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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4 [2025/05/19 20:20] ssio2a-004 [2025/06/04 16:24]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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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묘대동보서(辛卯大同譜序) (1831년)=== ===신묘대동보서(辛卯大同譜序) (18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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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辛卯大同譜序\\ \_辛卯大同譜序\\
 生民所重莫大於表姓氏聯族䣊姓者祖宗之所自出而受某姓也氏者子孫之所由分 生民所重莫大於表姓氏聯族䣊姓者祖宗之所自出而受某姓也氏者子孫之所由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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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啇掌受姓立小史奠繫世氏姓世族顧何與於邦國之治而建官設職若是其重且複何 啇掌受姓立小史奠繫世氏姓世族顧何與於邦國之治而建官設職若是其重且複何
 也惟其一人之化推於一家家而族族而國國而至於化成天下氏族之於聖王之政不 也惟其一人之化推於一家家而族族而國國而至於化成天下氏族之於聖王之政不
-輕而重有如是者奚翅一人一家之私也昔遷固自其世起自重黎高頊歐陽公亦溯+輕而重有如是者奚翅一人一家之私也昔遷固自其世起自重黎高頊歐陽公亦溯
 而至於大禹可謂遙遙之華而苟究其本人孰無玄遠之緖吾黃之受姓其來亦遠矣按 而至於大禹可謂遙遙之華而苟究其本人孰無玄遠之緖吾黃之受姓其來亦遠矣按
 中國姓彙陸終之後封黃因氏陸終顓頊之玄孫顓項黃帝之孫而中國姓黃皆原於此 中國姓彙陸終之後封黃因氏陸終顓頊之玄孫顓項黃帝之孫而中國姓黃皆原於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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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dden> </hidden>
 \\ \\
 +<typo ff:'바탕'; fs:1em; lh:1.5em>
 \_신묘대동보서\\ \_신묘대동보서\\
 \_생민(生氏)에게 중요한 바는 성씨(姓氏)를 표시하고 족당(族黨)을 연합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 \\  \_생민(生氏)에게 중요한 바는 성씨(姓氏)를 표시하고 족당(族黨)을 연합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 \\ 
줄 44: 줄 45:
 \_사족(士族)의 가문(家門)에서 반드시 족보 닦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큰 계통의 실마리를 고금(古今)에 밝히고 친애(親愛)를 유구한 장래에 존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_사족(士族)의 가문(家門)에서 반드시 족보 닦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큰 계통의 실마리를 고금(古今)에 밝히고 친애(親愛)를 유구한 장래에 존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_주(周)나라의 제도는 사적(司啇)기관을 설치하여 받을 성(姓)을 관장하게 하고, 소사(小史)를 세워서 세대를 메는 것을 정했다. 씨성(氏姓)과 세족(世族)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슨 관계가 되기에 관직을 세워서 설치하는 것을 이와 같이 중요하게 여기고 또 중복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_주(周)나라의 제도는 사적(司啇)기관을 설치하여 받을 성(姓)을 관장하게 하고, 소사(小史)를 세워서 세대를 메는 것을 정했다. 씨성(氏姓)과 세족(世族)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슨 관계가 되기에 관직을 세워서 설치하는 것을 이와 같이 중요하게 여기고 또 중복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_오직 한 사람의 교화(敎化)가 한 가문(家門)에 물려지고 또 한 집에서 일족(一族)으로 확대되고 한 일족에서 나라로 확대가 되고 한 나라에서 천하를 교화(敎化)시키는데 이르게 된다. 씨족(氏族)이 성왕(聖王)의 정치에 있어서 가볍지 아니하고 중요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니 어찌 한 사람과 한 가문의 사사로움 뿐이겠는가.\\ +\_오직 한 사람의 교화(敎化)가 한 가문(家門)에 물려 지고 또 한 집에서 일족(一族)으로 확대되고 한 일족에서 나라로 확대가 되고 한 나라에서 천하를 교화(敎化)시키는데 이르게 된다. 씨족(氏族)이 성왕(聖王)의 정치에 있어서 가볍지 아니하고 중요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니 어찌 한 사람과 한 가문의 사사로움 뿐이겠는가.\\ 
