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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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53 [2025/05/15 20:36] – ssio2 | c3-053 [2025/05/26 10:53] (현재) – 121.166.63.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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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諱) 유정(有定)의 제단비(祭壇碑)라. 단(壇) 위에 | 휘(諱) 유정(有定)의 제단비(祭壇碑)라. 단(壇) 위에 | ||
일대봉분(一大封墳)이 있고 봉분(封墳) 위 쪽에 한 작은 | 일대봉분(一大封墳)이 있고 봉분(封墳) 위 쪽에 한 작은 | ||
- | 봉분(封墳)이 있으니 세상(世上)에서 | + | 봉분(封墳)이 있으니, 세상(世上)에서 |
전(傳)하기를 공(公)의 분묘(墳墓)가 영주군(榮州郡) 동(東) 20리(二十里) | 전(傳)하기를 공(公)의 분묘(墳墓)가 영주군(榮州郡) 동(東) 20리(二十里) | ||
- | 예동(艾洞) 을좌원(乙坐原)에 있다 하고 맏아들 | + | 애동(艾洞) 을좌원(乙坐原)에 있다 하고, 맏아들 |
- | 지평공(持平公) 전(銓)의 묘(墓)가 그 위에 있다 하며 | + | 지평공(持平公) 전(銓)의 묘(墓)가 그 위에 있다 하며, 애동(艾洞)은 일명(一名) |
황분(黃墳) 고개라 하니 대개(大慨) 황공(黃公)의 분묘(墳墓)가 있음을 | 황분(黃墳) 고개라 하니 대개(大慨) 황공(黃公)의 분묘(墳墓)가 있음을 | ||
속칭(俗稱)한 것이다.\\ | 속칭(俗稱)한 것이다.\\ | ||
\_지금(至今) 그 동리(洞里) 이름과 봉분(封墳) 형용(刑容)이 완연(宛然)히 | \_지금(至今) 그 동리(洞里) 이름과 봉분(封墳) 형용(刑容)이 완연(宛然)히 | ||
- | 부합(符合)되니 이 큰 분묘(墳墓)는 공(公)의 묘(墓)요, 작은 분묘(墳墓)는 | + | 부합(符合)되니, 이 큰 분묘(墳墓)는 공(公)의 묘(墓)요 작은 분묘(墳墓)는 |
- | 지평공(持平公)의 묘(墓)라 하겠으나 비갈(碑碣)이 없으니 확증(確證)이 | + | 지평공(持平公)의 묘(墓)라 하겠으나, 비갈(碑碣)이 없으니 확증(確證)이 |
없다. 작은 봉분(封墳) 위에 쌍분(雙墳)이 있는 즉, 이는 외손(外孫)의 묘(墓)인 | 없다. 작은 봉분(封墳) 위에 쌍분(雙墳)이 있는 즉, 이는 외손(外孫)의 묘(墓)인 | ||
듯하다. 그러나 혹시 비갈(碑碣)을 타인(他人)이 뽑아버린 것이 아닌가 | 듯하다. 그러나 혹시 비갈(碑碣)을 타인(他人)이 뽑아버린 것이 아닌가 | ||
줄 25: | 줄 25: | ||
벼슬이 영해부사(寧海府使)요, | 벼슬이 영해부사(寧海府使)요, | ||
직제학(直提學)이라. 공(公)이 원(元)나라 지정(至正) 3년(三年) 계미년(癸未生)으로 | 직제학(直提學)이라. 공(公)이 원(元)나라 지정(至正) 3년(三年) 계미년(癸未生)으로 | ||
- |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중외윤(中外尹) 한성부판(漢城府判) | + |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중외(中外)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
예조형조전서(禮曹刑曹典書)를 역임(歷任)하셨다. 공(公)이 | 예조형조전서(禮曹刑曹典書)를 역임(歷任)하셨다. 공(公)이 | ||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논어(論語)를 애독(愛讀)하니 세상(世上) 사람들이 |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논어(論語)를 애독(愛讀)하니 세상(世上) 사람들이 | ||
