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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單庚寅
御史兪公星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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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 한국고전종합DB > 고전번역서 > 존재집 > 존재집 제24권 > 부록 > 최종정보 >
本道人才古稱淵藪名臣碩儒磊落相望實與嶺南相甲乙而
朝家所以培養成就維持依賴之方亦可歷歷可數於是乎
簪纓之家草澤之擧皆聞風而興感能以篤行勑躬爲先讀書
明理爲重而敎化俗尙亶係於此是白加尼夫何挽近以來三
班之仕籍絶罕一路之土趨漸下高才茂學莫由進拔各門華
閥自甘暴棄輿情之抱鬱厥惟久矣興言及此實非細故而粟
米之征斂簿書之期會猶屬末節耳臣竊伏惟中古以前尙矣
無論粤在 先朝盛際如故翊贊臣黃胤錫學行邃深故叅奉
臣李馥遠操行貞介故縣監臣魏伯珪文識淹博此三人者以
窮經自修之士業有師承矜式一鄕儼肰爲當時道內之儒宗
而以 先朝則哲之知特加奬拔至于今炳々塗人耳目而朮
之今世實罕其倫比等之人若加一秩之贈則亦是以風礪多
士是白遣至於薦剡人才採訪孝烈亦繋事目內條件
辛卯正月初八日
[참고: 아래 번역문은 위 참고자료의 번역문임. 위 원문 마지막 줄은 다름]
본도 수계 별단 기축년(1829, 순조29) 〔本道繡啓別單 己丑〕
호남은 예부터 인재의 연수(淵藪)라고 일컬어져 이름난 신하와 큰 선비들이 특별히 많이 배출되어 서로 이어져 실로 영남과 우열을 다투었습니다. 조정에서 인재를 배양하고 성취하며 유지하고 의뢰한 방도 역시 모두 분명히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에 대대로 벼슬한 집안과 초야의 선비들이 모두 교화를 듣고 감흥을 일으켜 행실을 돈독히 하고 몸가짐을 삼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글을 읽어 이치를 밝히는 것을 중요한 요체로 여겼기에 다스림의 교화와 풍속의 숭상이 진실로 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세 이래 삼반(三班)의 사적(仕籍)에 들어간 호남 선비가 매우 드물고, 호남 지역 선비의 지향점이 점점 낮아졌단 말입니까. 그리하여 뛰어난 재주와 학문을 지닌 이가 선발되지 못해 출사할 길이 없고, 명문가와 벌열가의 자제는 자포자기를 달게 여기고 있어 이를 답답하게 여긴 여론이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를 언급하고 보니 실로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곡식을 세금으로 거두어 국가에 바치는 정무와 장부를 정리하여 기일 내에 조정에 보고하는 행정은 오히려 말단에 속하는 일입니다.
