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c32-031

회남처사(晦南處士) 황공행장(黃公行狀)

회남처사(晦南處士) 황공행장(黃公行狀)
 공의 휘는 계수(桂秀)이고 자는 계순(啓舜)이며, 호는 회남(晦南)이고 성은 황씨(黃氏)인데 기성인(箕城人)이라. 그 선조는 중국(中國) 강하(江夏)에서 한(漢) 건무연간(建武年間)에 출(出)하신 학사공(學士公) 휘 낙(洛)인데, 바다를 거쳐 동쪽으로 오셔 평해(平海)에 안거(安居)하시어 자손이 이에 관향(貫鄕)을 삼았다.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명현(名賢)과 석학(碩學)이 줄을 이었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휘 천계(天繼)공께서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하셨으며, 누전(累傳)하여 휘 귀성(貴成)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정략장군(定略將軍)에 오르셨으며 호는 만휴당(晩休堂)이고 문집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고조의 휘가 운보(雲普)이고 증조는 휘가 윤언(潤彦)이며 효성이 지극하고 유학(儒學)에 뜻을 두어 향리의 칭송을 받았다. 조부의 휘는 종태(鍾泰)이고 호는 노은(老隱)인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수신(隱居修身)하였다. 부친의 휘는 하진(河鎭)인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모친은 김녕김씨(金寧金氏)로 긍연(兢淵)의 따님이고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인데 부덕(婦德)을 갖추었다.
 공은 고종(高宗) 신미(辛未)(: 1871(一八七一)) 11(十一)월 17(十七)일생이고 인계리(仁溪里) 자택에서 출생하였다. 성품은 단정하고 재기(才氣)가 총명하여 초년시절에 서당(書堂)에 나아갔으나 어른의 가책이나 독려가 없이도 이미 자의(字義)를 해독하였으니 조부 노은(老隱)공께서 특히 총애하여 사람에 이르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키울 것이니 부지런히 가르치겠다」고 하였다. 성장하면서 학업이 점진(漸進)되고 문사(文思)가 발휘되어 드디어 하회(河回)로 우리의 조부인 전원부군(田園府君)을 찾아와 입문하여 질의응답에 임하자 선생이 극찬하며 특별히 대학(大學) 일부를 주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법을 탐구하도록 하였다. 공은 스승을 믿고 따랐으며 질의응답을 통하여 법을 탐구하였다. 집은 매우 청빈(淸貧)하였지만 관솔가지로 불을 밝히며 침식(寢食)을 잊기에 이르렀고 반드시 그 심오한 뜻을 탐구한 후에 그쳤다.
 무자(戊子)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장례를 치루었는데, 그 때 조부 노은(老隱)공께서 춘추가 매우 높은 데다가 아들을 잃은 참상(慘喪)을 당해 상심(傷心)한 나머지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 기동할 수 없게 되자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탕약(湯藥)과 음식을 공진(供進)하였으며 대소변은 반드시 손수 받아내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삼년, 부친상(父親喪)을 겨우 벗어날 무렵 하늘도 무심하여 조부 노은(老隱)공 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 애통하는 심정이 부친상 때 보다 더하였다. 이어서 조부의 상기(喪期)가 미쳐 지나기도 전에 중부(仲父)와 계부(季父)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니 참상(慘喪)이 거듭되어 실로 사람으로써 감당하기 어려웠으나 공은 애통을 참고 억제하여 상장(喪葬)을 주선하여 처변(處變)이라도 처상(處常)과 같이 하였으니 배움의 힘이 없었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었으리오. 선조를 받들어 각처의 선산(先山)에 위토(位土)를 세우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형제오인(兄弟五人)의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하였고 공은 장형(長兄)이었는데, 자신은 굶주려도 아우들을 도와 주었으므로 비록 옛 설포(薛包)(: 사람 이름)라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다. 경자(庚子)(: 1900(一九〇〇))년에 조모의 상을 당하여 전례(前例)와 같이 장례를 치루었다.
 상기(喪期)를 마친 후 향인(鄉人)이 권하여 잠시 과거시험(科舉試驗)을 본 일이 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귀향하였다.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과거에 뜻을 둔 자는 의례히 조열부양(操熱浮揚)하여 그칠 줄 모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궁달(窮達)이 유명(有命)한데 지력(智力)으로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면 그만 두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어찌 고생스럽게 백발(白髮)을 나부끼며 관가(官街)에 재주와 명예를 내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며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가.」
 이에 고인(古人)의 도회(韜晦)(: 학문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음의 뜻)하고 취정(就靜)하는 뜻을 취하여 거실(居室)을 회남(晦南)으로 편(扁)하고 진씨(陳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부지런함을 일깨우는 경귀)을 벽에 걸어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으니 소박함을 뜻함이다.
 을축(乙丑)(: 1925(一九二五))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가례에 따라 전읍(奠泣)하고 제례를 집전(執典)하는 여가에 선세(先世)의 지명장갈(誌銘狀碣) 등을 문자로 초출(抄出)하여 책으로 엮어 후손들이 가계(家系)를 알도록 하였으니 공은 선(善)으로써 시종(始終)하고 하늘의 뜻을 따른 인물이라 이를 수 있다. 병술(丙戌)(: 1946(一九四六))년 11(十一)월 18(十八)일에 병환으로 세상을 하직하였으며, 향년 77(七十七)세이고 검성곡(儉省谷) 고묘(考墓) 아래 간좌(艮坐)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월성최씨(月城崔氏)이며 참봉(參奉) 도원(道源)의 따님으로서 여사(女史)의 풍모(風貌)가 있었으며 공보다 16(十六)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묘는 합부(合祔)이다.
 공은 2(二)남 2(二)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환묵(煥默), 차남은 환우(煥佑)이며, 장녀는 의성김씨(義城金氏) 달용(達用)에게 출가를 하였고 차녀는 선성이씨(宣城李氏) 회정(會貞)에게 출가를 하였다. 환묵(煥默)은 4(四)남 2(二)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대성(大成), 차남은 천응(千應), 삼남은 문응(文應), 사남은 시학(時學)이다. 대성(大成)은 3(三)남 3(三)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영기(永起)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그 밖에 내외손의 수가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의 품성(稟性)은 순(純)하고 학식(學識)은 박(博)하며 진취(進就)는 정(正)하고 행실(行實)은 돈후(惇厚)하였다. 그럼에도 적시(適時)를 만나지 못하여 불행으로 소온(所蘊)(: 품은 바)을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어찌 세상의 도리에 한이 없지 않으리요.
 나는 공과 더불어 예(禮)로써 상종(相從)하고 편지를 주고 받은 지가 거의 60(六十)년이 된 즉 서로의 우정은 다른 사람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러니 기왕에 겸(兼)하여 서로 대대로 내려가면서 친밀하게 지내도록 함이 어떤가.
 나는 병폐(病廢)하여 앞으로 오래 살지 못할 형편이라. 일전에 공의 초윤(肖胤)인 환묵(煥默)이 유사(遺事) 1(一)통을 가지고 와서 보이고 공의 생전 행장(行狀)을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그 청이 유근(愈勤)하므로 이에 효심에 감복하여 유사를 산윤(刪潤)(: 깍고 보탬)함으로써 일생의 행적을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한다.
  병신(丙申) 소춘절(小春節) 하완(下浣)(1956(一九五六)년 10(十)월 하순)
  풍산(豊山) 류승우(柳承佑) 근찬(謹撰)

c32-031.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20:1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