-\_옛날에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가 스스로 자기네들의 세기(世紀)를 서술하되, 중려(重黎)씨에서 일어났다고 했고 (반고는 자기 조상을) 고욱(高)씨라고 했다.\\+\_옛날에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가 스스로 자기네들의 세기(世紀)를 서술하되, 중려(重黎)씨에서 일어났다고 했고 (반고는 자기 조상을) 고욱(高)씨라고 했다.\\
 \_구양수(歐陽修)도 역시 거슬러 올라가서 (자기 조상을) 우(禹)임금에 까지 소급시켰다. 이는 멀고먼 빛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근본을 궁구(窮究)한다면 사람이 누군들 먼 실마리(근거)가 없을 수 있겠는가.\\ \_구양수(歐陽修)도 역시 거슬러 올라가서 (자기 조상을) 우(禹)임금에 까지 소급시켰다. 이는 멀고먼 빛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근본을 궁구(窮究)한다면 사람이 누군들 먼 실마리(근거)가 없을 수 있겠는가.\\
-\_우리 황(黃)씨가 성(姓)을 받은 것은 그 유래가 또한 멀다. 중국의 성(姓)씨에 관해 엮은 책을 상고해 보건데、 육종(陸終)의 후예가 (황(黃)땅에 봉(封)하여서 그로 인해 성씨가 되었다육종은 전욱(顓頊)의 고손(高孫)이요 전욱은 황제(黃帝)의 손자이니, 중국의 성씨 황(黃)은 모두 여기에서 근원이 되었다.\\+\_우리 황(黃)씨가 성(姓)을 받은 것은 그 유래가 또한 멀다. 중국의 성(姓)씨에 관해 엮은 책을 상고해 보건데육종(陸終)의 후예가 황(黃)땅에 봉(封)하여서 그로 인해 성씨가 되었다.육종은 전욱(顓頊)의 고손(高孫)이요 전욱은 황제(黃帝)의 손자이니, 중국의 성씨 황(黃)은 모두 여기에서 근원이 되었다.\\
 \_우리 황씨의 선조도 역시 중국인이며 생각건대 그러면 우리 조상은 황제(皇帝)의 후예인가! 한(漢)나라 건무(建武)년간(25(二十五) ~ 54(五十四))에 휘(諱) 낙(洛)이라는 분이 비로소 동방으로 나와서 평해(平海)의 월송(越松)이란 곳에 거주(居住)하였다.\\ \_우리 황씨의 선조도 역시 중국인이며 생각건대 그러면 우리 조상은 황제(皇帝)의 후예인가! 한(漢)나라 건무(建武)년간(25(二十五) ~ 54(五十四))에 휘(諱) 낙(洛)이라는 분이 비로소 동방으로 나와서 평해(平海)의 월송(越松)이란 곳에 거주(居住)하였다.\\
-\_후에 아들 형제 세 사람이 있었으니 그 봉(封)한 것으로 인해서 그 관향(貫鄕)을 세웠는데、 나뉘어 기성(平海) 장수(長水) 창원(昌原)의 일가를 이루었다. 그래서 뿌리를 함께 한 그러한 정의(情誼)가 드디어 없어지게 되었다.\\+\_후에 아들 형제 세 사람이 있었으니 그 봉(封)한 것으로 인해서 그 관향(貫鄕)을 세웠는데나뉘어 기성(平海) 장수(長水) 창원(昌原)의 일가를 이루었다. 그래서 뿌리를 함께 한 그러한 정의(情誼)가 드디어 없어지게 되었다.\\
 \_소씨(蘇氏)의 족보 서(序)에서 말하기를 \\ \_소씨(蘇氏)의 족보 서(序)에서 말하기를 \\
 \_처음은 모두 한 사람의 몸둥이었다. 한 사람의 몸인데 갈려서 나중에는 길가는 사람 관계처럼 서로 모르는 사람 사이가 되었도다 라고 했다. 대개 이것은 세대가 오래 갈수록 그 친근한 것이 소원해진 것을 상심한 말이었으니 실로 우리 종중(宗中)의 오늘날도 이와 같이 되고 말았다.\\ \_처음은 모두 한 사람의 몸둥이었다. 한 사람의 몸인데 갈려서 나중에는 길가는 사람 관계처럼 서로 모르는 사람 사이가 되었도다 라고 했다. 대개 이것은 세대가 오래 갈수록 그 친근한 것이 소원해진 것을 상심한 말이었으니 실로 우리 종중(宗中)의 오늘날도 이와 같이 되고 말았다.\\
줄 59: 줄 60:
 \_묘갈(墓碣)이 비록 근거가 될만하다고는 하나, 이미 그 당위(當位)의 지석(誌石)을 묻은 것으로만은, 가히 의혹을 깨뜨릴만한 것은 못된다.\\ \_묘갈(墓碣)이 비록 근거가 될만하다고는 하나, 이미 그 당위(當位)의 지석(誌石)을 묻은 것으로만은, 가히 의혹을 깨뜨릴만한 것은 못된다.\\
