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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55

창은황진영행장(滄隱黃震英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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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隱黃震英行狀
公諱震英字聖敎號滄隱姓黃氏貫平海高麗忠節公瑞之后也入 本朝有 諱玉崇漢城判官生諱輔坤生員生諱瑀牧使生諱應淸世稱大海先生進士 以孝行旌閭逸薦除眞寶縣監享明溪書院公十一代祖也諱居一號明溪贈 參議至四傳諱昌漢號聽天有學行爲鄕里矜式有遺稿高祖諱載華曾祖諱 配坤祖諱龍九考諱濤兩世具有隱德妣慶州李氏觀燮女有婦德壺節 哲 廟己酉六月十八日生公于正明里第骨相岐嶷啼音洪暢大人公甚異之稍 長始受學才思敏闊不煩敎而多曉解一日與群兒出遊江邊有大蛇當徑公 叱曰是何妖物敢爲於丈夫之前吾欲打殺而爾亦好生之物不忍爲也遂送 而行之同里一老人見之告于公大人公曰此兒志氣不凡且有及物之仁他 日進步不可量大人公慮其志氣太過日施鞭策恐有傷恩使之就傳于沙川 南公九翰之門南公亦課法甚嚴公日侍硏席一遵師敎十五六歲悉通經傳 製作甚敏凡痒塾試藝輒居前列南公大奇之大人公又勗之使不得一時放 過公承父師之訓益務進學立志於踐履用工於義理大爲多士之望甞曰 吾
先祖之貽謨於後孫者以勤學愼行垂戒於集中此是吾家世世靑氈豈不勉 旃以犯古人無念之戒哉時同鄕士友如溟波李公壽權峰南安公宅善臺下 張公柄皆推公爲畏友而春秋鄕講之節校宮升遞之任輒待公以行庚辰居 大人公憂喪祭一遵家禮旣闋仍遭內艱致哀盡禮一如前喪月必再三省墓 雖盛暑祚寒未甞或廢旣外除每日晨興具冠服謁祠堂丙申一國臣民爲國 母擧義而聲勢甚壯公紏率鄕兵以應事未濟而獄己成矣公呼獄吏而請紙 笔握管滔滔先言吏輩之奸謫次言上察之不明獄吏窺伺告于本停與營
將兩官拿而視之嘆其此世難得之人而謝而歸之自是聲名日播遠邇文人 豪士皆以一揖爲重本倅之來莅者必造門致禮丁酉響山李先生晩燾作東 遊行首訪公廬連留三日顧謂左右曰吾於朝班觀人多矣未見如此人者而 只恨窮溟爲之仇矣累世宗楯奉先接賓之道出入應酬之節孰不欽仰而稱 道哉至於先世墓道顯刻未遑之事憚誠竭哀鳩財謀成而表之且始祖先壇 古無齋宇亦無祭田與宗人墢基達協議規畫周流各郡不避風雨憚誠鳩財 資元而完成年剩而益添旣至成就之日未及謝世可勝嘆哉若假之而數年 之壽則奚啻今日畧設之奠而己哉惟後孫之茄恨也戊戌發通京鄕修大譜 於淸安淸安即傍先祖襄武公世居宗宅公監任都總極敦大事且祭土之不 贍宗宅之旣壤一齊新之又致田沓幾許使宗家俾無窘急因發始祖壇祀奠 獻之數數改遞爲未安以一定爲論僉議以公爲主鬯焉此非公風威之偉忠 信之行見重於人者鳥能有是於萬億麗族之中哉庚戌國事大非公痛宗社 之爲墟杜門斂跡不與人徵逐日誦槽檜風泉之詩以寓其悲憤之思戊午四 月十四日考終于寢享年七十計出士友咸齎咨涕洟曰長德空矣用是年某 月日葬于峴山西坐之原後移奉于虎田先兆內左麓負乾之原公品莊重之 資負高邁之志少日宕落之氣若將有爲於世而命與時乖人與地違無以爲 達於九堦之下則不如從吾家所好況潜於家學淵源之美琢磨乎古聖訓誥 之文勉勉孜孜以讀書反求爲當下底事至是而亢厲之氣漸就寬平矯矜之 志漸入溫柔無一言一行之崖異於人而之者自然起敬聞之者自然欽慕苟 非問學之功其不歸偏固者鮮矣而圓融而無際含容而多方不以己之所見 爲是不亦以人之所言爲非而惟義是從是以思誼孚於宗族信義著於鄕黨 巋然爲一邦之靈光盖其積於躬者旣厚故發於詞者亦深邃高健袪俗士之 糟粕追古人之軌轍而累經兵燹文籍蕩佚惟詩文略干篇藏于家配順興安 氏浩善之女先公十年卒墓在家後山酉坐之原生四男五女長皞次昶曣𡄆 女適順興安鎔軾蔚珍張秉玉平山申裕煥金寧金順龍旌善全海龍皞無嗣 以從弟曄之子載宇爲嗣女適務安朴鍾漢昶亦無嗣以族弟晥之子允坤爲 后女適順興安承源順興安孟源坡平尹鉀曣有一男一女男載舜女適順興 安鎔浡𡄆有二男長載麟載鳳載宇有四男三女長德鎭次奭鎭漢鎭翼鎭女 適新安朱宰壽餘幼不錄燦宗居在隣鄕聞公風儀行致而以一未得承拜爲 恨日公之孫載宇持公遺事請余以狀德之文自顧無文不敢當是役而甞問 月朝之評有曰特立山岳之氣像淵泓河海之器量文可以應衆行可以範鄕 此足以論公一生而且家狀所錄一如所聞遂綴其大以塞孝懇聊以寓平
日慕仰之
