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암 황영석 행장(黙菴黃永錫行狀)
공의 휘(諱)는 영석(永錫)이요 자(字)가 건조(建祚), 호는 묵암(默菴)이니, 성은 황씨로 평해인(平海人)이다. 우리 태조(太祖) 때에 양무공(襄武公) 휘 희석(希碩)(8世)이 계셨으니 바로 공의 18대 할아버지이시다. 7대를 전하여 휘 희남(禧男)(15世)이
병자호란(丙子胡亂)2) 뒤에
평창(平昌)3)으로부터
청안(淸安)4)에 사시다가 다시
용궁(龍宮)5) 새마을(新里)6)로 이거하셨다.
희남은 휘 승립(承立)(16世)을 낳으니 호는 신천(新川)이고, 어버이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7)에 거처하며 호랑이를 길들이는 기이함으로 효행의 소문이 났다.8) 6대를 지나서 휘 광철(光澈)(22世)은 벼슬이
중추부사9)였으며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는 휘 봉수(鳳秀)(23世)이시고, 할아버지는 휘 종주(鐘周)(24世)요 호가 월포(月浦)로 문필로 이름이 나셨다.
아버지는 의진(義鎭)(25世)이고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약포(藥圃)선생 후예로 창우(昌宇)의 따님이니 소학 책에 밝았고10) 부인의 깊은 덕을11) 갖추었는데 고종 계미(癸未) 1883년 10월 29일에 가곡리(佳谷里) 가곡리(佳谷里): 1)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12) 본댁에서 공을 낳으셨다. 공이 출생하시던 날 어떤 이가 명심보감을 가지고 와서 쌀을 바꾸기를 요청하매 모부인(母夫人)13)이 ‘방금 이 아이가 났는데 마침 기이한 일이로고!’하시면서 책과 쌀을 바꾸어 주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삼가서 별반 가르치지 않아도 6세에 탄당(坦堂) 김공(金公)14)에게 가서 글자를 애써서 해득하였는데 연장자들처럼 지혜로워 소학(小學) 책을 배우다가 하루는 글방 선생에게 말했다, ‘물 뿌리고 청소하는 쇄소(灑掃)를 한 뒤에는 천하가 태평한 것 같이 깨달으오니 주자(朱子)가 쇄소응대(灑掃應對)15)를 말한 바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기초가 됨은 과연 저를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선생이 감탄하여 말했다, ‘이 아이는 장차 점점 크게 진보함이 있으리라.’
일찍이 그 동생 영근(永根)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동생이 그릇 속의 남은 국물을 가리키면서 ‘어찌 다 깨끗이 비우지 않는가?’ 하자, 공이 움츠리면서 말했다, ‘그릇의 국물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우리 일상의 말과 행동에도 정갈하지 못한 종류가 많으니 모름지기 너는 남의 말을 잘 살펴서 듣고 선을 따르도록 해야 할지니 그런 일이 역시 많을 것이다.’
전에 1백냥의 돈을 어떤 사람에게 꾸어주었는데 그가 갚지 못하자
심경과 근사록(心經 近思錄)16) 두 권을 받고 채권을 무효로 해주고는17) 돌아와서 어버이께 아뢰었다, ‘이 책은 성인의 요결을 배울 만한 것이므로 금전의 방식으로 계산할 수 없으니 엎드려 원하오니 염려하지 마시기를 청하옵니다.’
기해 1899년에18)
어머니 상(喪)을 당해 너무 슬퍼한 것이 몸을 상하게 하여 예(禮)를 지나칠 정도였으니, 추운 겨울 동생 영근과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19)
우연히 도적을 만나 의복을 빼앗으려 하자 공은 옷을 벗어주며, 말했다. ‘이 동생은 나이 어리고 너무 추우니 옷을 벗으면 쓰러져 죽음을 면치 못하겠으니 압박하지 말기를 바라오.’ 말씀이 심히 간절하여 도적도 감동하고 놓아주었다.
경자 1900년 가을에 의당 박(毅堂 朴) 선생20)의 가르침을 듣고서 청풍(淸風)의 불산(茀山)으로 동생 영근과 함께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니 선생이 그 기이한 기량(器量)을 한 번 보고는 허락하였다. 을사 1905년에 문묘(文廟) 훼손에 박 선생이 국권의 회복을 위해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공이 죽도록 싸움터로 나아갔다가 함께 돌아왔고21), 공은 선생 문집 의당집(毅堂集)22)
후에 남은(南隱)의 거처에 사시는 지암(持菴) 김 선생23)을 찾아뵈니 선생이 공에게 말했다, ‘사람의 품성은 본래 선하지 않음도 없고 악이 기질의 병폐도 없는 것이다.’ 공이 자리를 피하면서 대답하였다, ‘풍조의 병은 기질의 해악보다 더욱 심합니다.’ 선생이 이르기를, ‘그대가 스스로 터득한 것인가?’물으니 대답하였다, ‘일찍이 유성재(柳省齋)24)의
문집에서 보았습니다.’ 선생이 감탄하면서, ‘그건 표절(剽竊)한 것은 아니로다.’ 하였다.
