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보총편(世譜總編)
평해황씨세보
평해군(平海郡)동으로 해안(海岸)에 이르기 까지 7리(七里)이고, 남으로 경북 영덕 군계(郡界)에 이르기 까지 24리(二十四里)요, 서쪽으로 영양
군계(郡界)에 이르기 까지 51리(五十一里)요, 북으로 울진 군계에 이르기 까지 38리(三十八里)요, 경도(京都)에 거리는 971리(九百七十一里)이다.
본래는 고구려 척을(斥乙)이었는데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군(郡)으로 하였다. 현종 때 예주(禮州)에 귀속 시키었고 명종 2(二)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 때 고을사람 황서(黃瑞)가 왕을 쫓아 원나라에 들어가 익대공신이 된 일이 있어서 현을 승격하여 군으로 하였다.
본조(本朝)에서 그로 인해 군수의 관원을 두었다.
시조
황낙(黃洛)
평해지(平海誌)에 말하기를 신라조에 황장군(黃將軍)과 구장군(丘將軍)이라고 일컬은 사람이
있었으니 동해로 배를 타고 월송(越松)으로 와서 굴산(崛山) 동쪽 언덕의 동쪽가 사안(沙岸)에
살았는데 산을 만들어 결함이 있는 곳을 보충하였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황장군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대개 고을 사람으로서 성을 황씨로 하는 자는 다 이분을 비조로 하였다. 또 고사(故事)
를 상고하면 이르기를 한나라 광무황제 건무(建武) 4(四)년에 학사 황낙(黃洛)과 구공(丘公)
대림(大林)이 동국에 처음 거주하였으니 후세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삼형제가 있었는데
갑고는 기성군이 되었고 을고는 장수군이 되었으며 병고는 창원백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대개 군지에 기록한 것에서 나왔고 고사에는 그 연기(年紀)와 성휘(姓諱)와 직명(職名)이
자상히 기록되었으니 이것이 믿을만한 사적이나 다만 학자라고 칭한 것이 한조(漢朝)에는
없었으니, 생각하건대 옛 사람들이 문학을 하는 선비를 학사라고 이르는 까닭에 인해 칭호를 한
것인가. 지나간 구보(舊譜)에서는 이것을 신적(信蹟)으로 하였으나 오리려 의심을 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응교 초곡공 황계옥(黃啓沃) 가첩에 이르기를 당나라 고종 용삭(龍朔) 8(八)년을 신라 문무왕
8(八)년 무진이니 공이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과 더불어 같이 동국(東國)에 들어왔는데 공은
즉 이세적의 사위이다. 공이 인해 예국(穢國) 기남(箕南) 바닷가에 거주하였으니 지금
기성현이다.
자손이 이곳에 살았고 공은 국학진사(國學進士)가 되었다. 예(穢)는 즉 강릉(江陵)이요 기(箕)는 즉 기성현(箕城縣임 〇응교공 가첩에 그
연기와 성휘와 직명을 역시 자상히 기록되었는데 학사의 직함은 당조(唐朝)에 비로소 있었다.
또 이것은 자손의 집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것이다. 이것이 신적(信蹟)인 것 같으니 가히 믿어
의심할 것이 없다.
상세(上世)로 부터 유허(遺墟)(: 선조가 사시던 빈 터이다)에 단을 만들고 해마다 10(十)월
중정(中丁)(: 한달에 정일(丁日)이 세번 드는데 그 가운데 정일)에 여러 자손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받드는데 그 축문에 가로대
「처음 기향(箕鄉)을 본관으로 하시어 백대의 종조(宗祖)(: 으뜸가는 할아버님이란 것이니 즉 시조란 뜻)가 되시었읍니다. 단장(壇場)이 엄연히 있어 보답함을 게을리 함이 없아옵니다」라고 하였다.
단소에 옛날에는 비석도 없고 제전(祭奠)도
없었는데 숭정(崇禎) 재 갑술년에 풍기 평해 청안에 사는 종인(宗人)이 건의(建議)하야여 비를
세우고 밭을 마련하였다.
〇축문을 고쳐 가로대 「황조고(黃祖考) 한학사(漢學士) 부군이시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중국 조정의 옥을 찬 관인(官人)으로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오시어 능히 기초를 개척하시고 능히 자손이 번창하게 하시어 만대의 종조(宗祖)가 되시었읍니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어 서글프고 슬프오니 감동하여 사모하는 마음 끝이 없아옵니다. 삼가 맑은 술과 여러가지 음식으로 공경히 세사(歲事)(: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일)를 올리오니 황조비께서도 부식(附食)하시어 흠하시기를 원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