- 신이 - 삼가 생각해 보니, 중고(中古) 이전에는 거론할 것이 없거니와 지난 성대한 선조(先朝) 때의 고(故) 익찬(翊贊) - 신(臣) - 황윤석(黃胤錫)은 학행이 매우 깊었고, 고 참봉 - 신 - 이복원(李馥遠)은 지조와 행실이 곧고 반듯했으며, 고 현감 - 신 - 위백규는 학식이 깊고 넓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경전을 연구하고 몸을 수양했던 선비였으며, 학업에 사승의 연원이 있고 온 고장의 모범이 되어 엄연히 당시 도내의 유종(儒宗)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조(先朝)께서 인재를 잘 알아보시는 명철한 지혜로 특별히 장려하고 발탁하여 지금까지 영광스럽게 사람들의 눈과 귀에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세상에는 찾으려 해도 실로 이런 인물이 드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만일 한 등급 높은 품계를 내려 주신다면 또한 여러 선비를 권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전조(銓曹)로 하여금 인재를 두루 살피고 찾는 방도를 널리 시행하게 하여, 특별히 등용하는 정사를 펼침으로써 재능은 있지만 벼슬하지 못한 자를 등용하고 낮은 지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자를 진작시킨다면, 성스러운 조정에서 선정을 펼치는 교화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한국고전번역원 > 한국고전종합DB > 存齋集卷之二十四 / 附錄 > 吏曹啓
吏曹爲相考事曹 達曰因全羅左道暗行御史兪星煥別單
備邊司草記內其一故翊贊黃胤錫故叅奉李馥遠故縣監魏
伯珪俱有學行之實特加 贈秩俾爲聳勸外他孝烈之式年
抄選者亦令銓部博施搜訪以爲褒懲事也此則令該曹 稟
處事 依下矣取考其別單則黃胤錫學行邃深李馥遠操行
貞介魏伯珪文識淹博三人經學行証若是卓異旣登繡 達
則其在聳勸之道合施褒 贈之典
全羅道幼學臣柳璟善等
右謹啓臣矣荨段臣矣等竊伏念歷代聲明之盛莫成於 本
朝本朝文物之備莫僃於今日凡係道學文章思孝節義之可
爵可謚者已皆無遠無近無顯無晦壹是表而章之 國脉有
以永固士氣有以篤培試以臣矣等所居道內與德縣故將仕
郞臣黃以厚及其孫處士臣黃世基故學生臣黃壥故翊衛司
翊贊臣黃胤錫言之或以忠孝焉或以文章焉或以道學焉而
或窮而沒身或位不充德者雖錄子姓窮殘以致 褒美之不
到士林之嗟惋無已臣等請歷擧而庶 天地父母昭燭而惻
恤焉盖以厚僉正處中于幼有異質天性和順旣省事奉親樂
志就養無方疏節亦備至愛弟必以無相猶焉自念家世孤覇
發憤讀書以孶舜鷄慴禹陰書諸座右其自勵如此父母之命
