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c3-040

차이

문서의 선택한 두 판 사이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차이 보기로 링크

양쪽 이전 판이전 판
다음 판
이전 판
c3-040 [2025/05/12 08:31] 121.166.63.129c3-040 [2025/05/16 23:32] (현재) 121.166.63.129
줄 2: 줄 2:
 <WRAP 33em justify> <WRAP 33em justify>
 <typo ff:'한양해서'> <typo ff:'한양해서'>
-\_大海先生行狀\\ +\_**大海先生行狀**\\ 
-\_先生의 諱는 應이요 字는 之며 自號를 大海라 하다.  +\_선생(先生)의 휘()는 응청(淸)이요 자()는 청지(淸)며 자호(自號)를 대해(大海)라 하다.  
-高麗 僉議評理 諱 瑞의 後孫이다. 曾祖의 諱 玉崇은 漢城判官이요, +고려(高麗) 첨의평리(僉議評理) 휘() 서()의 후손(後孫)이다. 증조(曾祖)의 휘() 옥숭(玉崇)은 한성판관(漢城判官)이요, 
-祖의 諱 輔坤은 生員이요, 考는 諱 瑀는 通訓大夫 星州使이며,  +조()의 휘()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요, 고()는 휘() 우()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주목사(星州使)이며,  
-비는 三陟 金氏 諱 濱의 女이다. 嘉靖 甲申年에 先生이 나셨으며 +(妣)는 삼척(三陟) 김씨(金氏) 휘() 빈()의 여()이다.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에 선생(先生)이 나셨으며 
-어려서부터 特異한 稟質이 있어서 學을 좋아하고 힘쓰더니 +어려서부터 특이(特異)한 품질(稟質)이 있어서 학()을 좋아하고 힘쓰더니 
-壬子年에 進士試에 合格되었다가 庚申年에 別科에 入試하여 +임자년(壬子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되었다가 경신년(庚申年)에 별과(別科)에 입시(入試)하여 
-策文의 題目이 착하지 못한 말을 보고 對答하지 않고 退場하였다 한다. +책문(策文)의 제목(題目)이 착하지 못한 말을 보고 대답(對答)하지 않고 퇴장(退場)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門을 닫고 學業에 힘쓰며 德行을 닦으니 遠近 사람들이 +이로부터 문()을 닫고 학업(學業)에 힘쓰며 덕행(德行)을 닦으니 원근(遠近사람들이 
-모두 그 高尙한 人格에 稱頌이 藉藉하였다 한다. 이로 甲申年에 朝廷의 +모두 그 고상(高尙)한 인격(人格)에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한다. \\
-薦用으로 禮賓 參奉을 삼았으나 이에 赴任하지 않았으며 다시 +
-延恩殿 參奉을 除授하니 거듭 辭退할 수 없어 不得已 赴任하였다. +
-그러므로 위에는 特命하여 公으로 +
-하여금 朴淵 爆布 開城 一帶의 觀光을 任意로 鑑賞케 하는 特典을 +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甲午年에 掌樂院 別坐를 除授하였더니 +
-때마침 임금의 大駕가 義州로부터 돌아오니 先生은 스스로 +
-身分에 맞지 않음을 느껴 억지로 허리를 구부려 闕下에 나아가서  +
-四弊語를 글로서 올린 것이 甚히 切中하여 임금이 이를 즐겁게  +
-받아들이고 드디어 眞寶 縣監으로 뽑아 쓰는지라. 곧 +
-赴任하여 戰亂으로 흩어지고 도망한 百姓들을 모아 잘 撫摩하여  +
-再建하니 고을이 다시 完全히 回復되었더라. 그 後 辭職하고  +
-돌아와 正寢에서 考終하니 虎田壬坐에 葬事하였다.\\+
  
