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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11 [2025/05/28 07:56] ssio2b-111 [2025/06/03 22:39]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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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술중간발(平海黃氏世譜甲戌重刊跋) 갑술중간발(平海黃氏世譜甲戌重刊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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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o ff:'한양해서'; fs:1.2em>+<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平海黃氏世譜甲戌重刊跋\\ \_平海黃氏世譜甲戌重刊跋\\
 余嘗讀蘇氏譜至孝悌之心油然而生歎曰吾黃之貫平海者自學士公始焉 余嘗讀蘇氏譜至孝悌之心油然而生歎曰吾黃之貫平海者自學士公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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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勇發設譜於貫鄕之意而專人致書貫鄕諸宗會同敦議通論各邑設役於月 勇發設譜於貫鄕之意而專人致書貫鄕諸宗會同敦議通論各邑設役於月
 松先齋實累百年未遑之事而皇祖儼臨雲仍傍列推之一本眞孝悌之心油 松先齋實累百年未遑之事而皇祖儼臨雲仍傍列推之一本眞孝悌之心油
-然者是也族叔萬英氏暨中坤甫巨細凡百無不監任誠竭力且其冷手殘+然者是也族叔萬英氏暨中坤甫巨細凡百無不監任誠竭力且其冷手殘
 枰主財主務事將就緖其幸也甚噫顧余蔑學參在讐校之列而不揣僭越畧 枰主財主務事將就緖其幸也甚噫顧余蔑學參在讐校之列而不揣僭越畧
 敍重刊顚末庸附于左\\ 敍重刊顚末庸附于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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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po ff:'바탕'; fs:1em; lh:1.5em> <typo ff:'바탕'; fs:1em; lh:1.5em>
 \_갑술중간발\\ \_갑술중간발\\
-\_내가 일찍이 蘇氏의 譜學을 읽다가 孝悌의 마음이 油然히 生한다는 句節에  +\_내가 일찍이 소씨(蘇氏)의 보학(譜學)을 읽다가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한다는 구절(句節)에  
-르러서 탄식하여 말하되 우리 黃氏의 貫鄕을 平海로 한 것은 學士公으로부터 +르러서 탄식하여 말하되 우리 황씨(黃氏)의 관향(貫鄕)을 평해(平海)로 한 것은 학사공(學士公)으로부터 
-비롯하여 金吾公이 中祖가 된 後로 三世를 지나서 檢校評理大匡의 三兄弟分이 +비롯하여 금오공(金吾公)이 중조(中祖)가 된 후()로 3세(三世)를 지나서 검교(檢校) 평리(評理) 대광(大匡)의  
-나누어 三派가 된 것이다 世代가 비록 멀어졌어도 그 처음은 또한 하나로 같다 +3형제분(三兄弟分)이 
-그동안 여러 차례 兵火로 文籍이 傳하지 못하고 派系의 증거가 없어 魯衛의 親함을 +나누어 3파(三派)가 된 것이다. 세대(世代)가 비록 멀어졌어도 그 처음은 또한 하나로 같다. 