 \_그런데 전대(前代)의 서로 전해오는 보첩(譜牒)의 기록을 버리고서, 후세에 의심을 일으킬 만한 논(論)을 따르고 있으니 너무 경솔하다는 비난이 없을 수 있겠는가. 두 가지 의혹사항을 서로 논란할만해서 족보 만드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니, 그리하면 중세의 아름다운 덕이나 드러난 문벌과 후손들의 파계(派系)가 장차 내세에 전달되지 못할까 걱정이다. \\ \_그런데 전대(前代)의 서로 전해오는 보첩(譜牒)의 기록을 버리고서, 후세에 의심을 일으킬 만한 논(論)을 따르고 있으니 너무 경솔하다는 비난이 없을 수 있겠는가. 두 가지 의혹사항을 서로 논란할만해서 족보 만드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니, 그리하면 중세의 아름다운 덕이나 드러난 문벌과 후손들의 파계(派系)가 장차 내세에 전달되지 못할까 걱정이다. \\
-\_내가 이것이 두렵고 걱정이 되어 두 분의 휘(諱)를 다 존치시켜서 합하여 한 족보를 이룰려 하노니 흥성(興城)의 종친은 혹시라도 나의 고심(苦心)을 양해할 수 있을 것인가.\\+\_내가 이것이 두렵고 걱정이 되어 두 분의 휘(諱)를 다 존치 시켜서 합하여 한 족보를 이룰려 하노니 흥성(興城)의 종친은 혹시라도 나의 고심(苦心)을 양해할 수 있을 것인가.\\
 \_가정에서 들은 바를 어기는 것만을 곤란하게 여겨서 기꺼이 통일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 누구는 누락되기도 하고 누구는 들어가는 자도 있기도 할 것이니 어찌 상심되고 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_가정에서 들은 바를 어기는 것만을 곤란하게 여겨서 기꺼이 통일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 누구는 누락되기도 하고 누구는 들어가는 자도 있기도 할 것이니 어찌 상심되고 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_저으기 생각해 보건대 옛 족보가 간행되기 이미 한 주갑(一周甲)이 지나서 생존해 남아있는 이가 몇 분이 안된다。 또 태어나는 사람들은 날로 번창하니 뒤 이어서 추가하여 족보를 넓혀서 그 전하는 것을 더욱 오래 가게 하는 것은 실로 이는 전대(前代) 사람들이 후대(後代) 사람들에게 희망하는 바였다.\\+\_저으기 생각해 보건대 옛 족보가 간행되기 이미 한 주갑(一周甲)이 지나서 생존해 남아있는 이가 몇 분이 안된다또 태어나는 사람들은 날로 번창하니 뒤 이어서 추가하여 족보를 넓혀서 그 전하는 것을 더욱 오래 가게 하는 것은 실로 이는 전대(前代) 사람들이 후대(後代) 사람들에게 희망하는 바였다.\\
 \_나 황도(黃燾)는 참람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부족하고 외람됨을 무릅쓰고, 병술(丙戌)(1826(一八二六))년에 서신을 발송하여 널리 알렸으니 도모하는 뜻이 여러 종친들에게 알려져 을축(乙丑)(1829(一八二九))년 겨울에 몇몇 종친들 『평해의 규(圭), 관(琯), 장단(長湍)의 주로(周老), 풍기의 헌주(獻周), 강릉의 지선(之璿), 춘천의 묵(默), 경(炅), 영흥(永興)의 승후(升厚), 간성(杆城)의 찬(瓚), 북청(北靑)의 승종(昇鍾) 등』이 북쪽에 모여서, 계보(系譜)를 수합하여 책을 엮었는데 삼년이 지나서야 능히 일을 마쳤다.\\ \_나 황도(黃燾)는 참람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부족하고 외람됨을 무릅쓰고, 병술(丙戌)(1826(一八二六))년에 서신을 발송하여 널리 알렸으니 도모하는 뜻이 여러 종친들에게 알려져 을축(乙丑)(1829(一八二九))년 겨울에 몇몇 종친들 『평해의 규(圭), 관(琯), 장단(長湍)의 주로(周老), 풍기의 헌주(獻周), 강릉의 지선(之璿), 춘천의 묵(默), 경(炅), 영흥(永興)의 승후(升厚), 간성(杆城)의 찬(瓚), 북청(北靑)의 승종(昇鍾) 등』이 북쪽에 모여서, 계보(系譜)를 수합하여 책을 엮었는데 삼년이 지나서야 능히 일을 마쳤다.\\
 \_상세히 기록하고 또 생략하는 것은 원래 첨부한 범례(凡例)를 한결같이 따랐고, 파보(派譜)에서 스스로 닦은 그 범례를 기준으로 하여 적당히 절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_상세히 기록하고 또 생략하는 것은 원래 첨부한 범례(凡例)를 한결같이 따랐고, 파보(派譜)에서 스스로 닦은 그 범례를 기준으로 하여 적당히 절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줄 74: 줄 75:
 \_\_숭정기원후 네 번째 신묘년(1831년(一八三一)년) 임월하순 \_\_숭정기원후 네 번째 신묘년(1831년(一八三一)년) 임월하순
 후손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도(燾)는 삼가 적는다. 후손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도(燾)는 삼가 적는다.
 +</typo>
 </WRAP> </WRAP>
a-004.1747653645.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9 20:20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