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대동보서(壬寅大同譜序) (1902년)
임인대동보서
내가 풍기에서 금계(錦溪)선생의 종손(宗孫)인 선비 우진(宇鎭)씨와 인접해 살면서 대개 서로 세의(世誼)가 있어 친하게 터놓고 사는 사이 인지라 우의가 더욱 돈독했다.
금년 여름에 황씨(黃氏)가 금양정사(錦陽精舍)에 보소(譜所)를 설치하였음으로 어느 날 친구 여러 명과 함께 한가로움을 틈타 한 번 가보았다. 목판을 판각하는 기술공들이 마침 함께 모여 힘을 기울여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마침 그 정자 마루에 앉아 정자 아래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었는데 나무 둘레가 커서 몇 아름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고, 곧아서 몇 길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고, 또 가지가 높이 솟고 굽은 것이 마치 용(龍)이 춤추는 모양 같고 푸르고 울창하기가 연기와 구름이 뭉게 오르는 듯하였다.
대개 그 땅이 비옥하여 뿌리가 깊게 뻗었고 잎이 무성한 까닭이리라. 이를 보고 사람의 씨족도 역시 이와 같구나 하는 감회를 느꼈다.
황씨의 족보 닦는 역사(役事)가 거의 마침에 우진씨와 그의 삼종숙(三從叔)인 학주(鶴周)씨와 족친인 우영(友英)씨가 나에게 서문(序文) 한마디를 쓰라고 부탁하였다. 우영(友英)은 즉 해월(海月)선생의 후손이다. 우리 집과 대대로 사겨온 세의(世誼)가 두터웠음을 생각하니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문장에 능치 못하고 또 세대마다 많이 족보의 서문들이 있을 것인즉 내가 별다르게 할 말이 없겠고 마침내는 다른 서문들에 답습하는데 귀결되고 말 것이니 지난날의 정자 소나무에서 느낀 바를 비유하여 말하고자 한다.
아름답도다! 황씨의 족벌(族閥)이여!
학사공 휘(諱) 황낙(黃洛)은 중국에서 평해의 월송(越松)에 왔으니 이 정자의 소나무도 (풍기에 있는) 저 월송에 뿌리를 의탁해 두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대수(代數)가 바르게 나타나지 않아 형이 없어지고 동생이 그 자리를 차지함은 비록 옛날에도 바꿀 수 없는 법이었으니 이는 어느 집이고 가문들의 불행이다. 즉, 생각건대 마치 어린 소나무가 쑥대밭에서 곤궁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구나. 금오공(金吾公) 휘(諱) 온인(溫仁)은 여러 파(派)의 시조가 되니 이 소나무도 줄기가 쭉 뻗어 처음부터 크게 된 것이리라. 몇 대를 지나 검교(檢校)공 휘(諱) 진(璡), 평리(評理)공 휘 서(瑞), 대광(大匡)공 휘 용
(𤨭)에서 비로소 파가 나누어졌으니 이 소나무의 가지가 생겨 점차 무성하게 되었구나.
사예(司藝) 휘 근(瑾)이 강직한 절개로 이름이 났고, 판서(判書) 휘 유정(有定)이 맑은 덕(德)으로 들어 났고, 정언(正言)을 지낸 휘 정(玎)은 청백리(淸白史)에 기록되었고, 부윤(府尹) 휘 현(鉉)과 금계(錦溪) 휘 준량(俊良)과 대해(大海) 휘 응청(應淸)과 해월(海月) 휘 여일(汝一) 등 여러 선생들이 갖추어 모두 도덕 문장이 한 세대에 두드러졌다.
금계는 즉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우뚝한 제자였으니 이는 마치 이 소나무가 우뚝 서고 힘차서 용이 춤을 추는 것 같음과 비유할 수 있지 않는가.
목사(牧使) 휘(諱) 원로(原老)와 양무(襄武) 휘 희석(希碩)과 감찰(監察) 휘 계하(季夏) 선공정(繕工正) 휘 진손(震孫), 지평(持平) 휘 윤원(允元)과 정랑(正郞) 휘 윤형(允亨) 등 여러 군자들 모두가 과거(科擧) 갑과(甲科)에 올라 벼슬을 지내고 업적이 여러 대(代)에 드러났으며 그 후 벼슬한 이들이 부지기수였으니 이는 이 소나무의 울창함과 같지 않은가. 아! 선조의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았음은 마치 소나무가 흙이 비옥하여 뿌리가 깊은 것 같지 않겠는가? 자손들의 효도와 우애가 도탑고 친목함은 마치 소나무가 북돋움을 받아 좋은 영양을 취하고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족보세계(族譜世系)를 닦고 종중의 법을 세워서 천하의 인심을 섭렵한다고 했고, 소(蘇)씨는 말하기를 우리 족보를 보는 이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고 했으니 족보(族譜)를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선조들의 쌓은 덕(德)과 인(仁)을 이어받아 뒤를 이을 후손들에게 효도와 우애, 그리고 도타운 친목정신을 권면한다면 참으로 훗날에 번영이 창대(昌大)하리니 어찌 정자의 소나무가 천백년이 지나도록 더욱 무성하는 것과 비교될 뿐이겠는가. 족보 초간본 두 번째 발간의 시종(始終)내역은 황씨 보첩(譜牒)에 다 갖추어 있으므로 이제 다시 더 군더더기 말은 필요가 없을 터이니 다만 비유를 들어 황씨를 칭송하며 권면하는 바이다.
때는 임인(1902)년 8(八)월 상순
진성(眞城) 이중린(李中麟)1)은 삼가 짓는다.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신으로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1895년 음력 12월 이만도(李晩燾)를 의병장으로 하는 선성의진(宣城義陣)에 가담하였다. 부장(副將)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다가 1896년 2월에 의진이 해산되자 자신의 토지를 팔아 청량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규합하고 의진을 재정비하였다.
이중린은 김도현을 중군으로 삼고 7읍 연합의병진을 구성하여 태봉에서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같은 해 4월 이인화(李仁和)에게 의진의 지휘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