평소에 고요한 방에서 똑바로 앉아 낮에는 반드시
사모관대25)를 갖추었으니 단정치 못한 모습은 보인 적이 없으며, 책상의 서책은 정돈되고 어지럽게 흩트리지 않았다. 항상 심경과 근사록 같은 여러 책들을 두고 좌석 우측에는 ‘신기독(愼其獨)’과 ‘보만절(保晩節)’26)이라
게시하고서 천지사방(天地四方)27)으로
아침저녁 성찰하면서 거실에 편액을 거니, 일컬어 ‘묵암(默菴)’이라 하였다.
무릇 일체의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이나 남의 실수와 악행은 입에 언급하지를 않고 더욱 정성과 공경에 삼가며 스스로 더욱더 엄격하였으니, 비록 어려움에 시달릴지라도 평탄한 듯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짊을 구함[求仁]이란 사사로움을 제거하는 것인데, 받들고 물리치며 높이고 멀리함은28)
우리 의당(毅堂) 선생께서 평일에 가르치던 골자였으니 우리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하루는 왜졸(倭卒) 수십 패거리가 마을사람들을 노략질을 하자 모두들 도피하였으나 공은 홀로 의연히 저들을 대하여 앉았다. 저들이 넓은 소매 옷을 보고는 비난하면서, ‘이게 무슨 옷이오?’ 묻기에 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선대 임금님의 예복이오.’ 저들이 말했다, ‘어느 나라가 무슨 까닭으로 통제하오?’ 대답했다, ‘유학자가 예의를 지키는 바일 뿐이오!’
그때에 왕의 명령이라고 거짓으로 꾸며대는 자가 있으나 돌아볼 겨를이 없어 마치 그도 의리가 있는 것처럼 응수하거나 혹은 새로운 학문으로 유혹하여 ‘지금의 문화세계의 허다한 기교를 말하면서 인재(人才)를 개발한답시고 소위 유학(儒學)이라는 것은 썩어빠졌다’고 운운하기도 하였다. 공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수십 년 읽은 바가 다 허사란 말인가? 그대가 들은 바 그 까닭의 말을 해주기를 청하노라. 우리 유학은 다만 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 고금에 걸쳐서 하늘이 다하도록 잘못되는 일이 없는 도리29)이다.
저들은 소위 윤리를 멸하고 떳떳한 도리를 반대하며 경서의 파괴를 배우는 것들이니, 성인을 업신여기고 사람을 짓무르고 늪지대의 쏘는 독충들이다. 또 소위 기괴한 기술과 음탕한 기교로 더욱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유혹일 뿐이다.”
마을의 집안 여러 자녀들이 서교(西敎)30)를 범한 것은 소위 목사(牧士) 사제[主敎]라는 자들이 그 술책으로 감동시켜서 한 편의 성경(聖經)이라는 책으로 인함이었다. 공이 천천히 웃으며 ‘그 성(聖)이라는 것이 무슨 성인(聖人)인가’ 하면서 그 옳고 그름을 쪼개고 격파하여 혼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저들도 입을 다물고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某) 어른은 쇠와 돌(金石)처럼 대단히 투철하고 아주 치밀히31)
명석하여서 이교(異敎)가 유혹할 수 없다.”
아우 영근이 분가(分家)를 나자32)
어버이께 여쭈었다, “아우가 주리면 형이 어찌 홀로 배불리겠습니까? 몇 필지를 아우에게 더해 주시기 원합니다,” 그 돈독한 우애를 사람들이 되뇌게 되었다.
경술 1910년 가을 나라가 망한 소식을 듣고 서쪽을 향하여 애통하게 부르짖고 검을 만지면서 스스로 읊었다.
隆熙四年秋 융희4년 가을
杖釼讀春秋 지팡이와 칼 잡고 춘추 읽는데
華夷人獸界 화이(華夷)와 인수(人獸) 세상에는
白刃漂欲秋 칼날이 떠도는 가을이 오네.33)
또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다.