-\_先生의 人格은 忠孝가 出天하여 定省之와 旨甘을  +\_이로 갑신년(甲申年)에 조정(朝廷) 
-처음부터 끝까지 게르지 않고 平生을 한결같이 섬기매  +천용(薦用)으로 예빈(賓) 참봉(參)을 삼았나 이에 부임(赴任)지 않았으며  
-遠近 사람들이 平海 黃門에 文會이 새로 誕生고  +연은전(延恩殿)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니 거듭 사퇴(辭退)할 수 없어 부득(不得已) 부임(赴任)하였다. 
-稱頌이 藉藉하였다. 內艱喪을 當하니 呼天痛哭하는 중 피를  +그러므로 위에는 특명(特命)여 공(公)로 
-며 墓下에서 二年間을 蘆墓사리를 하는데 끝마치는  +하여금 박연(朴淵) 폭포(爆布) 개성(開城) 일대(一帶)의 관광(觀光)을 임의(任意)로 감상(鑑賞)케 하는 특전(特典)을 
-날까지 粥으로 生活하였다. 그러나 父親의 寢所는 루도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갑오년(甲午年)에 장악원(掌樂院) 별좌(別坐)를 제수(除授)하였더니 
-빠짐없이 매일 새벽 일찍이 問安드리고 內庭에는 들르는  +때마침 임금의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부터 돌아오니, 선생(先生)은 스스로 
-일이 없이 蘆幕으로 다시 다.\\+신분(身分)에 맞지 않음을 느껴 억지로 허리를 구부려 궐(闕下)에 나아가서  
 +사폐어(四弊語)를 글로서 올린 것이 심(甚)히 절중(切中)하여 임금이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드디어 진보(眞寶) 현감(縣監)으로 뽑아 쓰지라. 곧 
 +부임(赴任)하여 전란(戰亂)으로 흩어지고 도망한 백성(百姓)들을 모아 잘 무마(撫摩)하여  
 +재건(再建)하니 고을이 다시 완전(完全)히 회복(回復)되었더. 그 후(後) 사직(辭職)하고  
 +돌아와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니 호전(虎田) 임좌(壬坐)에 장사(葬事)하였다.\\
  
-\_그 後 시 外艱喪을 當하니 그 哀慕함이 前喪과 조금도  +\_선생(先生)의 인격(人格)은 충효(忠孝)가 출천(出天)하여 정성지례(定省之禮)와 지감봉양(旨甘奉養)을  
-다름이 없어 그 出의 至誠이 官民을 感動시켜 드디어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르지 않고 평생(平生)을 한결같이 섬기매  
-에서 나라에 그 孝誠을 狀啓하여 萬歷戊寅年 여 朝廷에서  +원근(遠近) 사람들이 평해(平海) 황문(黃門)에 문증(文曾)이 새로 탄생(誕生)하였고  
-先生을 孝子로 旌門을 세워 表彰하였다.\\+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내간상(內艱喪)을 당()하니 호천통곡(呼痛哭)하는 중 피를  
 +토(吐)하였으며 묘하(墓下)에서 2년간(二年間)을 여묘(蘆墓)살이를 하는데 끝마치는  
 +날까지 죽(粥)으로 생활(生活)하였다. 그러나 부친(父親)의 침소(寢所)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새벽 일찍이 문안(問安)드리고 내정(內庭)에는 들르는  
 +일이 없이 여막(蘆幕)으로 다시 올라갔다.\\
  
-\_先生은 天稟이 慎重여 그 言語와 動作이 사람으로 하여금  +\_그 후(後) 다시 외간상(外艱喪)을 당(當)니 그 애모(哀慕)함이 전상(前喪)과 조도  
-모르는 사에 머리가 수도록 하는 千萬斤의 무게가 있었다.  +다름이 없어 그 출천(出天)의 성(至誠)이 관민(官民)을 감동(感動)시켜 드디어  
-平素의 起居는 옛날 聖賢들의 참된 人生의 法度를 따라 澄潔한  +관(官)에서 나라에 그 효성(孝誠)을 장계(狀啓)여 만력(萬歷) 무인년(戊寅年)에 조정(朝廷)에서  
-一室에 端正히 앉아 항시 經書를 탐讀며 그 實踐에 힘썼다.  +선생(先生)을 효자(孝子)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하였다.\\
-室內 四壁上에는 聖句等을 써서 붙여 左右銘으로 삼았다.\\+
  
