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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76

청주목사청재황공묘갈명(淸州牧使淸齋黃公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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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州牧使淸齋黃公墓碣銘
我仁廟盛世國家興隆文章達士傑然輩出而有若淸齋黃公亦名宰治績歟 公諱壽吉初諱榏字仲涉號淸齋平海人 仁祖祭未生性仁氣活善文行溫 孝友爲本早遊京師 肅宗乙卯中進士淸州牧使居官兼潔治政逸民當時 頌聲有傳於世於是乎可知家謨之垂範以德以爵應通神理者也卒肅廟丁 亥十一月二十五日壽六十五葬先公墓下庚坐配淑夫人全州李氏靑陵君 模女生甲申卒丙戌三月初七日壽六十三墓雙墳祔左黃氏之先漢學士
公洛始來東國麗朝太子撿校金吾將軍溫仁爲一世諱瑞金紫光祿大夫僉 議評理諡文節翊戴功陞縣爲郡名公巨卿繼世迫延綿入 李朝高祖居一 號明溪 贈工曹参議曾祖中信號魯庵生員遊鄭寒崗張旅軒兩門有學行 祖𨬔號竹覽生員司諫特 贈資憲大夫吏曹判書考永河號寶岡進士 肅 宗丙戌庭試文科修撰文義縣令妣淑夫人淸風金氏 贈右議政溝女噫公 之世已遠文献無傳可不惜哉公有一男仁默通德郞仁默男運東號竹林通 訓大夫永陵令運南運成運東男致萬致寬致發運南男致述字錫允號丹谷 通德郞明陵參奉運成男致進致萬男龍海麟海鶴海致寬男鵬海鯤海致發 男龜海致述男騮海馹海駿海鳳海致進男騏海餘不記俊孫萬洙斗煥與諸 族恐遺澤泯沒持世譜來余曰吾祖幽宅竪碣以表要其墓銘本非其人顧其 誠孝不敢辭以爲銘曰達于孝悌爲國忠誠治政淸德士民穩情兩門入學謙 讓修行佩印餘蹟由來頌聲豊碑有屹永世光明
  乙酉光復初己未至月吉明成均館典學光州盧漢容謹撰


