 문하(門下)에서 과거공부(科擧工夫)를 하다가 말하기를, 이 글은 학문지도(學問之道)가 못된다 하고 성리서(性理書)를 배우고져 하거늘 선생(先生)이 가상(嘉尙)하게 여겨 잘 지도하고 교유(敎誘)하더니, 선생(先生)이 불행(不幸)하게도 하세(下世)하는지라, 그 때 마침 천사(川沙) 김(金) 선생(先生)이 유자정(儒子亭)에서 강도(講道)하게되니 처사(處士)가 서적(書籍)을 지고 선생(先生)을 좇아 대학(大學) 논맹(論孟) 등(等) 4서(四書)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배우고, 곧 학문(學問)의 공부(工夫)가 특이(特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일용사위(日用事爲)에 있음을 알고 부지런히 배우고 물으며 생각(生覺)하고 분변(分辨)하는 곳에 힘을 모으고 용모(容貌)와 어기(語氣)의 조화(調和)를 이루고 언어행동(言語行動)이 진실(眞實)한 것으로 일관(一貫)하며 담론(談論)이 유창하고 식견(識見)이 풍부(豊富)하더니, 뜻하지 않게 스승이 또 급서(急逝)함으로 많은 충격(衝擊)을 받았다. 그러나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학행(學行)과 덕망(德望)이 높은 학자(學者)들을 찾아 의문(疑問)을 질정(質正)하여 크게 집성(集成)하게되니 원근(遠近)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즐겨 사귀며 존경(尊敬)하지 않는 이가 없더라. 군수(郡守) 현감(縣監)들도 그의 명성(名聲)을 듣고 보기를 원(願)하며 청(請)하되 가지 아니하니, 현감(縣監)이 지방(地方) 선비들의 회시(會試)를 주재(主宰)하고 이속(吏屬)을 보내어 관광(觀光)하기를 권(勸)하니 처사(處士) 말하기를 스스로 알면 밝은 판단(判斷)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시재(試才)같은 것을 버린지가 벌써 오래된다 하고 가지 않으니 이속(吏屬)들이 감탄(感歎)해 말하기를 청운리(靑雲里) 중(中)에 진실(眞實)로 높은 선비가 있다 하더라.
 일찍이 송단(松壇) 하(下)에 거실(居室)을 짓고 그곳에 동리(洞里) 소년(少年)들을 모아 가르치며 엄훈(嚴訓)과 선유(善誘)를 병용(竝用)하더라. 사우(士友)의 방문(訪問)이 있을 때는 그 송영접대(送迎接對)가 예절(禮節)과 법도(法度)에 어긋남이 없으니 불문가지(不問可知)로 안정(安定) 선생(先生)과 그 제자(弟子) 같음을 잘 짐작할너라. 전면(前面) 뚝대 위에 큰 못이 있는데 지세(地勢)가 좋은지라 그곳을 수축(修築)하여 수양처(修養處)로 삼으려 하였으나 재력(財力)이 궁핍(窮乏)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 때로는 조석식사(朝夕食事)를 제대로 못하는 빈한(貧寒)이 닥쳐와도 만연(晏然)한 자세(姿勢)로 조금도 근심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금상(今上) 갑자(甲子) 9월(九月) 22일(二十二日)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47세(四十七歲)러라. 그 해 10월(十月) 16일(十六日)에 부내(府內) 나갈동(蘿葛洞) 병자지원(丙子之原)에 안장(安葬)하니 도내(道內) 명사(名士)와 승우(勝友)들의 만시(輓詩)와 제문(祭文)으로 장사행렬(葬事行列)에 큰 파동(波動)을 이루었더라. 그리고 명정에 만취처사황공지구(晩翠處士黃公之柩)라 하였더라. 오호(嗚呼)라! 처사(處士) 능(能)히 탁연(卓然)히 자립(自立)하고 의연(毅然)히 분발(奮發)하여 당시(當時) 학문(學問)이 높고 많은 선배(先輩)의 문하(門下)에서 경학(經學)을 공부(工夫)하고 옛 현인(賢人)들의 위기(爲己)하는 취지(趣旨)에 유의(留意)하여 곤궁(困窮)하다하여 남에게 굴(屈)하는 일이 없고 우수참절(憂愁慘切)로 절개(節介)를 고치는 일이 없이 오직 의리(義理)에 당위(當爲)함만 알 뿐 명리(名利)에 당(當)함에 혹하지 않더라. 그리고 그 입지(立志)의 고매(高邁)함과 진학(進學)에 날카로움이 대방가(大方家)와 구족(舊族) 중(中)에도 보기 드문 학자(學者)라 하겠으니 맹자(孟子)의 이른바 호걸지사(豪傑之士)라 하겠더라. 만약(萬若) 그 천수(天壽)가 좀 더 하였던들 그의 성취(成就)함이 여기서 그치지 아니 하였으리라.
 애석(哀惜)하다,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또 그 업(業)을 마치지 못하고 초조히 궁산협곡(窮山峽谷)에 매몰(埋沒)되고 말았으니, 나의 벗 유경한(柳景韓)씨가 어느 날 나를 보고 말하기를 나의 아우가 전에 황처사(黃處士)의 문장(文章) 약간편(若干篇)을 모아 둔 것이 있고 또 그의 행장(行狀)을 지을 뜻이 있더니 그도 또한 일찍 갔으므로 부득이(不得已) 오늘 이 일을 그대가 유념(留念)해 주기 바란다 함으로, 나 같은 천학비재(淺學菲才)로 감당할 수 없는 인물(人物)이지만 계씨(季氏)와 동인(同人)의 우의(友誼)가 깊고 또 처사(處士)와 동문지의(同門之誼)가 있어 자주 상종(相從)하던 터이며 또 그의 선행(善行)을 흠선(欽羨)하던 바이므로, 졸연 간에 자기(自己)의 능력(能力)을 생각(生覺)할 사이 없이 사절(謝絶)할 수 없는 환경에 빠져 한통을 등출(謄出)하고 행적(行蹟)을 약술(略述)하여 붙이노니 금세(今世)에 문필(文筆)을 잡은 형(兄)이 일언(一言)의 혜사(惠賜)를 더해 주었으면 천명포양(闡明褒揚)하는 뜻이 적지 않았으리라.
  달성(達城) 서활(徐活) 근서(謹書)

c3-046.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1 19:2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