少無違逆勤工鍊學喪葬祭盖誠盡禮至光海政亂自廢不出
盡室往保安里爲通先塋而以◎吟嘯林皐逌肰自適隣里無
貴賤胥歡薰德而良善者有之以厚雖韋布草莽以世祿舊冑
屬國事可憂拳拳恩孝移思焉天啓甲子适反 仁祖狩公州
與靈光郡守臣元斗杓講討賊策二月共南中諸名士馳文九
都會邑大募義兵若穀其時事實在湖南募義錄故判書臣尹
鳳九文敬公臣金元行叙其事丁卯正月金人深入平山府
上幸江華先正臣文元公金長生爲號召使陪 世子分朝駐
全州倡士友起義以厚又與同志◎力募之會講和納穀 行
朝而退自此北警連歲以厚曰丈夫當爲國一死耳事載兩湖
募義錄庚辰丁丙艱以厚已逾五十矣毁于喪以歿後大祥纔
二十二日蓋以厚悃愊樂善有古人風孝于親矣友于弟矣末
乃不以古人之不毁而哀戚之過遂沒其世况其勤學重道潔
身昏朝微旨隱肰可觀乎至若前後義擧所樹立尢卓則雖未
暴著者壬丁殉國而其忠一也而尚未蒙 褒揚之典 昭代
之一大欠節是白遣世其生而秀偉性且穎悟五六歲便知讀
書七歲賦詩輒驚人于書讀不過三編能不忘幼未及過目者
應聲一覽立背誦終篇不錯故相臣李慶億自宰扶安甚體貌
焉志氣慷慨俯視流俗惡惡之心出於天賦以勇義自許以子
路自擬屬 孝廟盛際羣贒蔚興淸議方張世基雖處下邑亦
自奮發曰士生今日將以有爲若回互巽軟何以匡世益持風
裁激濁是務至於陰陽淑慝之分不容毫忍無謹而自念氣節
言議于當世儒賢惟先正臣文正公宋時烈有默契者平居嚮
慕之及己亥禮訟以來尊信彌篤乙卯春時事大變盖士禍作
於禮訟而各公鄕竄黜相續宋文正爲之首世基乃遯于逍遙
山有理桴將遠適之詩卒亦及禮禍焉殼肰自樹恬視叢鏑一
言不撓九死靡梅眞所謂銀山鐵壁者歟文簡公臣李敏叙來
寓縣庄人多爭先致欵世基懷寶㴱藏一不自衒李文簡欲就
見曰往來南中稔聞高義因和其詩對人未始不敬歎在遯六
年竟以疾歿計至隣里方大宴會爲之罷相帛四方聞者咸曰
儒林正氣喪矣故叅判臣李基敬亦以文章氣節稱之而 肅
宗戊子衘史臣黃啓夏褒請贈職至今寥寥殆同草亡木卒是
自遣其孫壥誠孝本天幼已過人其叔父載重嘗從文簡公臣
金昌協遊得聞性理之說而稍長就其叔父日聞所不聞自傷
八歲早孤准以一取上庠慰悅母心爲事必盡子職家貧母老
不得不俯就場屋自弱冠發解者凡七度而終躓春官其母患
痢面壁嘗糞夜必屏處祈天未嘗少懈及丁艱憂哭擗之節無
異嬰兒觀者爲之涕歎因廢擧業潛心經籍以文行表著學識
兼備被追臣別薦再擬郞望與故贊善臣文敬公金元行從遊
因托子焉以敬字說往復而金文敬曰老而好學愈益勤摯又
曰父子講學眞天下樂事其相詡之深盖可見矣故判書臣章
翼公朴師益謫居泰仁受知最㴱◎詩文便蒙獎計調侄子副
率臣大源曰黃斯文非遐士人物勉與之從遊與故叅議臣趙
瞰故副率臣楊應秀設講會于考巖書院依先正臣李縡所定
講儀於道峯書院舊行者迭相問難錄講義質于故相臣兪拓
基以爲常式又與故儒臣尹鳳九同講大學因與書礼往來有
所論學而恒以六經爲急其自勵行自小學擊蒙要訣以至宋
子書節要及心經近思錄性理大全諸書無不體驗服習以爲
家計故校理臣金文行曰從事實地工夫雖欲有羨而不可得
矣及門者胥皆悅服聞風者亦能與起如非壥學識之自天英
氣之邁人島能若是耶噫七八禮閘或被有抄而終未升上庠
屢擬卽望至蒙 天褒而終無及一命夫孝以本之學以成之
而鞱光晦彩未試其蘊實爲識者之慨歎是白遺胤矧世襲詩
