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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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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포공(樂園公) 행장(行狀)략(略)

낙포공(樂園公) 행장(行狀)략(略)
 황씨의 선대는 중국의 강하인(江夏人)이다. 동한(東漢) 건무(建武) 4(四)년에 배를 타고 동쪽으로 건너와 평해(平海)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으니 이분이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시조가 된다.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유증(裕中)이 용(墉)을 낳으니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이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조선 조에 들어와 태종대왕 때 휘 우(祐)가 있으니 병조전서(兵曹典書) 증 좌의정이며, 천계(天繼)를 낳으니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냈다. 이로부터 후에는 관직에 오름 이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인데, 백씨 정략장군(定畧將軍) 만휴당(晩休堂)과 함께 임진난을 겪고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형제가 산야(山野)에 숨어 취적(取適)하였으며, 세상일을 관망함으로 뜻을 두었으니, 공에게 11(十一)세조가 된다.
 고조(高祖)의 휘는 순남(舜南)이요, 증조의 휘는 일봉(逸鳳)이며, 조의 휘는 구석(九錫)이다. 고의 휘는 대진(垡鎭)이며 호는 운포(雲圃)이다. 비(妣)는 수성나씨(壽城羅氏) 사인(士人) 만수(萬洙)의 따님인데 유가(柔嘉)하고 정예(貞嫣)하여 부인의 덕에 배합되어 어김이 없었다. 인조 계유(1633(一六三三))생 이시다.
 공을 낳음에 재능이 뛰어나 총명하였으며 뭇 아이들과 다름이 있었다. 점점 자라 5~6(五・六)세가 되어 무리지어 놀 때에 위태한 일은 하지 않았고 웃으며 물러서며 말하기를 「만약 패함에 이르러도 신체를 훼손할 수 없다. 신체를 상하게 되면 부모님은 어떠하겠는가?」라 했다. 이재(履齋) 천공께 나아가 학업을 전수(傳受)함에 크게 칭찬을 들었고, 일찍이 응하(應夏)에게 수업함에 문의(文意)의 지름길을 잃지 않았다. 나이 겨우 17~8(十七~八)세에 문사가 뛰어나 문체를 지었고, 만사(輓詞)나 뢰사(誄詞)를 지음에 타당하지 않음이 없게 뜻을 헤아렸다. 스승이나 덕망있는 선비는 추대하지 않음이 없었고, 가세가 청빈(淸貧)하여 양친 봉양이 어려웠으나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이르기를 「학문(學問)하는 것은 여력(餘力)으로 하는 일이요. 자력(自力)으로 농사지어 집안을 넉넉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과업(科業)을 겸하여 일찍이 여러번 향리에서 벗어났으나 이롭지 않았고, 도성(都城)에서는 관직과 벼슬을 훔친 것을 인정하니, 이에 뜻있는 자의 할 바가 아니기에 어버이에게 무릎 꿇고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였으나, 도리어 근심을 끼치는 것 같아 편안하지 않았다.
 일찍이 본분을 생각하고 힘썼으나 마음이 있지 않았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농사에 힘쓰고 어린이를 가르치며 숨어 살아 겨우 조석(朝夕)의 근심을 면하였으며, 여력과 여가가 있을 때에 종당(宗黨)이나 인척(姻戚)이 길흉 대소사(大小事)를 궁핍으로 치루지 못함이 있으면 스스로 재물을 내어 반드시 도와주어 때를 잃지 않고 그 정(情)을 펴게 하였다. 또 행인이 궁색하여 말 못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옷을 벗어 입혀주었으니 대개 그 어짊과 사랑하심이 이와 같았다.
 부친상을 당함에 슬퍼하기를 다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니 정성되고 효성스러움에 유감이 없었고, 묘소를 살펴 배알함이 한달에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모부인(母夫人)의 탕로(湯爐)가 깊어 몇 해가 되었으나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약을 드리고 미음을 드릴 때는 반드시 몸소 올렸고, 병으로 해수(咳嗽)와 타체(唾涕)가 흐름에 반드시 몸소 빗질하여 드리고 청소하며 자신이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마침내 회복되었으나 몇 해 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니 상례의 모든 절차는 부친상과 같이 하였고, 슬픔이 가시지 않음에 거문고를 타는 간절한 소리를 내니 감히 지나치지 않는 뜻을 알 수 있었다. 초토(草土) 이후에 번거로운 일을 버리고 오직 산수(山水)에 나아가 스스로 만족해 하며 작은 집을 낙동강 가에 지어 늘그막의 휴식처로 삼았다.
 고종 신묘(1891(一八九)一)에 우로전(優老典)이 있어 공께 통정(通政)의 품계가 내려졌고, 기축(1889(一八八九))에 병환이 들어 6(六)월 16(十六)일에 졸하니 수(壽) 77(七十七)세였으며, 현공산(玄空山) 곤좌(坤坐)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배(配) 숙부인(淑夫人)은 안동권씨(安東權氏) 종근(宗根)의 따님으로 2(二)남 1(一)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종위(宗渭), 차남은 종수(宗壽)며 여는 안갑호(安甲鎬)에게 시집갔다. 종위의 남은 상구(相九)·영구(永九)·형구(亨九)며, 종수의 남은 중구(中九)·치구(致九)·헌구(憲九)이다. 상구의 사자(嗣子)는 병창(昞昶)이다. 영구의 남 병창은 출계했고 다음은 병주(昞柱)며, 여는 김성경(金聖經)·박승수(朴勝洙)·권태규(權泰奎)·정병락(鄭屏洛)이다. 형극의 사자(嗣子)는 병숙(昞淑)이며, 여는 권상덕(權相德)·권희연(權會淵)·권두원(權斗元)이다. 병창의 남은 윤기(運起)·혁기(赫起)·복기(福起)·호기(虎起)며, 여는 안충모(安春模)·박기섭(朴基燮)·윤복희(尹復熙)·김지한(金智漢)이다. 병주의 남은 학기(鶴起)·용기(龍起)·봉기(鳳起)며, 여는 홍우석(洪祐石)·권태수(權泰洙)·정창동(鄭昌東)·권녕환(權寧煥)·배영창(裵永昌)이다. 그 나머지 자손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내가 향린(鄕隣)의 후생으로 후미진 곳에서 살다보니 우러르지 못했는데, 이제 봉구(鳳九)씨가 행장을 청하나 숨겨진 것을 밝힘에 행장이 실재의 만분의 일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그 말의 그 뜻을 완미(玩味)하면 타고난 성품이 이미 돈후(敦厚)하여 문학(文學)으로써 구제(救濟)하였고, 효제(孝悌)에 근본(根本)하여 아껴 쓰고 성실하였음을 알 것이다. 남의 위급함을 헤아려 마땅히 베풀어 주었으며, 멀고 가깝고 친하고 성김을 가리지 않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대하였다. 팔순에 임천(林泉)에서 너그럽게 즐기며 한가롭게 살아 다툼이 없었으니, 진실로 사류(士類)의 자랑이며 이에 도모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돌아보건대 내가 늙어 황필(荒筆)이고 또 짧고 난삽(難澁)한 글로 부득이 장황(張皇)하게 행장(行狀)을 쓰나 어찌 능히 후사(後嗣)의 효도를 생각하는 마음에 부합되겠는가? 삼가 위와 같이 모아서 새마(塞馬)의 수고로움을 청할 뿐이다.
  영가 후인 권준희(權準羲) 찬함.

c32-023.174927767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15:27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