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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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초황공(鶴樵黃公) 송성기적비문(頌誠紀績碑文) | + | ===학초황공(鶴樵黃公) 송성기적비문(頌誠紀績碑文)=== |
- |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길、「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하였음은 | + | <WRAP 37em justify> |
- | 대개 정중대소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세상만사가 덕을 쌓지 않고서는 성가할 수 | + | <typo ff:' |
- | 가 없나니 쌓은 것이 착하면 복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 함이라. 불영이 이제 | + | \_**학초황공(鶴樵黃公) 송성기적비문(頌誠紀績碑文)**\\ |
- | 초공(鶴樵公)의 가장을 보고 공의 선대(先代)가 경영함이 흡족함과 행의의 독실함이 | + | \_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길,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하였음은 |
- | 이와같았음을 알겠노라. 상고하건데 공의 휘는 병규(昞圭)요 자는 복여(復汝)니 | + | 대개 정중대소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세상만사가 덕을 쌓지 않고서는 성가할 수가 |
- | 호(自號)를 학초(鶴樵)라 하였다. | + | 없나니 쌓은 것이 착하면 복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 함이라. 불영이 이제 |
- | 오직 우리 황가(黃家)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중국(中國) 강하를 근원으로 한(漢)나 | + | 학초공(鶴樵公)의 가장을 보고 공의 선대(先代)가 경영함이 흡족함과 행의의 독실함이 |
- | 라 전무(新羅 儒理王(五닌 서기二十八년)때 유신 휘락(洛)이 고치에 사신(使臣)으 | + | 이와 같았음을 알겠노라. 상고하건데 공의 휘는 병규(昞圭)요 자는 복여(復汝)니 |
- | 로 가다가 풍랑을 한다 표류되어 신라시대 기성(箕城: | + | 자호(自號)를 학초(鶴樵)라 하였다.\\ |
- | 소 동국에 들어왔는데 고려팽해차 금오공(金吾公) 온인(溫仁)이 본관(本貫)을 얻은 | + | |
- | 할아버지시다. 四대를 전하여 휘용(墉)은 우리가 평해(平海)를 본관을 한 이후로 백 | + | |
- | (伯)중(仲)체(季)도파 증체피(季派)의 파조(派祖)이니 벼슬이 삼중대광보극으로 | + | |
- | 시호(詩號)는 충경(忠敬)이요 三대를 전하여 휘천계(天繼)의 호는 잠재(潛齋)니 삼 | + | \_오직 우리 황가(黃家)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중국(中國) 강하를 |
- | 도관찰사(三道觀察使)다.八대를 전하여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니 | + | 건무(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5(五)년 서기 28(二十八)년) 때 유신 |
- | 경서와 사기를 널리 섭독하여 문학과 행검이 타인의 모범이 되셨다. | + | 교지에 사신(使臣)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되어 신라시대 기성(箕城)(: 지금 평해)에 |
- | 고조(高祖)의 휘는 태진(泰鎭)인데 호는 락서(洛西)요 증조의 | + | 표착하여 비로소 동국에 들어왔는데 고려 때 태자 금오공(金吾公) 온인(溫仁)이 본관(本貫)을 얻은 |
- | 호는 운파(雲破)며 통정(通政)이다.조의 휘는 종철(宗哲)인데 호는 서산재(西山齋)요 | + | 할아버지시다. 4(四)대를 전하여 휘 용(𤨭)은 우리가 평해(平海)를 본관을 한 이후로 |
- | 참봉(參奉)이다.고의 휘는 성구(成九)인데 종사랑(從仕郎)이고 비(妃)는 유인(儒人) | + | 백(伯)중(仲)계(季) 3(三)파 중 계피(季派)의 파조(派祖)이니 벼슬이 삼중대광보극으로 |
- |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인 명진(明鎮)의 따님이다. | + | |
- | 경자(庚子: | + | |
- | 어릴때부터 총명이 동류에 뛰어났으며 취학함에 문득 글자뜻을 밝게 분별하고 사리 | + | |
- | 를 잠자코 연구하였다. 이로부터 후일에 뜻을 가다듬고 성의를 다했기에 혜택이 후 | + | |
- | 손에게 미쳤으니 이는 성현의 학문을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니 진실로 일상생활이 | + | |
- | 착한 사람인데 선(善)을 행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까? 오직 취 | + | |
- | 적헌공(取適軒公)의 착한 후손 학초공(鶴樵公)이 또한 그런 분이다. 더불어 고을 사 | + | |
- | 림(士林) 총중에 태어나시어 법에 따르고 본받을 것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사사로 | + | |
- | 운 괴로움을 막으며 선세를 찬양하고 후손에게 알려주는 일에 거듭 감동되어 사모 | + | |
- | 하는 것은 선조의 업에 성의를 다함이라. | + | |
- | 그러나 대대로 | + | |
- | 에 맨손으로 헛되게 생각하기를 여러해에 사모해 오던 빈터를 말로만 취적선조(取 | + | 시호(詩號)는 충경(忠敬)이요 |
- | 適先祖)의 정각이 절실하다 하면서 아직까지도 없음을 혼자서 한탄하나니 효제의 | + |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다. 8(八)대를 |
- | 생각이 독실함은 천성인지라 삼종숙 윤구와 더불어 주의하고 서로 힘을 도와서 쇠 | + | 경서와 사기를 널리 섭독하여 |
- | 잔한 문중을 개혁하려는 결정이니 우리 족인들이 목현(木峴)에 정거한지 | + | |
- | 여년이란 오랜세월이 지났으나 문중에 유집을 간행한 일이 없고 마을에 누대에 걸 | + | |
- | 쳐 정각도 없으니 우리 족인들의 규범에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다. 기운이 피곤 | + | |