-\_또 詩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中의 한 句節을 紹介하면 \\ +\_선생(先生)은 천품(天稟)이 신중(愼重)하여 그 언어(言語)와 동작(動作)이 사람으로 하여금  
-黎羹栗飯養殘軀 여갱속반양잔구 명아주국 조밥에 늙은 몸이 修養되니\\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수그러지도록 하는 천만근(千萬斤)의 무게가 있었다.  
-晨起衣冠讀典謨 신기의관독전모 새벽녁에 일어나서 衣冠을 정제하니\\ +평소(平素)의 기거(起居)는 옛날 성현(聖賢)들의 참된 인생(人生)의 법도(法度)를 따라 징결(澄潔)한  
-莫道先生無用處 막도선생무용처 나홀로 옛사람의 범이 되었은 즉\\ +일실(一室)에 단정(端正)히 앉아 항시 경서(經書)를 탐독(耽讀)하며 그 실천(實踐)에 힘썼다.  
-一身都是一唐虞 일신도시일당우 선생은 나더러 쓸모없다 말을 마소. \\+실내(室內) 4벽상(四壁上)에는 성구(聖句) 등(等)을 써서 붙여 좌우명(左右銘)으로 삼았다.\\ 
 + 
 +\_또 시()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중()의 한 구절(句節)을 소개(紹介)하면 \\ 
 +黎羹栗飯養殘軀 (여갱속반양잔구명아주국 조밥에 늙은 몸이 수양(修養)되니\\ 
 +晨起衣冠讀典謨 (신기의관독전모새벽녁에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하니, 나홀로 옛 사람의 모범이 되었은 즉\\ 
 +莫道先生無用處 (막도선생무용처) 선생은 더러 쓸없다 말을 마소. \\ 
 +一身都是一唐虞 (일신도시일당우) 내 한몸은 도무지 당우(唐虞)와도 같아서.\\
 \\ \\
-\_내 한몸은 도무지 唐虞와도 같아서. +\_그 자득(自得)의 즐거움은 대개  
-그 自得의 즐거움은 대개  +이것으로서 가()히 생각(生覺)해 볼 일이다. 나이 많고 덕()이 높음에  
-이것으로서 可히 生覺해 볼 일이다. 나이 많고 德이 높음에  +원근(遠近) 학도(學徒)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훈회(訓誨)에게 으르지 않으며 
-遠近 學徒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訓誨에게 으르지 않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 4례(四禮)에도 밝아 깨닫기 어려운 대문을 잘 강론(講論)하며  
-冠婚喪祭 四禮에도 밝아 깨닫기 어려운 대문을 잘 講論하며  +이해(理解)케 하였으며,  
-理解케 하였으며 月川 趙先生 穆과 大庵 朴先生 惺과 같은  +월천(月川) 조() 선생(先生) 목()((조목(趙穆): 1524년 ~ 1606년.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이황(李滉)의 문인.))과  
-名士들과도 書疏로 往復하여 서로 닦고 행함을 같이하니  +대암(大庵) 박() 선생(先生) 성()((박성(朴惺):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菴). 박성림(朴成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박순(朴純)이고, 아버지는 생원 박사눌(朴思訥)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김연(金緣)의 딸이다. 배신(裵紳)에게 수학하고, 정구(鄭逑)를 사사하였다.))과 같은  
-鄕邑이 모두 따라 變化함에 사람들이 平海고을은  +명사(名士)들과도 서소(書疏)로 왕복(往復)하여 서로 닦고 행함을 같이하니 
-禮儀의 문이라 일컬었더라.\\+향읍(鄕邑)이 모두 따라 변화(變化)함에 사람들이 평해(平海고을은  
 +예의(禮儀)의 문이라 일컬었더라.\\
  
