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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09

불권헌황정묘갈략(不倦軒黃玎墓碣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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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不倦軒黃玎墓碣略
公諱玎字丁玉姓黃氏始祖唐學士諱洛桴海居平海子孫仍貫焉麗朝有諱溫仁官太 子檢校本朝有諱天富太學進士以內禁將隨外舅觀察使吳公邦佑巡到慶州意欲留 居之吳公仍令治第自平海移住是爲公高祖也曾祖諱仁庇進士祖諱希錫叅奉考諱 裳吉生員妣某氏逸其姓正統戊辰生公幼有異質及長勵志篤學成廟甲午司馬丙午 文科內除正言校理春秋館記事官外補三道都事星州善山等邑宰俱有聲績菀爲公 輔之望逮燕山朝無意仕進歸臥鄕園興起斯文訓迪後進一時名碩以公敎誨之勤扁 其軒曰不倦與佔畢齋金先生爲道義交先生甚推重命其孫聘公女遊泮宮贈詩有鳶 飛魚躍螟蛉變化之句 弘治丁巳卒享年五十葬西兄山負亥原配淑夫人月城孫氏 墓合祔生三男四女長用中次處中進士次宅中進士女訓導金寶鼎進士姜大根南興 達判尹李之帶用中無后處中四男林鍾應鍾萬鍾億鍾幷叅奉宅中男碩鱗內外孫不 盡錄林鍾無嗣一女適叅判崔臣輔即吾十一代祖而生四男諡貞武諱震立其最著也 嗚呼公以鸞鳳之姿局於枳林而遭時蹇屯韜光養德凝然爲後學師表觀畢翁一詩像 想其萬一耳世代綿遠文獻無徵隧碣剝落陰記且闕今其後孫將圖改竪責銘於余其 在宅相後承不敢終辭謹拜手獻銘曰磬海不沈植根東土肇羅歷麗有赫簪組公起南 服賦界不訾入登瀛閣出佐臬司介石莫回樂我衡泌斯文任重菁莪育汕滾滾遺澤矜 式儒紳百世聞風著于貞珉
  通仕郞權知承文院副正字崔鉉弼撰