禮懦染有素旣長師事故文敬公臣金元行專心玩賾遂成大
儒其學以小學爲本叅之以心經近思錄朱子大全沈潛反復
毫柝縷鮮終爲折衷六經務袪其疑所論大學經義及朱書劄
疑引東儒諸家發明之語訂以已見常於座右有箴曰不願爲
假道學又曰明誠兩進博約相叅又曰心要洪放文要審察皆
其沒身自警之語而又有性理註解典律補註究諸河洛心法
質之周官制度其目著曰勉聖學務實政恢公道崇敎化重儒
術收人才開言路塞倖門養廉耻錮貪贓各有條緒自成一家
之言至若太極之易義三元之曆法觸處融通旁及於九流百
家古今之成敗也人物之淑慝也學術之源委也憲章之沿革
也凡所記載沛肰若决江漢而東之海其師金文敬亟稱之曰
黃君之學言行必信文質相當眞湖南豪傑之士蓋詡其見道
眞而用力深也晾年造詣尤高蔚肰爲湖嶺間楷範遠近從學
者塡門盈堂胤錫終日正衣冠講論不怠和易之色溫厚之意
溢於酬酢動靜之際語默之間合於繩矩是以湖南人士一經
胤錫敎授退讓軗橾不屑爲矯厲之行由其直已無僞人之化
也篤替在 英廟朝錀臣以草萊遺隨擧擬叅奉歷試兩縣皆
有顯蹟仍又選入桂坊以其經術有餘也 英廟庚寅 命設
局修文獻備考朝議以胤錫諳鍊 國朝典故交口薦譽故相
臣金致仁特逹于 筵中遂蒙予亦曾聞之 聖褒而後因入
直 召詣 榻前 下詢大統曆法及仁安殿舊基 國初定
都地形累賜顧問發晩知之歎因 顧承旨臣趙暾曰予於今
日始得人枲又 問姓名三字曰予當銘念不忘又 問家世
何如趙暾對曰南中世族代有學行其父壥以經學別薦屢擬
卽望矣 上曰見其予可知其父逮乎 正廟朝円 文孝世
予 命竗簡宮僚故判書臣鄭景淳薦以韓柳文章冠富經綸
故承旨臣趙暾曰文學行誼世罕倫比及至丙午六月持 命
調外 召見慰諭而凄肰 顧大臣曰彼乃文章之士淳質之
人惜乎予未得使爲官僚也旣歿之八年戊午湖南儒生上章
請壬辰死事人追施 贈褒而引胤錫之言爲證曹例欲行查
本道 正廟特批曰故翊贊黃胤錫出入講席多資稓古予所
常加優待必不以無稓之言自其口發雖有問於道伯决知其
不如胤錫一言特 贈其人大哉 聖敎古語曰知臣莫如君
於乎其丹靑炳而日月昭也性至孝事父母極其愉婉在三霜
雖倉黃號擗儀節必自審愼無所遺失旣老且衰愈謹祭祀洞
洞肰躬執奠灌未嘗令子弟替行邁 英廟諱辰及其師金元
行忌日常齋居食素竟夕楸慕焉內實剛巖確有窆力偶過叢
祀神不降巫獨宿凶家鬼不嘯樑其守全義也適因海寇虛警
士民自相奔竄州郡不能禁獨全義一境鷄犬晏如故承旨臣
趙鎭宅語人曰今而後益知 朝家欲鎭定人心莫如收用人
望及其歿也以詩挽之睍彼南斗南河西道最尊惟公其庶幾
博約同所存故判書臣閔鍾顯謂南士曰向來朝議欲以黃翊
贊通南臺事未及而公先歿豈不惜乎其爲當世名碩之敬重
蓋可知也其流風餘韻播在州里被諸衿紳是以 純祖己丑
御史臣兪星煥行挆本道公議詳得其實跡及其復 命也以
本道儒學培養成就能以篤行勑躬爲先讀書明理爲重者有
如故翊贊臣黃胤錫學行遂深業有師承窮經自修嚴肰爲當
世之儒宗以 先朝則哲之明特加 獎拔至今炳炳塗人耳
目朮之今世實罕其倫此等之人特施 贈褒風勵多士之意
爲 啓則 命下廟堂乃有道査之擧其時遺臣朴永元所
啓亦與繡 啓一辭無異而 貤贈之典尙今闕焉此雖 困
家未遑之典士林之抑鬱久矣伏觀我 殿下崇贒好學山林
之儒賢 敦諭而致之草野之才學別抄而薦之雖旣歿之賢苟
有實德實行莫不隆褒而 贈秩焉臣矣身等遠伏海陬不勝
