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c3-049

문서의 이전 판입니다!


전국회의원황병우행장(前國會議員黃昞禹行狀)

前國會議員黃昞禹行狀
公은 先天的으로 文學과 言述에 남다른 素質을 갖고 태어났으며 自幼時로 愛國의 氣質이 싹트고 있었다는 側面도 눈에 띄었다 中學校 大邱遊學時節 日帝의 그朝鮮말 抹殺政策가운데에서도 온갖 苦難을 무릅쓰고 우리말로 노고지리라는 出版社를 創立하여 文學同好學生들끼리 모여서 創作活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재와서 새삼 記憶나는 바이다 每年夏季放學期가되면 故鄕마을 靑雲洞에 돌아와서 洞口밖에 조그만한 自己내 果樹園으로 같은類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排日思想이 內包된 自作散文등을 說明兼熱辯을 吐하는 光景을 먼데서 바라보고 있노라니 演說에도 宏壯히 솜씨가 있다는 것을 쉽 게 感知할 수 있었다 公은 平海黃氏 二十九世요 崇祿大夫三重大匡輔國諡忠敬公의 二十六世李朝開國功臣諡襄武公의 二十二世 本派譜始祖府使公의 二十一世이다 公이 國會議員에 三回나 當選된 것은 勿論有權者들 께서 아낌없는 聲援의 德澤이겠지만 原因은 公의 遠近祖上들이 行한 排日愛國思想등을 傳해들 은 有權者들께서 嘉像히 여겨 더욱 굳게 뭉쳐져서 當選된 것이 事實이다 그리고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傳說 한 토막을 記述하는 바이다 마을 入口에 聖指골이라는 山골이 있는데 옛날 어느때 聖真道師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暫時 걸음 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靑雲洞을 가르키면서 저기 저 洞里에는 後日 政丞이 誕生할터이다라고 한 마디를 남기고는 그만 그골로 들어서더니 人忽不見이 되어 버렸다고 해서 聖指골이라는 골이름 이 붙여졌다고 한다 行狀 그당시에는 이동리에 가평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성진도사의 유언을 믿고 수대를 거주하여도 정승이 나지 않으므로 타지로 이주한 후 그다음에 황씨가 입향하였다고 하니 소이 국회의원이 된 것도 그성진도사의 유언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공의 정치생활에는 파랑곡절도 많았다 야당 시절 때는 도로포장이 국내에서도 가장 낙후상황이었 으므로 한탄하던 나머지 그 유명하였던 맨발의 행진시위까지 하면서 도로포장을 완공하였고 국회 에서는 신민당 의원 내부 총무 국회 예산 결산위원회 간사 등 요직을 맡아 많은 활동을 하였고 당직 으로서는 여당인 민자당 경북도당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큰 기둥이 되어 경북 발전에 공로가 많았을 뿐 아니라 청송 영덕 지역구 발전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로가 있었노라 세을亥 以備後日之考據 일 월 청운동 상영 謹書

c3-049.1747296909.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5 17:15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