  歲己亥暮春上浣大興白燦宗謹撰


창은(滄隱) 황진영(黃震英) 행장(行狀)
 공(公)의 휘(諱)는 진영(震英)이요 자(字)는 망교(望敎)요 호(號)는 창은(滄隱)이며 성(姓)은 평해황씨(平海黃氏)니 고려(高麗) 충절공(忠節公) 휘(諱) 서(瑞)의 후손(後孫)이라.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휘(諱) 옥숭(玉崇)이라는 어른이 계셔 한성판윤(漢城判官)이며 휘(諱) 보곤(輔坤)을 낳으시고니 생원(生員)이시고, 휘(諱) 우(瑀)를 낳으시니 목사(牧使)이시고, 휘(諱) 응청(應淸)을 낳으시니 세상이 대해(大海) 선생(先生)이라 일컬으며 진사(進士)를 하셨고 효자(孝子)로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했으며 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진보현감(眞寶縣監)에 제수(除授)되고 졸(卒) 후(後)에는 명계서원(明溪書院)에 향사(享祀)하시니 이 어른이 곧 공(公)의 11대조(十一代祖)이시다. 휘(諱) 명계(明溪)는 나라에서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증작(贈爵)을 받았고 그 후(後) 4대(四代)를 지나서 휘(諱) 한창(漢昌) 호(號) 청부(聽夫)는 학행(學行)이 높아 방리(邦里)에서 큰 존경(尊敬)을 받았으며 그의 유명(有名)한 유고(遺稿)가 있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재화(載華)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배곤(配坤)이요 조(祖)의 휘(諱)는 용구(龍九)요 고(考)의 휘(諱)는 도(濤)이니 양세(兩世)모두 은덕(恩德)이 있었다. 비(妣)는 경주이씨(慶州李氏)니 관섭(觀燮)의 여(女)로 부덕호절(婦德壺範)이 있었다.
 철종(哲宗) 기유(己酉) 6월(六月) 18일(十八日) 공(公)이 정명리(正明里) 제(第)에서 나시니 그 골상(骨相)에 기의(岐嶷)하고 울음소리가 우렁차서 대인공(大人公)이 심(甚)히 기이(奇異)하게 여기더니 점점(漸漸) 자라나서 처음으로 수학(受學)하게 되니 그 재사(才思)가 민활(敏闊)하여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곧 또렸하게 해득(解得)하는 것이 빠르더라. 하루는 여러 아해(兒孩)들과 물가에 나가 놀다가 큰 뱀이 길 가운데 버젖이 있거늘 공(公)이 꾸짖어 말하되 이 어떠한 요물(妖物)이 감히 장부(丈夫)의 앞에서 길을 막느냐? 내가 곧 때려 죽일 것이로되 너 또한 살기를 좋아하는 생물(生物)임에 차마 못하겠노라 하고 드디어 그 뱀을 쫓아 보내고 길을 걸어오는 것을 한 마을에 사는 어떤 노인(老人)이 이같은 광경(光景)을 보고 공(公)의 대인공(大人公)에게 아뢰니 공(公)이 말하기를 이 아이의 지기(志氣)가 범상(凡常)치 않으며 또한 생물(生物)에 대(對)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래(將來) 많은 발전(發展)이 있을 것으로 믿으나 그 지기(志氣)가 너무 지나친 것을 근심치 않을 수 없어 적당(適當)한 편책(鞭策)으로서 교양(敎養)코져하나 부자지간(父子之間)의 은의(恩義)가 혹(或) 상(傷)할 것을 염려(念慮)하여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1)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받아 사천(沙川) 남공(南公) 구한(九翰)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입학(入學)시켜 수학(修學)케 하였다. 