청주목사(淸州牧使)인 청재(淸齋) 황공(黃公)의 묘갈명(墓碣銘)
 우리 인조대왕(仁祖大王)의 성세(盛世)에 국가가 융성(隆盛)하니 문장(文章)과 달통한 선비가 걸출(傑出)하게 배출(輩出)되었는데 청재(淸齋) 황공(黃公)같은 분도 또한 이름 난 수령(守令)으로 치적(治績)이 있지 않았는가.
 공(公)의 휘(諱)는 수길(壽吉)이나 처음 휘는 익(榏)이요 자(字)는 중섭(仲涉)이며 호(號)는 청재(淸齋)이니 평해인(平海人)이다.
 인조(仁祖) 21(二十一)년 계미(癸未) (1643(一六四三))에 출생 하였으니 성품이 어질고 기량(氣量)이 넓었으며 학문(學問)과 행의(行義)를 닦아 효도와 우애를 근본으로 하였으며 일찍이 서울에 유학하여 숙종(肅宗) 1(一)년 을묘(卯) (1675(一六七五))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그후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재임중 청렴결백(淸廉潔白)한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니 그 당시에 칭송되던 명성(名聲)이 세상에 전해오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가정에서의 깨우침이 수범(垂範)이 되어 덕행(德行)과 관작(官爵)에 신통(神通)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肅宗) 33(三十三)년 정해(丁亥)(1707(一七〇七)) 11(十一)월 25(二十五)일에 졸(卒)하니 65(六十五)세의 수(壽)를 누렸으며 선고공(先考公)의 묘 아래에 예장(禮葬)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니 청릉군(靑陵君) 모(模)의 따님이며 갑신년에 출생하여 병술년(1706(一七○六)) 3(三)월 초7(七)일에 졸(卒)하니 63(六十三)세의 수(壽)를 했으며 묘는 공(公)과 쌍분(雙墳)인데 왼쪽에 부장(祔葬)했다.
 황씨(黃氏)의 선대(先代)는 중국의 한(漢)나라 때에 학사공(學士公)이신 낙(洛)이 처음 동극(東國)에 왔으며 고려조(高麗朝) 때에 태자검교(太子檢校) 금오장군(金吾將軍)이었던 온인(溫仁)이 시조(始祖)가 되며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였고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며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어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격(陞格)하게 했으며 이름난 재상(宰相)과 고관(高官)이 대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 내렸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서 고조(高祖)인 거일(居一)은 호(號)가 명계(明溪)이며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증조(曾祖)는 중신(中信)이니 호(號)는 노암(魯庵)이며 생원으로서 정한강(鄭寒崗) 장려헌(張旅軒) 두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여 학문과 행의(行義)가 있었다.
 조부(祖父)는 연(𨬔)이니 호(號)는 죽람(竹覽)이며 생원(生員)으로 사간(司諫) 벼슬을 했고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品階)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아버지는 영하(永河)이니 호(號)는 보강(寶岡)이며 진사(進士)로서 숙종(肅宗) 32(三十二)년 병술(丙戌)(1706(一七○六))에 정시(庭試)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 벼슬을 거쳐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인 청풍김씨(淸風金氏)로서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된 구(溝)의 따님이다.
 아! 공(公)이 살던 세상은 벌써 멀어지고 문헌(文獻)도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지 않은가? 공(公)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인묵(仁默)인데 통덕랑(通德郞)이었고 인묵(仁默)의 아들 운동(運東)은 호(號)가 죽림(竹林)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영릉현령(永陵縣令)을 지냈고 다음은 운남(運南)과 윤성(運成)이다. 운동(運東)의 아들은 치만(致萬)과 치관(致寬)과 치발(致發)이며 운남(運南)의 아들은 치술(致述)인데 자(字)는 석윤(錫允)이며 호(號)는 단곡(丹谷)이고 통덕량(通德郞)의 품계(品階)로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운성(運成)의 아들은 치진(致進)이며 치만(致萬)의 아들은 용해(龍海)와 인해(麟海)와 학해(鶴海)이고 치관(致寬)의 아들은 붕해(鵬海)와 곤해(鯤海)이며 치발(致發)의 아들은 구해(龜海)이고 치술(致述)의 아들은 유해(騮海)와 일해(馹海)와 준해(駿海)와 봉해(鳳海)이며 치진(致進)의 아들은 기해(騏海)이고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후손(後孫) 만수(萬洙)씨 두환(斗煥)씨와 여러 친족이 공(公)이 후세에 남긴 은택(恩澤)이 없어질까 두려워서 세보(世譜)를 가지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님의 묘도(墓道)에 비석(碑石)을 세우려 하니 그 비에 표시할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는지라 본시 그것을 감당할 사람이 못되지만 그 효성을 생각하니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達于孝悌 효제(孝悌)에 통달하고
爲國忠誠 나라 위해 충성하며
治政淸德 청덕(淸德)으로 다스리니
士民穩情 선비와 백성들 마음이 편안했다.
兩門入學 정한강(鄭寒岡)과 장려헌(張旅軒) 두 문하에 유학하여
謙讓修行 겸양(謙讓)을 닦아 실행했다.
佩印餘蹟 수령(守令)이 되어 다스린 업적(業績)이 남아
由來頌聲 칭송하는 소리가 전해 온다.
豊碑有屹 큰 비(碑)를 높이 세웠으니
永世光明 영세(永世)토록 밝게 빛나리라.

  을유(乙酉)년 광복된 후 기미(己未)년(1979(一九七九)) 11(十一)월 초하룻날 성균관의 전 학(典學) 광주(光州) 노한용(盧漢容) 삼가 짓다.

b-076.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1 14:35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