- | 하고 힘이 쇠잔하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요결이라 하면서 경영한 일은 진실로 옛사 | + | |
- | 람 완씨(阮氏) 숙질(阮籍과 족하 阮咸)과 같은 훌륭함이 아니겠는가? | + | |
- | 이에 풍수를 보여 정자로서 좋은 터를 택하고 문내(門內)의 수사 몽구씨(夢九氏) | + | |
- | 와 봉기씨(鳳起氏)가 성금을 많이 내어 춘궁기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넉넉하였으며 | + | |
- | 수년만에 공사가 끝났으니 덩교렇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목현(木峴)마을 촌양이 바 | + | |
- | 뀌어진 것 같도다. 다음 유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경향 각지 여러대방가를 찾아다니 | + | |
- | 며 문자를 얻어오자니 마음이 초조하고 고달픈 기상이 어떠하리요. | + | |
- | 병일(昞洙) 제종은 거대한 축대를 | + | |
- | 고 완공함은 충조이념이 남다름을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으랴. 그리하여 | + | |
- | 起)와 병운(昞雲) 등이 발의하여 학초공(鶴樵公)의 공을 후손에게 영세토록 남기기 | + | |
- | 위하여 돌을 | + | |
+ | \_고조(高祖)의 휘는 태진(泰鎭)인데 호는 낙서(洛西)요 증조의 휘는 오원(五源)인데 | ||
+ | 호는 운파(雲破)며 통정(通政)이다. 조의 휘는 종철(宗哲)인데 호는 서산재(西山齋)요 | ||
+ | 참봉(參奉)이다. 고의 휘는 성구(成九)인데 종사랑(從仕郎)이고 비(妣)는 유인(儒人) | ||
+ |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인 명진(明鎭)의 따님이다.\\ | ||
- | 사람으로 | + | \_경자(庚子)(: |
- | 후일 문중이 번창하기를 | + | 어릴 때부터 총명이 동류에 뛰어났으며 취학함에 문득 글자 뜻을 밝게 분별하고 사리를 |
- | 志士 葛隱 平海黃公昞允之墓 | + | 잠자코 연구하였다. 이로부터 후일에 뜻을 가다듬고 성의를 다했기에 혜택이 |
- | 一九九五년 | + | 후손에게 미쳤으니 이는 성현의 학문을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니 진실로 일상생활이 |
- | 종후인 세섭 삼가 | + | 착한 사람인데 선(善)을 행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까? 오직 |
+ | 취적헌공(取適軒公)의 착한 후손 학초공(鶴樵公)이 또한 그런 분이다. 더불어 고을 | ||
+ | 사림(士林) 총중에 태어나시어 법에 따르고 본받을 것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사사로운 | ||
+ | 괴로움을 막으며 선세를 찬양하고 | ||
+ | 것은 선조의 업에 성의를 다함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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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그러나 대대로 전해오는 선조의 세업에 징빙할 곳 없고 | ||
+ | 맨손으로 헛되게 생각하기를 | ||
+ | 정각이 절실하다 하면서 아직까지도 없음을 혼자서 한탄하나니 효제의 | ||
+ | 생각이 독실함은 천성인지라 삼종숙 윤구와 더불어 주의하고 서로 힘을 도와서 쇠잔한 | ||
+ | 문중을 개혁하려는 결정이니 우리 족인들이 목현(木峴)에 정거한지 이미 3백(三百)여년이란 | ||
+ |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문중에 유집을 간행한 일이 없고 마을에 누대에 걸쳐 | ||
+ | 정각도 없으니 우리 족인들의 규범에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다. 기운이 피곤하고 | ||
+ | 힘이 쇠잔하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요결이라 하면서 경영한 일은 진실로 옛사람 | ||
+ | 완씨(阮氏) 숙질(: 완적(阮籍)과 조카 완함(阮咸))과 같은 훌륭함이 아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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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이에 풍수를 보여 정자로서 좋은 터를 택하고 문내(門內)의 수사 몽구(夢九)씨와 | ||
+ | 봉기(鳳起)씨가 성금을 많이 내어 춘궁기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넉넉하였으며 | ||
+ | 수년만에 공사가 끝났으니 덩그렇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목현(木峴)마을 촌양이 | ||
+ | 바뀌어진 것 같도다. 다음 유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경향 각지 여러 대방가를 찾아다니며 | ||
+ | 문자를 얻어오자니 마음이 초조하고 고달픈 기상이 어떠하리요.\\ | ||
+ | |||
+ | \_병일(昞泆) 제종은 거대한 축대를 쌓느라 손이 터지고 발을 다치는 고통을 무릅쓰고 | ||
+ | 완공함은 숭조이념이 남다름을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으랴. 그리하여 응기(應起)와 | ||
+ | 병운(昞雲) 등이 발의하여 학초공(鶴樵公)의 공을 | ||
+ | 위하여 돌을 다듬어 세우기로 합의하여 그 사유를 | ||
+ | 사람으로 말할 수 있으랴.\\ | ||
+ | \_후일 문중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 ||
+ | \_\_1995(一九九五)년 기해(己亥) 3(三)월 청명절에\\ | ||
+ | \_\_종후인 세섭 삼가 기록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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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35.1749290027.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18:5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