- | 미균(米菌)이라 호칭(呼稱)하였고 또 시문(詩文)에 능(能)하여 | + | 미균(米囷)이라 호칭(呼稱)하였고, 또 시문(詩文)에 능(能)하여 |
- | 당인(唐人)의 시풍(詩風)이 있다 하였으며 | + | 당인(唐人)의 시풍(詩風)이 있다 하였으며, |
공(公)의 족손(族孫) 해월공(海月公)이 전(傳)해 들은 것을 기록(記錄)한 | 공(公)의 족손(族孫) 해월공(海月公)이 전(傳)해 들은 것을 기록(記錄)한 | ||
약간(若干)의 시문(詩文)이 있다 한다. 공(公)이 이조(李朝)에 와서는 | 약간(若干)의 시문(詩文)이 있다 한다. 공(公)이 이조(李朝)에 와서는 | ||
- |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고 사업(事業)과 | + |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고, 사업(事業)과 |
- | 문장(文章)이 가히 후세(後世)에 족(足)히 전(傳)함이 있었을 것이나 | + | 문장(文章)이 가히 후세(後世)에 족(足)히 전(傳)함이 있었을 것이나, |
- | 병화(兵火)를 여러번 치뤄서 가승(家乘)이 없어졌으며 과거(科擧)에 | + | 병화(兵火)를 여러번 치뤄서 가승(家乘)이 없어졌으며, 과거(科擧)에 |
급제(及第)한 것이 고려(高麗) 말(末)인지 | 급제(及第)한 것이 고려(高麗) 말(末)인지 | ||
이조(李朝) 초(初)인지는 적실치 않다. 그리고 세상(世上)에 남긴 유문(遺文)은 | 이조(李朝) 초(初)인지는 적실치 않다. 그리고 세상(世上)에 남긴 유문(遺文)은 | ||
오직 7언시(七言詩) 한 수(首)가 있을 뿐이니 슬프고 아깝도다.\\ | 오직 7언시(七言詩) 한 수(首)가 있을 뿐이니 슬프고 아깝도다.\\ | ||
- | \_公이처음에榮州에서살았는데子孫들이다음에豊基로옮겼으며公은李朝에高官이었고長子銓은學問과行檢으로持 | + | \_공(公)이 처음에 |
- | 平에薦拔되고次子鉉은文科에及第하여祭酒벼슬에오르고季子鋌은生員으로訓導벼슬을하였으며孫子와曾孫以下 | + | 다음에 |
- | 科宦이十餘人에이르렀고錦溪先生黃公俊良은公의後孫이요吏曹判書金公淡은公의外孫이다 | + | 고관(高官)이었고, 장자(長子) 전(銓)은 학문(學問)과 행검(行檢)으로 |
- | 많은後孫이豊基榮州兩郡에널리살고있으나世代가멀고墳墓가적실치아니하니어찌痛歎하지않으리요九世孫寒泉 | + | 지평(持平)에 천발(薦拔)되고, 차자(次子) 현(鉉)은 문과(文科)에 |
- | 公中衍이公을爲하여先塋圖를作成한것이위의記錄과같다하고또옛늙은이들이傳하는말이그렇다하나能히確實히 | + | 급제(及第)하여 |
- | 墳墓를가르키지못하였으며至今으로부터寒泉公의世代도이미二百年에가까웠으니이를將次누구에게疑心을풀으 | + | 벼슬에 오르고, 계자(季子) 연(鋋)은 생원(生員)으로 |
- | 今上甲辰閏三月에後孫들이累代先人들의遺志를받들어外孫인金若鍊으로더불어封墳을파보기로하고壙穴둘레의 | + | 하였으며, 손자(孫子)와 증손(曾孫) 이하(以下) |
+ | 과환(科宦)이 10여인(十餘人)에 이르렀고, 금계(錦溪) 선생(先生) | ||
+ | 황공(黃公) 준량(俊良)은 공(公)의 후손(後孫)이요, | ||
+ | 이조판서(吏曹判書) 김공(金公) 담(淡)은 공(公)의 외손(外孫)이다. | ||
+ | 많은 | ||
+ | 살고 있으나 | ||
+ | 어찌 | ||
+ | 공(公)을 위(爲)하여 | ||
+ | 기록(記錄)과 같다하고 또 옛 늙은이들이 | ||
+ | 그렇다 하나 | ||
+ | 분묘(墳墓)를 가르키지 못하였으며, 지금(至今)으로부터 | ||
+ | 한천공(寒泉公)의 세대(世代)도 이미 | ||
+ | 가까웠으니 이를 | ||
- | 今上甲辰閏三月에後孫들이累代先人들의遺志를받들어外孫인金若鍊으로더불어封填을과보기로하고壙穴둘레의 | + | \_금상(今上) 갑진(甲辰) 윤3월(閏三月)에 후손(後孫)들이 |
- | 封墳을파헤쳐보았으나一片誌石도얻지못하고여러後孫들이서로울며이르되恨스럽도다封墳이크고墓庭範節이士 | + | 누대(累代) 선인(先人)들의 |
- | 庶人의힘은 아닌것같고樵童農夫가모두黃氏墳墓라傳하여自然口碑가되었거늘어찌처음誌石을묻지않았으리요이 | + | 김약련(金若鍊)으로 더불어 |
