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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공묘갈명(老隱公墓碣銘)=== <WRAP 37em justify>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노은공묘갈명(老隱公墓碣銘)**\\ \_공의 휘는 성구(成九)요, 차는 광집(光集)이며, 호는 노은(老隱)이다. 관(官)은 종사랑(從仕郞)이며, 성(姓)은 황씨며 평해인(平海人)이다. 시조 학사공(學士公) 휘 낙(洛)께서 평해(平海)에 거하심에 인하여 관(貫)으로 삼게 되었다. 태자검교(太子檢校)의 휘는 온인(溫仁)이며, 휘 우정(佑精)은 소윤(少尹), 휘 유중(裕中)은 시중(侍中), 휘 용(𤨭)은 시호 충경(忠敬), 휘 태백(太白)은 증(贈) 우의정(右議政), 휘 우(祐)는 증 좌의정(左議政), 휘 천계(天繼)는 호가 잠재(潛齋)며 자헌대부(資憲大夫)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냈으며 7(七)세에 이른다.\\ \_15세(十五世)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며 백씨 만휴당(晩休堂) 휘 귀성(貴成)과 의리가 매우 돈독하여 화목하고 즐겁게 지냈다. 휘 세림(世琳)은 진사(進士)며, 휘 용서(龍瑞), 휘 유직(有直), 휘 신희(信喜), 휘 흥세(興世), 휘 하응(河應)은 증 사복시정(司僕寺正), 휘 순남(舜南)은 증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휘 일봉(逸鳳)의 호는 목소(鶩巢), 휘 구석(九錫)의 호는 학남(鶴南)이며 증 형조참판(刑曹參判), 휘 태진(泰鎭)의 호는 낙서(洛西), 휘 오원(五源)은 증 통정대부(通政大夫)니 공의 조부요 고(考)의 휘는 종철(宗哲)이고 호는 서산재(西山齋)이며 참봉(參奉)이다.\\ \_비(妣)는 안동김씨 흥록(興祿)의 따님으로 철종(哲宗) 을묘(1855(一八五五)) 3(三)월 21(二十一)일에 공을 목현(木峴)의 집에서 낳으니 타고난 자품(資稟)이 준수하였으며 기상(氣像)이 크고 어질었다. 자라서는 효우(孝友)가 갖추어졌으며 성실 근검하였고, 선조의 업적을 지켜 후손에게 전하는 하나의 규칙을 정하였으며 세상 일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신사(1941(一九四一))년 정월 15(十五)일에 돌아가시니 수(壽) 87(八十七)이러라. 목현(木峴) 후등산(後燈山) 자좌(子坐)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_4(四)남 2(二)녀를 두었으니 남은 병동(昞東)·병세(昞世)·병년(昞年)·병규(昞圭)며, 여는 강영지(姜永智)·김기동(金紀東)이다.\\ \_병동의 남은 중기(重起)·환기(煥起)요, 여는 김창한(金昌漢)이며, 손자는 석영(錫永)·석룡(錫龍)·석순(錫淳)·석호(錫鎬)·석윤(錫潤)이며, 손녀는 박현도(朴鉉道)며, 증손은 상태(相泰)이다.\\ \_병세의 남은 덕기(德起)·형기(亨起)·익기(益起)요, 여는 강성도(姜聖道)며, 손자는 석인(錫仁)·석득(錫斗)·석화(錫和)·석준(錫俊)·현한(鉉漢)·석한(錫漢)·창수(昶洙)·현윤(鉉潤)·현국(鉉國)·우수(雨洙)·식수(植洙)·일수(逸洙)·조수(朝洙)이다.\\ \_병년의 남은 창기(彰起)·윤기(允起)요, 여는 남상경(南相璟)이며, 손자는 석대(錫汏)·현호(鉉浩)·현수(鉉濉)이다.\\ \_병규의 남은 영기(濘起)·명기(明起)·수기(守起)·온기(溫起)ㆍ성기(盛起)·부기(富起)·현기(顯起)·종기(鍾起)요, 여는 김극모(金極模)며, 손은 석희(錫熙)·석주(錫柱)·계수(桂洙)·지수(智洙)·임수(林洙)·갑수(甲洙)·진수(鎭洙)·화수(華洙)·해수(海洙)·남수(南洙)·동수(東洙)·종수(鍾洙)·을수(乙洙)·용수(龍洙)·대수(大洙)·형수(亨洙)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_아! 공을 말하는 자들은 그 충후(忠厚)한 성품과 독실(篤實)한 뜻에 감탄하는도다. 세상에 등용 될 만 하였으나 어찌 마땅하게 쓰이지 못하고 산수자연에서 늙었는가? 그러나 이는 다만 공을 사모함을 알고 공의 지켜온 바를 알지 못하겠다. 누구나 부귀하고자 하나 본성에 존재하지 않으니 그 일에 규정되면 말(末)이 되어 장단점을 다투게 될 것이다. 선세(先世)의 훈계를 후손들에게 전하여 집안의 하나의 마땅하고 무궁한 업으로 남겨주는 것과 같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백세에 울려 불민(不泯)한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날 공의 아들 병규(昞圭)군이 내가 사는 우원(芋園)의 허술한 집을 찾아와 후세에 전할 한마디 말을 원한다. 내 감당하지 못하여 정중히 사의의 뜻을 표했으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명(銘)하노니,\\ \\ 아! 저 뭇 사람들이여, 다투는 일은 돛대와 밀랍이구나.\\ 공께서는 유독 그렇지 않아, 꾸미고 장식하지 않았도다.\\ 근검 독실하고 순후(淳厚)하며, 성실하고 미더우며 정직하였네.\\ 선세를 계승하고 후세를 계도(啟導)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가학(家學)이로다.\\ 믈러나 산림에 묻혀 살며, 내 소유함을 내 즐거움으로 여겼도다.\\ 내 이르는 것은 신표가 되지 못하니, 이에 빗돌에 새겨 보이노라.\\ \\ \_\_1977년(一九七七년) 정사(丁巳) 3(三)월 일\\ \_\_계축(癸丑) 1973(一九七三)년 소춘절(小春節)(10월) 하한(下澣)에 선성(宣城) 이준규(李準規) 삼가 짓다. </typo> </W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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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17:30 저자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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