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대동보서(丙辰大同譜序) (1976년)
병진보(丙辰譜) 서문(序文)
우리 황씨(黃氏)가 득성(得性)한 역사는 또한 오래되었다.
일찍이 학사공(學士公) 휘(諱) 낙(洛)께서 중국의 한(漢)나라 조정에서 교지(交趾)주1에
사신(使臣)으로 가셨다가 표류(漂流)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여 평해(平海)의 월송(月松)
굴산(崛山) 밑에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평해(平海)를 관향(貫鄕)으로 했다.
후손(後孫)이 삼형제가 있었으니 맏이는 갑고(甲古)이니 기성군(箕城君)이요
둘째는 을고(古)이니 장수군(長水君)이요 셋째는 병고(丙古)이니 창원백(昌原伯)이다.
세 관향(貫鄕)을 가진 황씨의 자손이 팔역(八域)주2에 흩어져 사는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조상은 휘(諱) 갑고(甲古) 이후로는 휘(諱)
온인(溫仁)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 벼슬을 지낸 분이 있으며
증손자(曾孫子)에 삼형제가 있으니 맏이는 휘(諱)가 진(璡)이며 벼슬은 검교(檢校)요
둘째는 휘(諱)가 서(瑞)이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평리문하시중(評理門下侍中)
벼슬을 하여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며 셋째는 휘(諱)가
용(𤨭)이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벼슬을 하여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다.
이 삼형제가 삼파(三派)로 나누어져서 한 목소리로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미(氣味)로
서로 도우며 살았으나 세대(世代)가 점점 멀어져서 후손이 번성하였지만
이는 모두 한 할아버지 자손이다. 옛날 장공예(張公藝)는 아홉 대(代)의 자손이 함께
살면서 한 집에서 친하게 살았으니 이 같은 사실(史實)에 비유한다면
오직 우리도 일가(一家)의 친족이라 일가(一家)의 친족으로써 대동보(大同譜)로
합보(合譜)한다면 어찌 조선(祖先)을 추모하고 후손을 넉넉히 하는 본의(本意)가
아니겠는가.
아! 윤리(倫理)와 강령(綱領)이 무너지고 종족(宗族)의 의(誼)가 소원(疎遠)해지고
있으니 이것이 참으로 두려운 일이라.
수년 전부터 세원(世元)과 기청(氣淸)과 덕출(德出) 및 여러 종친(宗親)들이
여러차례 토론한 바 재사(齋舍)가 협착하여 전사(奠祀)를 올릴 때에 원근에서
모인 종친제관(宗親祭官)들이 하룻밤을 숙박하는 데도 곤란이 막심하여 종회시(宗會時)에
그것을 공의(公議)한 결과 본군과 타군에 사는 종친과 해외(海外)에
나가 있는 종인(宗人) 준구(浚九)와 여러 종친들에게 서면(書面)으로 의사를
묻고 또 대면하여 상의해서 통고문(通告文)을 발송하니 이 때가 비록 경제적으로
곤란하지만 그 재실(齋室)이 협착한 것을 생각하면 부득이한 일이라 하여 몇해
사이에 그럭저럭 준공(竣功)했는데 그 뒤에 또 주사(㕏舍)가 세월이 오래되니
바람에 깍이고 비에 씻겨서 기둥과 서까래가 썩어서 집이 넘어질 지경이라.
종회(宗會)의 석상에서 충분히 공의했으나 아무 대책(對策)이 없었는데 이 때
회의석상에는 마침 일본(日本)에서 살고 있는 종인(宗人) 준구(浚九)가 와서
참석하여 한심한 광경을 보고 단독으로 성력(誠力)을 표시하여 일백수십만원(一百數十萬원)의
찬조금을 내어 재사(齋舍)를 원상(原狀)대로 복구하여 공사를
마쳤으니 선조를 생각하는 정성은 길이 길이 잊지 못할 일이라.
이 때를 당하여 재사(齋舍)의 상하실(上下室)과 주사(㕏舍)는 이미 공사를
마쳤으나 관향(貫鄕)이 갈라진 방조(傍祖) 기성군(箕城君) 이하로 사대위(四代位)에
대한 제단비(祭壇碑)의 건립과 제단에 들어가는 문루(門樓)를 증축(增築)하고
중건(重建)키로 하여 영주(榮州)에 사는 세명(世明)으로부터 온 통고문에 의하여
종회석상(宗會席上)에서 공의(公議)한 데로 발문(發文)하여 각처에
지정한 유사(有司)를 파견했으나 특별유사(特別有司)는 경주(慶州)는 윤범(潤範)으로 하고
청송(靑松)에는 영호(永浩)로 하며 영주(榮州)에는 세명(世明)으로
하여 2(二)년에 걸쳐 각도(各道)와 각군읍(各君邑)을 다니며 수금하던 중에 밤에는
차가운 여관방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고생하여 몇백만원의
찬조금을 수집하여 비석을 세우고 제단을 완축하며 문루(門樓)도 준공했으니
비록 몇백년 뒤에 까지라도 어찌 위선(爲先)하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그런즉 그 공사를 감독(監督)한 사람은 기청(氣淸)군과 진현(鎭玄)군이요 또
작년 10(十)월 중정일(中丁日) 전날 밤에 회장(會長)과 아무아무 종친(宗親)이 본도와
타도에서 종친이 참석한 회의석상에서 말하기를 “갑술년에 대동보(大同譜)를
한 이후로 그 중간에 각파별로 피보(派譜)는 닦았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후세의
자손이 연대(年代)가 멀어지고 규모(規模)와 절차(節次)도 자세하지 못할 것이니
지금 대동보(大同譜)를 닦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물으니 종중의 여러 회원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찬동했다. 그 후에 풍기에 사는 영종(永宗)과
청안(淸安)의 인모(麟模)가 상의하여 통문(通文)을 각처에 발송한 후
각파별로 수단(收單)하고 정본(正本)과 초본(抄本)을 기록하는 보소(譜所)는
특별히 평해(平海)의 월송선재(月松先齋)에 설치하였으니 평해는 즉 우리 시조공(始祖公)이
관향(貫鄕)을 세운 곳이며 월송선재(月松先齋)는 즉 우리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追慕)하는 곳이다.
시조공(始祖公)의 후손으로서 목족(睦族)의 의(誼)를 돈독히 하고 문사(門事)로
인하여 모임을 함께하고 힘을 합해 마음에 느낀 바를 다한다면 반드시 너와 나가
없을 것이다. 일을 신속히 처리하여 반드시 합보(合譜)를 성취하여 대사(大事)를 돈독히
끝내고 남은 기회(機會)에도 털끝만한 일까지 세심히 잘 보아 백세(百世)토록
같은 족보에 족의(族誼)를 다져간다면 위로는 전해 내려오는 부로(父老)가 남기신
훈계를 계승하는 것이요 아래로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밝은
대안(對案)인 것이다.
감히 분수에 넘치는 망령된 말로 그 느낀 바의 전말(顚末)을 간략하게 서술할
따름이다.
단기 4309(四三〇九)년 병진 10(十)월 상순에 후예손 재우(載宇) 삼가 서하다.
주1.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 북부(北部) 통킹 하노이 지방(地方)의 옛명칭
주2. 팔역(八域): 전국(全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