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목사청재황공묘갈명(淸州牧使淸齋黃公墓碣銘)
청주목사(淸州牧使)인 청재(淸齋) 황공(黃公)의 묘갈명(墓碣銘)
우리 인조대왕(仁祖大王)의 성세(盛世)에 국가가 융성(隆盛)하니 문장(文章)과
달통한 선비가 걸출(傑出)하게 배출(輩出)되었는데 청재(淸齋) 황공(黃公)같은
분도 또한 이름 난 수령(守令)으로 치적(治績)이 있지 않았는가.
공(公)의 휘(諱)는 수길(壽吉)이나 처음 휘는 익(榏)이요 자(字)는 중섭(仲涉)이며
호(號)는 청재(淸齋)이니 평해인(平海人)이다.
인조(仁祖) 21(二十一)년 계미(癸未) (1643(一六四三))에 출생 하였으니 성품이 어질고 기량(氣量)이
넓었으며 학문(學問)과 행의(行義)를 닦아 효도와 우애를 근본으로
하였으며 일찍이 서울에 유학하여 숙종(肅宗) 1(一)년 을묘(卯) (1675(一六七五))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그후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재임중 청렴결백(淸廉潔白)한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니 그 당시에 칭송되던 명성(名聲)이 세상에
전해오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가정에서의 깨우침이 수범(垂範)이 되어 덕행(德行)과
관작(官爵)에 신통(神通)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肅宗) 33(三十三)년 정해(丁亥)(1707(一七〇七)) 11(十一)월 25(二十五)일에 졸(卒)하니
65(六十五)세의 수(壽)를 누렸으며 선고공(先考公)의 묘 아래에 예장(禮葬)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니 청릉군(靑陵君) 모(模)의
따님이며 갑신년에 출생하여 병술년(1706(一七○六)) 3(三)월 초7(七)일에 졸(卒)하니
63(六十三)세의 수(壽)를 했으며 묘는 공(公)과 쌍분(雙墳)인데 왼쪽에 부장(祔葬)했다.
황씨(黃氏)의 선대(先代)는 중국의 한(漢)나라 때에 학사공(學士公)이신 낙(洛)이
처음 동극(東國)에 왔으며 고려조(高麗朝) 때에 태자검교(太子檢校)
금오장군(金吾將軍)이었던 온인(溫仁)이 시조(始祖)가 되며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였고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며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어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격(陞格)하게
했으며 이름난 재상(宰相)과 고관(高官)이 대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 내렸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서 고조(高祖)인 거일(居一)은 호(號)가 명계(明溪)이며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증조(曾祖)는 중신(中信)이니
호(號)는 노암(魯庵)이며 생원으로서 정한강(鄭寒崗) 장려헌(張旅軒) 두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여 학문과 행의(行義)가 있었다.
조부(祖父)는 연(𨬔)이니 호(號)는 죽람(竹覽)이며 생원(生員)으로 사간(司諫)
벼슬을 했고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品階)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아버지는 영하(永河)이니 호(號)는 보강(寶岡)이며 진사(進士)로서
숙종(肅宗) 32(三十二)년 병술(丙戌)(1706(一七○六))에 정시(庭試)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 벼슬을 거쳐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인 청풍김씨(淸風金氏)로서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된 구(溝)의 따님이다.
아! 공(公)이 살던 세상은 벌써 멀어지고 문헌(文獻)도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지
않은가? 공(公)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인묵(仁默)인데 통덕랑(通德郞)이었고
인묵(仁默)의 아들 운동(運東)은 호(號)가 죽림(竹林)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영릉현령(永陵縣令)을 지냈고 다음은 운남(運南)과 윤성(運成)이다.
운동(運東)의 아들은 치만(致萬)과 치관(致寬)과 치발(致發)이며 운남(運南)의
아들은 치술(致述)인데 자(字)는 석윤(錫允)이며 호(號)는 단곡(丹谷)이고
통덕량(通德郞)의 품계(品階)로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운성(運成)의 아들은 치진(致進)이며 치만(致萬)의 아들은 용해(龍海)와 인해(麟海)와
학해(鶴海)이고 치관(致寬)의 아들은 붕해(鵬海)와 곤해(鯤海)이며 치발(致發)의
아들은 구해(龜海)이고 치술(致述)의 아들은 유해(騮海)와 일해(馹海)와 준해(駿海)와
봉해(鳳海)이며 치진(致進)의 아들은 기해(騏海)이고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후손(後孫) 만수(萬洙)씨 두환(斗煥)씨와 여러 친족이 공(公)이
후세에 남긴 은택(恩澤)이 없어질까 두려워서 세보(世譜)를 가지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님의 묘도(墓道)에 비석(碑石)을 세우려 하니
그 비에 표시할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는지라 본시 그것을 감당할
사람이 못되지만 그 효성을 생각하니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達于孝悌 효제(孝悌)에 통달하고
爲國忠誠 나라 위해 충성하며
治政淸德 청덕(淸德)으로 다스리니
士民穩情 선비와 백성들 마음이 편안했다.
兩門入學 정한강(鄭寒岡)과 장려헌(張旅軒) 두 문하에 유학하여
謙讓修行 겸양(謙讓)을 닦아 실행했다.
佩印餘蹟 수령(守令)이 되어 다스린 업적(業績)이 남아
由來頌聲 칭송하는 소리가 전해 온다.
豊碑有屹 큰 비(碑)를 높이 세웠으니
永世光明 영세(永世)토록 밝게 빛나리라.
을유(乙酉)년 광복된 후 기미(己未)년(1979(一九七九)) 11(十一)월 초하룻날 성균관의 전
학(典學) 광주(光州) 노한용(盧漢容)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