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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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23 [2025/06/07 15:27] – ssio2 | c32-023 [2025/06/09 09:35]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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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황씨의 선대는 중국의 강하인(江夏人)이다. 동한(東漢) 건무(建武) 4(四)년에 배를 | \_황씨의 선대는 중국의 강하인(江夏人)이다. 동한(東漢) 건무(建武) 4(四)년에 배를 | ||
타고 동쪽으로 건너와 평해(平海)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으니 이분이 평해황씨(平海黃氏)의 | 타고 동쪽으로 건너와 평해(平海)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으니 이분이 평해황씨(平海黃氏)의 | ||
- | 시조가 된다.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유증(裕中)이 용(墉)을 낳으니 | + | 시조가 된다.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유증(裕中)이 용(𤨭)을 낳으니 |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이며, |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이며, | ||
조에 들어와 태종대왕 때 휘 우(祐)가 있으니 병조전서(兵曹典書) 증 좌의정이며, | 조에 들어와 태종대왕 때 휘 우(祐)가 있으니 병조전서(兵曹典書) 증 좌의정이며, | ||
- | 천계(天繼)를 낳으니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냈다. 이로부터 후에는 관직에 오름 | + | 천계(天繼)를 낳으니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냈다. 이로부터 후에는 관직에 오름이 |
- | 이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 + |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
\_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인데, | \_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인데, | ||
줄 16: | 줄 16: | ||
\_고조(高祖)의 휘는 순남(舜南)이요, | \_고조(高祖)의 휘는 순남(舜南)이요, | ||
- | 구석(九錫)이다. 고의 휘는 대진(垡鎭)이며 호는 운포(雲圃)이다. 비(妣)는 | + | 구석(九錫)이다. 고의 휘는 대진(垈鎭)이며 호는 운포(雲圃)이다. 비(妣)는 |
- | 수성나씨(壽城羅氏) 사인(士人) 만수(萬洙)의 따님인데 유가(柔嘉)하고 정예(貞嫣)하여 | + | 수성나씨(壽城羅氏) 사인(士人) 만수(萬洙)의 따님인데 유가(柔嘉)하고 정예(貞嫕)하여 |
부인의 덕에 배합되어 어김이 없었다. 인조 계유(1633(一六三三))생 이시다.\\ | 부인의 덕에 배합되어 어김이 없었다. 인조 계유(1633(一六三三))생 이시다.\\ | ||
줄 23: | 줄 23: | ||
5~6(五・六)세가 되어 무리지어 놀 때에 위태한 일은 하지 않았고 웃으며 물러서며 | 5~6(五・六)세가 되어 무리지어 놀 때에 위태한 일은 하지 않았고 웃으며 물러서며 | ||
말하기를 「만약 패함에 이르러도 신체를 훼손할 수 없다. 신체를 상하게 되면 부모님은 | 말하기를 「만약 패함에 이르러도 신체를 훼손할 수 없다. 신체를 상하게 되면 부모님은 | ||
- | 어떠하겠는가? | + | 어떠하겠는가? |
들었고, 일찍이 응하(應夏)에게 수업함에 문의(文意)의 지름길을 잃지 않았다. | 들었고, 일찍이 응하(應夏)에게 수업함에 문의(文意)의 지름길을 잃지 않았다. | ||
줄 32: | 줄 32: | ||
\_일찍이 스스로 이르기를 「학문(學問)하는 것은 여력(餘力)으로 하는 일이요. | \_일찍이 스스로 이르기를 「학문(學問)하는 것은 여력(餘力)으로 하는 일이요. | ||
- | 자력(自力)으로 농사지어 집안을 넉넉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 + | 자력(自力)으로 농사지어 집안을 넉넉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
했다. 과업(科業)을 겸하여 일찍이 여러번 향리에서 벗어났으나 이롭지 않았고, | 했다. 과업(科業)을 겸하여 일찍이 여러번 향리에서 벗어났으나 이롭지 않았고, | ||
도성(都城)에서는 관직과 벼슬을 훔친 것을 인정하니, | 도성(都城)에서는 관직과 벼슬을 훔친 것을 인정하니, | ||
줄 55: | 줄 55: | ||
나아가 스스로 만족해 하며 작은 집을 낙동강 가에 지어 늘그막의 휴식처로 삼았다.\\ | 나아가 스스로 만족해 하며 작은 집을 낙동강 가에 지어 늘그막의 휴식처로 삼았다.\\ | ||
- | \_고종 신묘(1891(一八九)一)에 우로전(優老典)이 있어 공께 통정(通政)의 품계가 내려졌고, | + | \_고종 신묘(1891(一八九一)에 우로전(優老典)이 있어 공께 통정(通政)의 품계가 내려졌고, |
기축(1889(一八八九))에 병환이 들어 6(六)월 16(十六)일에 졸하니 수(壽) 77(七十七)세였으며, | 기축(1889(一八八九))에 병환이 들어 6(六)월 16(十六)일에 졸하니 수(壽) 77(七十七)세였으며, | ||
현공산(玄空山) 곤좌(坤坐)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배(配) 숙부인(淑夫人)은 | 현공산(玄空山) 곤좌(坤坐)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배(配) 숙부인(淑夫人)은 | ||
줄 62: | 줄 62: | ||
상구(相九)·영구(永九)·형구(亨九)며, | 상구(相九)·영구(永九)·형구(亨九)며, | ||
상구의 사자(嗣子)는 병창(昞昶)이다. 영구의 남 병창은 출계했고 다음은 병주(昞柱)며, | 상구의 사자(嗣子)는 병창(昞昶)이다. 영구의 남 병창은 출계했고 다음은 병주(昞柱)며, | ||
- | 김성경(金聖經)·박승수(朴勝洙)·권태규(權泰奎)·정병락(鄭屏洛)이다. 형극의 사자(嗣子)는 | + | 김성경(金聖經)·박승수(朴勝洙)·권태규(權泰奎)·정병락(鄭屏洛)이다. |
- | 병숙(昞淑)이며, | + | 형구의 사자(嗣子)는 병숙(昞淑)이며, |
- | 병창의 남은 | + | 병창의 남은 |
안충모(安春模)·박기섭(朴基燮)·윤복희(尹復熙)·김지한(金智漢)이다. 병주의 남은 | 안충모(安春模)·박기섭(朴基燮)·윤복희(尹復熙)·김지한(金智漢)이다. 병주의 남은 | ||
학기(鶴起)·용기(龍起)·봉기(鳳起)며, | 학기(鶴起)·용기(龍起)·봉기(鳳起)며, |
c32-023.174927767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15:27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