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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12

만휴당전래사적(晩休堂傳來事蹟)

만휴당 전래사적(晚休堂傳來事蹟)
〇전해지기를 「말안장과 말굴레는 상공(相公)(: 서애 류성룡)이 특별히 주신 물건으로 병오화면(丙午火變)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〇포암(浦巖)은 공[만휴당(晩休堂)]이 낚시하며 노닐던 곳으로 지금도 후손들이 추모하는 곳이다.
〇하회교량(河回橋梁)은 공이 상공(相公)에게 수업하면서 내왕하던 길로, 상공은 아침저녁으로 옷을 걷고 물을 건너는 수고로움을 염려하여 두 집안이 창설하였으며 지금도 부로(父老)들이 그 사실을 전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역군(役軍)들의 전설이 되었다.
〇팔왕(八旺)은 공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당시 상공이 지관(地官)을 뽑아 보내어 정하였다고 한다.
〇상공의 수찰(手札)과 취적헌(取適軒)(: 공의 제(弟) 한성(漢成))과 주고받은 글들은 집안 농에 가득 실려 있었는데 병오화변 이후로 다만 다 떨어진 한 폭의 종이만 겨우 전하니 한스러울 따름이다.
〇적군을 평정한 후 공은 고향으로 돌아와 충효로써 자제들을 가르치고, 금서(琴書)로써 벗들과 지내면서, 휴당(休堂)에서 시를 읊기도 하고, 봉사(鳳寺)에서 거닐기도 하면서 만년에 휴식하는 즐거움을 다하였으니 이 절과 이 당은 단지 옛 터만 남아 있어 지금도 자손들에게 사모를 받고 있다.
〇공의 선대는 시우동(時雨洞)(: 현 풍산읍 소재)에서 인금(仁今)(: 현 풍천면 소재)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대소가(大小家)들이 떨어진 거리가 수십 리나 되어도 전할 일이 있으면 늘 편지를 부쳤다. 집안에 큰 개가 있어 개의 목에 편지를 매어 스스로 왕래하게해서 서로의 뜻을 통하였다. 대개 이 길은 큰길에서 떨어져 있고 돌길과 늪으로 되어있으며 호랑이와 늑대들이 울부짖고 있었는데도 미물(微物)(: 개)이 오히려 능히 이와 같을 수가 있었던 것은 그 당시의 교화가 미물에게 미쳤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그곳을 구애(狗崖)(: 개 언덕)라 전한다.
〇구성봉(九成峯) 아래의 대봉암(對鳳菴)은 공이 창건하였으며 그 당시 성묘하고 강습하던 곳이다. 그 때 조상들을 생각하며 지음 작품과 낙성식(落成式) 때 편액한 글들이 상자 속에 소장되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다만 이 두 편의 문과 세 수의 시(詩)만 사(絲)동의 옛 상자 속, 낡은 종이에 쓰여진 해진 글에서 얻었으니 무슨 다행으로 병오년의 화변(火變)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곧 이른바 봉문일우(鳳文一羽)(: 좋은 문장 중의 극히 일부분)격인 것인져. 이에 감히 옥연정(玉淵亭)을 중수하는 편액에 기록하여 나의 숨겨진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성을 붙인다.
  후손 극동 근서(謹書)

c32-012.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12:2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