磨爾一片心 이 일편단심 갈아서
誓我百年心 내 마음 백년을 맹서커니
義利交錯地 의리와 이익 뒤섞인 데는
借爾快剖心 그 마음의 칼을 빌려 심장을 가르리.
그로서 칼은 은밀히 상자에 넣었다.
얼마 후에 의당 선생의 자결 소식34)을 듣고는 위패(位牌)를 차리고 통곡을 하고는 달려가 조문하고 상복을 입었다. 기미 1919년 고종 임금이 승하했을 때는 노세기(虜勢岐)에서35)
삼가 흰옷 입는 의논을 하니 공이 조선의 임금의 상례의 예전에 근거하여 백립(白笠)36)의
3년 예제(禮制)로서 하고 동지들을 이끌어 곡하는 반열(班列)을 실행하였다. 임금의 인산(因山) 37)
전에는 크고 작은 제사의 예를 폐하고 설날 차례도 정지하니 이웃 마을이 그렇게 따랐다.
갑자(甲子) 1924년 1월에 화재로 집에 간직한 집물(什物)이 다 재가 되었다. 공이 탄식하였다, “집의 재산 손실은 진실로 근심하지 않지만 대를 이어 간직해온 서적을 내 온전히 보전하지 못한 것이 심히 개탄스럽도다.” 공은 평소에 저작(著作)을 즐겨하지 않았는데 대개 있던 원고도 없어져서 아우 영근이 그 화재에서 남은 것들을 수집하고 그 후의 유적을 갖추도록 청하자 공은 만류하였다, “배워서 실행함이 귀할 뿐인데, 글을 무엇 하겠는가? 다만 가훈(家訓) 9편은 자손의 마음에 새기도록 폐(廢)하지 말게 하라.”
공은 갑작스런 병환으로 입을 다물고 정신이 어지러워 한마디도 남길 수가 없었으니 그렇게 이틀이 지나 편안히 눈을 감으시니, 갑자 1924년 2월 15일 술시(戌時)로 향년 42년이었다. 달을 넘겨 오두골[烏頭谷] 곤좌(坤坐)에 장사지내니 원근 각지의 선비들이 안타까이 슬퍼하였다. 배위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선비[士人] 석주(錫周)의 따님이니, 두 아드님을 두어서 장남 병룡(秉龍)(27世)과 차남 병도(秉道)이다.
\ 아아 공과 같은 이는 진실 온화하고 근실한 자태에 연원도 깊은 정도(正道)의 학문을 더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함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품으로 터럭만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였도다.
본성을 반성하고 살핀즉 고요히 본심을 잃지 않고 착한 성품을 길렀으니, 생각하는 듯 행동을 엄연히 성찰하여 자라고 펴져서 뛰어났으며, 두려워 조심함이 꾸준하였다. 비록 잠시 동안38)
옛 방도를 따를지라도39)
옛 사람들이 스스로 기약했던 한 방식에 따라 숭상하고 배척하며 받들고 물리치는 엄격함을 스승에게 배운 바를 확실하게 범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므로 도(道)가 망하는 아픔에서 칼을 어루만지던 시구(詩句)40)가
나온 것이다. 의연히 목숨을 버릴 뱃심의 변하지 않는 정신이 있었으니, 읽는 이로 하여금 낙담하지 말고 기가 죽지 않도록 깨우침이 아니겠는가.
애석하도다, 하늘이 수명을 더 주어 멀리 나아가게41)
했다면 유학자(儒學者)가 될 기대를 한 몸에 받도록 점쳐졌는데 그 재주 이뤘다 소리 못 듣고 하늘이 빼앗아 갔으니 어찌된 일인고? 이 어찌 맹자가 말한 소위 본성(本性)에는 명(命)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젊어서 불산(茀山)의 의당(毅堂) 문하에서 형제가 낭랑히 함께 공부할 때42)
둘이 난형난제(難兄難弟)였으니43)
그 행동과 말씨에 내가 감복한 것이 깊었고 또 오래였도다.
하루는 공의 아우 영근(永根)이 내게 와서 가장(家狀) 한통을 소매에서 꺼내주면서 말했다, “이는 돌아가신 형님의 짧은 삶의 대략이온데, 동문(同門)으로 덕 있는 선비들이 거의 세상 떠나시고 제 형님을 깊이 아는 분이 군(君)만한 분이 없으니 어찌 그 자취를 모아 말씀을 갖추어 들어내 주지 않겠소?” 옛 친구를 생각하면 끝내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위와 같이 채워서 총괄하고 간절한 그리움으로 이렇게 이르노라.
1926년 음력 3월 순흥 안재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