-楚越 즉 더러저 상관이 없는 것같이 보고 왔은즉 吾宗間의 疏漏之感이 항상 그 +그동안 여러 차례 병화(兵火)로 문적(文籍)이 전()하지 못하고 파계(派系)의 증거가 없어 노위(魯衛)의 친()함을 
-極에 處해 있었다. +초월(楚越즉 떨어져 상관이 없는 것같이 보고 왔은 즉 오종간(吾宗間)의 소루지감(疏漏之感)이 항상 그 
-지나간 庚寅年에 譜廳을 豊基錦陽에 두어 드디어 一次完譜를 이룬 後로부터는 +극()에 처()해 있었다.\\
-累次敦睦함을 닦아왔으나 이는 다 錦溪海月兩先生의 草輯에서 始作된 것이다 +
-다시 壬申年 봄에 錦溪先生의 胄孫永來氏가 祖上을 밝히고 宗族을 보호할 큰 +
-뜻으로 平海大同譜를 修譜할것을 發議하여 通文을 平海와 各地方으로 보냈더니 +
-諸宗이 大擧하여 모여 合議를 보고 譜廳을 月松追遠齋에 設置하여 譜役을 始 +
-作하였다 이와같은 大同譜事는 百年에 한번 이루어지기 힘드는 일인데 先祖의 +
-靈魂의 가호로 꼭 祖上들이 臨存하시고 子孫들이 그 左右에 뫼시고 앉어 合心 +
-協力하는 느낌으로 譜事가 進行되어갔다 그럼으로 追遠齋에 오는 사람은 同宗 +
-누구나 다 孝悌의 마음이 油然히 우러남을 禁치 못하였다는 것이다. +
-그리고 族叔萬英氏와 同宗仲坤氏가 크고 작은 凡百事를 돌보아 誠力을 키우렸으며 +
-그들은 私經濟도 넉넉지 못한데 譜廳의 財政도 事務도 모두 두분이 도 맡다시+
  
-피하여 數年동안을 不顧家事하고 有終의 美를 거둘때까지 始終一貫하였으니 宗 +\_지나간 경인년(庚寅年)에 보청(譜廳)을 풍기(豊基) 금양(錦陽)에 두어 드디어 1차(一次) 완보(完譜)를 이룬 후(後)로부터는 
-中의 大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차(累次) 돈목(敦睦)함을 닦아왔으나 이는 다 금계(錦溪) 해월(海月) 양선생(兩先生)의 초집(草輯)에서 시작(始作)된 것이다. 
-嗚呼라 回顧하건덴 나와 같은 不足한 사람이 校正의 責任을 지고 執事의 一員으로 +다시 임신년(壬申年) 봄에 금계(錦溪) 선생(先生)의 주손(胄孫) 영래(永來)씨(氏)가 조상(祖上)을 밝히고 종족(宗族)을 보호할 큰 
-뒤따라왔으니 부끄러운 일이나 始末을 잘 안다는 핑계로 참함을 헤아리지 않고 +뜻으로 평해대동보(平海大同譜)를 수보(修譜)할 것을 발의(發議)하여 통문(通文)을 평해(平海)와 각지방(各地方)으로 보냈더니 
-重刊의 顚末을 大略記述하여 용하게도 序文末尾에 부치노라.\\+제종(諸宗)이 대거(大擧)하여 모여 합의(合議)를 보고 보청(譜廳)을 월송(月松) 추원재(追遠齋)에 설치(設置)하여 보역(譜役)을 시작(始作)하였다. 이와 같은 대동보사(大同譜事)는 백년(百年)에 한번 이루어지기 힘드는 일인데 선조(先祖)의 
 +영혼(靈魂)의 가호로 꼭 조상(祖上)들이 임존(臨存)하시고 자손(子孫)들이 그 좌우(左右)에 뫼시고 앉아 합심협력(合心協力)하는 느낌으로 보사(譜事)가 진행(進行)되어갔다. 그럼으로 추원재(追遠齋)에 오는 사람은 동종(同宗) 
 +누구나 다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우러남을 금(禁)치 못하였다는 것이다.\\ 
 + 
 +\_그리고 족숙(族叔) 만영(萬英)씨(氏)와 동종(同宗) 중곤(仲坤)씨(氏)가 크고 작은 범백사(凡百事)를 돌보아 성력(誠力)을 기우렸으며 
 +그들은 사경제(私經濟)도 넉넉지 못한데 보청(譜廳)의 재정(財政)도 사무(事務)도 모두 두 분이 도맡다시피하여  
 +수년(數年동안을 불고(不顧) 가사(家事)하고 유종(有終)의 미()를 거둘 때까지 시종일관(始終一貫)하였으니 종중(宗中)의 대행(大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_오호(嗚呼)라 회고(回顧)하건데 나와 같은 부족(不足)한 사람이 교정(校正)의 책임(責任)을 지고 집사(執事)의 일원(一員)으로 
 +뒤따라왔으니 부끄러운 일이나 시말(始末)을 잘 안다는 핑계로 참함을 헤아리지 않고 
 +중간(重刊)의 전말(顚末)을 대략(大略) 기술(記述)하여 용하게도 서문(序文) 말미(末尾)에 붙이노라.\\
 \_\_후예손(後裔孫) 휘(暉) 근발(謹跋) \_\_후예손(後裔孫) 휘(暉) 근발(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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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11.174838657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8 07:56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