瞻天擯訟遂敢相率冒萬死呼龥於 淸蹕之下爲白去乎伏
乞 聖上覽察故將仕郞臣以厚之忠孝兼備處士臣世基之
文章氣節學生臣壥之經行文識翊贊臣胤錫之學問德行敎
是自良抑體 聖朝春遇之意 特命有司之臣 貤以美爵
顯示隆獎以崇 國家之風敎以與士林之觀感事伏蒙 天
恩爲白良結望良白去乎詮次 善啓向敎是事朢良白內卧
乎事是亦在謹
啓同治七年二月日
全羅道觀察使兼巡察使臣徐相鼎謹
啓爲相考事節到付吏曹 啓下關內節該三月十四日 幸
行敎是時上言 今該曹道査亦敎是置道內忠孝學行人及
狀頭姓名後錄文移詳査啓 聞向事關是白置有亦請褒事
體本自愼重行蹟虛實易致混淆而 特旨行會行會若是鄭
重其在對揚尤倍詳審多歧採探廣加考撫稭之邑報參以輿
論思節三人孝行六人學行一人另抄撮要開錄于後爲白去
乎并只 今該曹稟處爲白乎旀其餘各人事實未詳有難遽
議今姑置之是白遣杳探之際自致遲滯不勝惶恐緣由並以
謹具啓 聞
學行
一興德縣故將仕郞黃以厚卽叅贊淑卿八世孫僉正處中于
也幼有異質孝友篤至文藝夙就累魁鄕解及 光海朝隱跡
林皐嘯詠自娛雖在韋布草莾自以世祿舊冑一念憂 國眷
春焉思孝移思甲子适亂 大駕狩公州乃與元相國斗杓講
討賊之策其南中諸名士大募義兵其時事實載在於湖南募
義錄判書尹公鳳九叙其事丁卯金人深入平山府 上幸江
華先正臣文元公金長生爲號召使陪 世子分朝駐全州遂
倡士友又復起義會講和納穀于 行朝仍爲退歸自此北警
連歲公曰丈夫當爲國一死耳年逾五十遭其親喪哀戚逾莭
纔過終祥竟至奄死鄕人爲之立祠而祭酒洪公直弼撰丁亭
文具孫世基生而秀偉性且穎悟七歲能賦詩語輒驚人李相
國慶億開閻致款甚禮貌焉志氣慷慨義勇兼備自許以子路
時値 孝廟盛際羣賢蔚與亦自奮發曰士生今日將以有爲
若回互巽軟何以匡世當世儒賢◎先正臣文正公宋時烈有
默契者平居嚮慕之及己亥禮訟以來尊信彌篤乙卯士禍乃
遯于逍遙由有理桴將遠適之詩在遯六年竟以疾歿計至之
日隣里方讌飮爲之停◎四方聞者咸曰儒林正氣喪矣文學
行誼至登 繡薦世基之孫壥年甫八歲早喪嚴父奉養偏母
惟以一就上庠慰悅母心患痢嘗糞祈天未嘗安𢥌及丁艱憂
三秊哭擗一如視括之日而因廢擧業潛心經籍以文行表著
學識兼備八字至登追薦與贊善金公元行從遊金公嘗與書
曰老而好學愈益勤摯與叅議趙公暾副率楊公應秀講會於
考巖書院迭相問難質于兪相公拓基以爲常式又與判書尹
公鳳九同講大學校理金公文行貽書賀之曰聞見謝科入山
從事實地工夫雖欲有羨不可得矣當時諸賢若是推詡其子
胤錫師事文敬公金元行專心經學遂成大儒折衷六經註解
諸書易義曆法觸處◎通九流百家無所滯◎文敬公嘗稱之
曰黃君之學言行必信文質相當眞湖南豪傑之士替在 英
廟朝以草萊遺逸擧擬叅奉歷試兩縣皆在顯蹟選入桂坊至
于庚寅因領相金公致仁 筵奏召詣 榻前屢 賜顧問因
顧承旨趙公暾曰予於今日始得人矣 正廟朝判書鄭公
景淳以韓柳文章冠富經綸薦于朝及至丙午 特命調外
召見慰諭而凄肰 顧宰臣曰彼乃文章之士淳實之人 純
廟已丑至登 繡單 今本道行査亦與 繡啓一辭無異一
門經行四世趾美矜式於一道世所罕有其在褒獎實合 貤
贈是如爲白齊同治七年九月二十日封 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