 불권헌 황정 묘갈략
 공의 휘는 정(玎)이요 자는 정옥(丁玉)이요 성은 황씨이니 시조는 당나라 학사 휘 낙(洛)이 바다에 뗏목을 띄우고 와서 평해에서 살았으므로 자손이 이로 인하여 평해를 관향으로 삼았다. 고려조에 휘 온인(溫仁)이 있었으니 관직은 태자검교(太子檢校)요 조선조에 휘 천부(天富)라는 이가 있었으니 태학진사(太學進士)이며 내금장(內禁將)으로서 장인인 관찰사 오공(吳公) 방우(邦佑)를 따라서 순행하여 경주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머물러 거주하려고 하니 오공(장인)이 거기에 집을 짓게 하였음으로 평해로부터 이사와 살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의 휘는 인비(仁庇)이니 진사요 할아버지의 휘는 희석(希錫)이니 참봉이요 아버지의 휘는 상길(裳吉)이니 생원이요 어머니는 모씨이니 그 성씨가 미상이다.
 정통(正統) 무진(1448(一四四八))에 공을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공은 남다른 기질이 있었으며 장성하게 되자 뜻을 가다듬어 배움에 독실하였다. 성종 갑오년(1474(一四七四))에 사미시에 합격하고 병오(1486(一四八六))년에 문과에 올라 내직인 정언(正言)과 교리(校理)와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에 제수되고 외직으로 나가 삼도도사(三道都事)와 성주·선산 등 읍의 수령으로 보직되었는데 다함께 아름다운 성적이 있어서 아주 성대한 인물 감이라는 명망이 있었다.
 연산조에 이르자 벼슬에 나갈 뜻이 없어서 고향의 동산에 돌아가 유학을 진흥시켜 후진들을 교육 지도 하였다.
 한 때의 명인과 석학(碩學)들이 공께서 교육을 부지런히 한다하여 그 집에 편액을 불권(不倦)이라고 (불권헌으로) 달았다. 점필제 선생으로 더불어 도의교(道義交)를 맺었는데 선생이 심히 추대하여 중히 여겨서 그 손자(점필제 손자)에게 명하여 공의 딸에게 장가들도록 했다. 반궁(성균관)에 유학 할 때에 시를 지어 주었으니 “연비어약과 명령변화” (천지에 생기가 충만하다는 뜻인데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못 물에는 물고기가 뛴다는 문구와 뽕나무 벌레가 나나니 벌로 변화가 있다는 뜻)의 시귀가 있다. 홍치(弘治) 정사(丁巳) 1497(一四九七)년에 돌아갔으니 향년이 50세(五十歲)이었다. 서형산(西兄山) 해좌(亥坐)방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전 부인은 숙부인 월성(月城) 손(孫)씨이니 묘소는 합부(合祔)했고 3(三)남 4(四)녀를 낳았다.
 장남은 용중(用中)이요 다음은 처중(處中)이니 진사요 다음은 택중(宅中)이니 진사요 딸은 훈도(訓導)인 김보정(金寶鼎)과 진사인 강대근(姜大根)과 남흥달(南興達)과 판윤(判尹)인 이지대(李之帶)에게 각각 시집 갔다.
 용중은 후사가 없고 처중은 4(四)남을 낳았으니 임종(林鐘)과 응종(應鐘)·만종(萬鍾) 억종 (億鍾)이니 모두 참봉이다. 택중의 아들은 석전(碩鱒)이며 내외 손자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임종은 후사가 없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참판 최신보(崔臣輔)에게 출가하였으니 곧 나의 11(一一)대 조(祖)이다. 그런데 4(四)남을 낳았으니 시호(諡號)가 정무(貞武)이고 휘가 진립(震立)이니 그 중에 가장 나타난 분이다.
 아! 공은 난새와 봉황새 같은 바탕으로 탱자 숲에 제한 된 것처럼 사람은 출중하나 때를 못 얻어서 현달하지 못하였다.
 도가 펼쳐 어려운 때를 만나서 빛을 숨기고 덕을 길러 응연히 후학의 사표가 되었으니 점필제옹의 한 수(首)의 시를 보면 그 만분(萬分)의 일(一)이나마 상상 할 수 있다.
 세대가 오래되고 문헌의 증거가 없으며 묘소에 세운 단갈의 결이 망가지고 깨뜨려져서 후면의 기록도 없어졌다.
 이제 그 후손들이 장차 고쳐 세울 것을 도모하면서 나에게 묘비명(墓碑銘)을 지으라고 요구하여 왔다.
 내가 그의 생질인 후손된 처지에서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음으로 삼가 절을 하고 명(銘)을 지어 바친다. 명(銘)에 이르기를
磬海不沈 바다 다 건너도록 침몰하지 않아서
植根東土 뿌리가 동녘 땅에 심어졌도다.
肇羅歷麗 신라(新羅)에서 시작되고 고려(高麗)를 거쳐
有赫簪組 빛나는 벼슬이 있게 되었도다.
公起南服 공께서 남방(南方)에서 일어나시니
賦界不訾 부여(賦與)된 한계(限界)를 헤아릴 수 없었도다.
入登瀛閣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선 홍문관(弘文館)에 올랐으며
出佐臬司 외직(外職)으로 나가서는 감영(監營)의 보좌관(輔佐官)이 되었도다.
介石莫回 단단한 돌처럼 돌이킬 수 없었으니
樂我衡泌 나의 은거(隱居)할 곳을 즐겁게 여겼도다.
斯文任重 유림(儒林)에 관한 책임이 무거워서
菁莪育汕 훌륭한 인재를 길러냈도다.
滾滾遺澤 세차게 흐르는 남긴 은택(恩澤)이
矜式儒紳 유림(儒林)과 벼슬아치 진신(搢紳)에 모범(模範)이 되셨으니
百世聞風 백세(百世)까지 풍도(風度)를 듣게 하려고
著于貞珉 단단한 돌에다가 기술(記述)하노라.
  통사랑 권지승문원부정자(通仕郞 權知承文院副正字) 최현필(崔鉉弼)은 짓다.

a-109.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6 10:15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