- | 는우리들의精誠이不足하여誌石을찾지못함이아니겠는가그러나오랜墳塋을더以上파헤칠수도없고이에더掘破한 | + | 광혈(壙穴) 둘레의 |
- | 다는것은 오히려神靈이편치못할것이라하고다시改封築하여完全復舊하였다그리고墓前階下에壇을쌓아서位牌를 | + | 봉분(封墳)을 파헤쳐 보았으나, 일편(一片) 지석(誌石)도 얻지 못하고 |
- | 세우고享祀를올려서百世後에傳하도록할뿐이라하였다 | + | 여러 |
- | 진실로이같이精誠을다하면地下에계시는神靈이地上까지흠향할것이요하물며이墳墓가우리先祖의墳塋임은確適 | + | 봉분(封墳)이 크고 |
- | 히微驗은얻지못하였으나옛날文籍을상고한즉이山中에있는것은틀림없는일이니設壇하고香火를받들면무슨疑問 | + | 힘은 아닌 것 같고, 초동(樵童) 농부(農夫)가 모두 |
- | 이생기겠는가하고드디어階下에築壇하여祭奠을갖추고貞夫人奉化鄭氏를配位로하며持平公을아래자리에붙여서 | + | 전(傳)하여, 자연(自然) 구비(口碑)가 되었거늘, 어찌 |
- | 祭祀를올리게하니諸孫들이차례로서서祭禮를行한후에서로이르되自今以後로一年一次의歲祭를 드리게된것은情 | + | 처음 |
- | 禮에마땅한것이나앞으로곧標石올세우고이事由를새겨두기로했다 | + | 부족(不足)하여 |
- | 그後十五年이지나서己未年여름에돌을깍아장차새기고자하여金若鍊에게記錄을쓰라하니若鍊이吏判金公의後裔 | + | 오랜 |
- | 요또한封墳을微驗한일과築壇한公議를들은바있으므로내가어찌못한다하여사양할수있겠는가大略顛末을적어이 | + | 굴파(掘破)한다는 것은 오히려 |
+ | 다시 | ||
+ | 묘전(墓前) 계하(階下)에 단(壇)을 쌓아서 | ||
+ | 세우고 | ||
+ | 할 뿐이라 하였다.\\ | ||
- | 外裔孫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宣城金若練謹撰 | + | \_진실로 이같이 정성(精誠)을 다하면 지하(地下)에 계시는 신령(神靈)이 |
+ | 지상(地上)까지 흠향할 것이요. 하물며 이 분묘(墳墓)가 우리 선조(先祖)의 | ||
+ | 분영(墳塋)임은 확적(確適)히 징험(微驗)은 얻지 못하였으나, | ||
+ | 옛날 문적(文籍)을 상고한 즉 이 산중(山中)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 ||
+ | 일이니, 설단(設壇)하고 향화(香火)를 받들면 무슨 의문(疑問)이 | ||
+ | 생기겠는가 하고 드디어 계하(階下)에 축단(築壇)하여 제전(祭奠)을 | ||
+ | 갖추고, 정부인(貞夫人) 봉화(奉化) 정씨(鄭氏)를 배위(配位)로 | ||
+ | 하며, 지평공(持平公)을 아래 자리에 붙여서 | ||
+ | 제사(祭祀)를 올리게하니, | ||
+ | 행(行)한 후에, 서로 이르되 자금(自今) 이후(以後)로 | ||
+ | 1년(一年) 1차(一次)의 세제(歲祭)를 드리게 된 것은 정례(情禮)에 | ||
+ | 마땅한 것이나, 앞으로 곧 표석(標石)올 세우고 이 사유(事由)를 | ||
+ | 새겨 두기로 했다.\\ | ||
+ | |||
+ | \_그 후(後) 15년(十五年)이 지나서 기미년(己未年) 여름에 | ||
+ | 돌을 깍아 장차 새기고자 하여 김약련(金若鍊)에게 기록(記錄)을 | ||
+ | 쓰라하니, | ||
+ | 또한 봉분(封墳)을 징험(微驗)한 일과 축단(築壇)한 공의(公議)를 | ||
+ | 들은 바 있으므로, | ||
+ | 대략(大略) 전말(顚末)을 적어 이와 같이 이르노라.\\ | ||
+ | \_\_외예손(外裔孫)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선성(宣城) 김약련(金若練) 근찬(謹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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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53.174730896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5 20:36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