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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寅譜序 黃氏之貫平海古矣與吾東方名門世家德業文章非不儷美聯輝而但兵燹之餘 譜牒無徵以錦溪先生之博洽而猶未詳焉以海月先祖之草定而只傳疑焉譜牒 之未入梓者此也國內諸宗惟知學士公爲鼻祖而中間世次不能繼承故各派修 錄自成一家譜而已矣洎手今譜始完蓋自丙壬以來__國家昇平巳久兵燹中鞱 晦文字之發見者有若孔傳古文之始出於大航頭而錦陽之設譜所也主幹鎰氏 暨潤德甫窮於譜學搜索信籍多矣於是乎叅互考證遂成合譜此錦溪先生之所 未詳而得其詳也海月先祖之所傳疑而破其疑也主幹之功何如也吾宗之幸孰 大焉雖然凡天下之事之成自有期運之至耳豈人事之所能及耶譜成之初若序 若跋己發於洪相之巨筆則以餘蔑識非敢架屋下之屋子而譜所宗議以謂貫鄉 不可無一語故書以識之
歲庚寅陽月裔孫師夏謹識
[출처: 경진충경공파보(2001)]
경인보서 황黃씨의 본관이 평해라 함은 태고적인 역사이다. 우리 동방의 명문세가들과 함께 덕업과 문장이 아름다움을 짝하여 빛남이 연면하지 아니치 않으나 다만 병난으로 보첩을 실호하고 증빙할 문적이 없어 금계錦溪선생의 박식하심에도 오히려 자세치 아니하심이 있어 또한 해월海月선조의 초보에도 다만 의심으로 전함을 탄식하신바 있어 보첩을 인판에 부치지 못한 이유라 하겠다. 그러나 국내의 제종들은 오직 시조는 학사공이라는 것만은 잘 아는 바 중간 세차의 계승이 능치 못함으로 각파에서 수록함이 자연, 다만 가보를 이루는데 불과함이라 이러히 미진함을 이제 이 보사로 처음 완만함은 그간 병자丙子・임진壬辰 양난이래 국정이 승평하고 민심의 순화가 오래인고로 병난중 잠적되었던 문적을 발견함은 흡사 공자孔子의 전한 옛 문적이 큰 배 머리에서 나온 것 같아 금양에 보소를 설치하고 보학에 능통한 일鎰씨를 주간으로 윤덕潤德씨를 더불어 보학에 궁금한 신적들을 찾아 이를 서로이 상고하고 증빙하여 드디어 합성 완보하니 이로서 금계선생의 자세치 못한바를 자세함에 이르고 해월海月선생의 의심으로 전함을 밝힘이니 주간한 그네의 공이 어떠하였으랴? 우리 대종의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모든 천하지사의 성함은 스스로 그 시기와 운수에 이름이 있음이오 어찌 사람의 능한 바라 하겠는가? 세상에 보사가 이루어진 처음부터 보서와 발이 이미 큰 문장가들의 솜씨로 부쳤으니 부족한 나의 식견으로서는 감히 덧부칠 생각조차 못할 일이나 보소에서 첨종장의 의론이 관향에 대한 말씀이 없음은 가하지 아니하다 함으로 부득이 두어줄 글로 아는 바를 기록하노라.
세 경인庚寅(1770) 10월十月 예손 사하師夏 근지
[출처: 경진충경공파보(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