-\_先生이 斯文의 功이 이와 같이 크니 당시 平海에  +\_선생(先生)이 사문(斯文)의 공()이 이와 같이 크니 당시 평해(平海)에  
-귀양살이하던 鵝溪 李相國이 그 德行을 크게 慕悅하고  +귀양살이하던 아계(鵝溪) 이상국(李相國)이 그 덕행(德行)을 크게 모열(慕悅)하고  
-平常時 公의 德行에 關한 記錄을 읽고 얻음이 컸다 하니  +평상시(平常時) 공()의 덕행(德行)에 관()한 기록(記錄)을 읽고 얻음이 컸다 하니 
-先生이 이르기를 나는 學에 從事한 바 아니나 다만 내가  +선생(先生)이 이르기를 나는 학()에 종사(從事)한 바 아니나 다만 내가  
-動靜得失을 대강 얻었음이라 하고 비유하기를 비로 먼지를  +동정득실(動靜得失)((손자병법 허실편: 策之而知得失之計 일을 계획하여 득실(得失)의 계교를 안다. 作之而知動靜之理 일을 시작하여 동정(動靜)의 이치를 안다. (이하 생략) ))을 대강 얻었음이라 하고 비유하기를비로 먼지를  
-撓亂하게 쓸어붙이면 먼지가 쓴 것보다 더 일어나는 법이니 +요란(撓亂)하게 쓸어 붙이면 먼지가 쓴 것보다 더 일어나는 법이니 
 이와 같이 부산하게 쓸어서 먼지를 이와 같이 부산하게 쓸어서 먼지를
 일으키느니보다 오히려 쓸지 않아 먼지가 일어나지  일으키느니보다 오히려 쓸지 않아 먼지가 일어나지 
줄 72: 줄 75:
  
 \_또 비유키를 우물을 치는데 요란하게 물을 흔들어도  \_또 비유키를 우물을 치는데 요란하게 물을 흔들어도 
-오히려 우물이 더 濁하여지는 이보다는 우물을 가만히 두어 +오히려 우물이 더 탁()하여지는 이보다는 우물을 가만히 두어 
 스스로 맑아지는 것이 오히려 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스스로 맑아지는 것이 오히려 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_이와 같이 靜은 動보다 힘이 크다는 데 있음을 말하였다.  +\_이와 같이 정()은 동()보다 힘이 크다는 데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鵝溪가 嘆服하고 正明村記를 著述하여 스스로 깨우침으로  +이에 아계(鵝溪)가 탄복(嘆服)하고  
-했다. 先生은 靜으로서 神人合一의 神秘境을 깨달아 人間의  +정명촌기(正明村記)((정명촌기(正明村記): 조선 중기 이산해가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에 유배되어 있을 때 정명리에 사는 황응청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글.))를 저술(著述)하여 스스로 깨우침으로  
-德義의 道를 實踐하는데 새힘을 얻었던 것이다. 先生이 歿한  +했다. 선생(先生)은 정()으로서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신비경(神秘境)을 깨달아 인간(人間)의  
-뒤에 고을 사람들이 先生을 追慕하여 祠堂을 세우고  +덕의(德義)의 도()를 실천(實踐)하는데 새 힘을 얻었던 것이다. 선생(先生)이 몰(歿)한  
-俎豆로써 享祈하였다 한다.\\ +뒤에 고을 사람들이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여 사당(祠堂)을 세우고  
-\_\_鶴沙 金應祖撰+조두(俎豆)로써 향기(享祈)하였다 한다.\\ 
 +\_\_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김응조(金應祖): 1587년(선조 20) ~ 1667년(현종 8).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 17세 때 유성룡(柳成龍)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공조참의, 대사간, 한성부윤 등의 관직을 인조.효종.현종 3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찬()
 </typo> </typo>
 </WRAP> </WRAP>
c3-040.1747006301.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2 08:31 저자 121.166.63.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