남공(南公) 또한 가르치는 법(法)이 심(甚)히 엄(嚴)하여 매일(每日) 일정(一定)하게 연석(硏席)에서 훈회(訓晦)하니 그 기거동작(起居動作)과 언행심사(言行心思)가 예의(禮儀)에 맞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또 인품(人品)이 고상(高尙)해지며 태도(態度)마저 의연해지니 보는 사람들이 그 원숙(圓塾)함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더라. 또 그 비범(非凡)한 재조로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게되니 15~6세(十五六歲)에 경전(經傳)을 통달(通達)하고 특(特)히 저술(著述)에 능란(能爛)하여 서당(書堂)에서 과거예습(科擧豫習)으로 시험(試驗)을 보게되면 노소(老少)를 막론(莫論)하고 많은 학도(學徒) 중(中)에 항상(恒常) 최우등(最優等)에 뽑히는 고(故)로 남공(南公)이 더욱 사랑하여 일시(一時)도 방과(放過)치 못하게 하니 점점(漸漸) 학문(學問)이 높아가며 또 깨닫는 바 인생(人生)의 도(道)를 하나하나 실천(實踐)에 옮기는데 힘쓰니 원근(遠近) 많은 선비들의 중망(重望)이 되였다. 공(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께서 우리 후손(後孫)들에게 남긴 유산(遺産)은 근학신행(勤學愼行)이라는 문구(文句)를 문집(文集)에 실어 있거늘 가훈(家訓)으로 전(傳)하고 대대(代代)로 지켜오는 것인데 지금인들 어찌 이 무념(無念)의 교훈(敎訓)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 때의 한 고을 사우(士友)로서는 명파(溟波) 이공(李公) 수권(壽權)과 봉남(峰南) 안공(安公) 택선(宅善)과 수하(壽下) 장공(張公) 병(柄) 같은 분들도 모두 두려운 벗들이라. 춘추(春秋)로 경전(經典)을 서원(書院) 또는 향교(鄕校)에서 강의(講義)할 때나 서원(書院)과 향교(鄕校) 직임(職任)을 체임(遞任)할 때는 반드시 공(公)을 초대(招待)해 모시고 거행(擧行)하였다.
 경진년(庚辰年)에 대인공(大人公)의 거우(居憂)로 초상(初喪)과 제사(祭祀)에 가례(家禮)대로 따랐으며 복(服)을 마치자 연달아 내간상(內艱喪)을 또 당(當)하니 치애진례(致哀盡禮)를 전상(前喪)과 꼭 같이 하였다. 복(服)을 마친 후(後)에도 초중(初中)으로 한달에 두번씩 성묘(省墓)하고 매일(每日) 새벽에 일찍 일어나 관복(冠服)을 갖추고 사당배알(祠堂拜謁)을 하였다.
 병신년(丙申年)에 왜적(倭敵)에게 국모살해사건(國母殺害事件)이 생(生)하니 전국민(全國民)이 국모(國母)를 위(爲)하여 의거(義擧)가 일어남에 공(公)도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이 사건(事件)에 응(應)하였더니 일을 성사(成事)치 못한 채 투옥(投獄)되었는지라 공(公)이 옥리(獄吏)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명(命)하여 먼저 아전의 무리들의 간사한 것을 치고 다음에 임금의 살핌이 밝지 못한 것을 말하니 옥리(獄吏)가 그 사실(事實)을 그 고을 원과 영장(營將)에게 고(告)하였더니 양관(兩官)이 모두 탄식(歎息)하고 이는 세상(世上)에서 구(求)하기 어려운 인물(人物)이라하고 도리어 사례(謝禮)하며 돌려보내니 이 후(後)로부터 공(公)의 명성(聲名)이 날로 더하여 멀고 가까운 문인호걸(文人豪傑)들이 다 추중(推重)하며 따르더라.
 그리고 이 지방(地方)에 새로 오는 관장(官長)들은 반드시 부임(赴任)하면 그 문에 이르러 예(禮)를 드렸다. 정유년(丁酉年)에 향산(響山) 이선생(李先生) 만도(晩燾)씨(氏)가 동해안(東海岸)에 여행(旅行)케 되어 먼저 공(公)을 찾아와서 3일간(三日間)을 유(留)하게 됨에 공(公)과 학문(學問)과 세상사(世上事)를 토론(討論)하고 좌우(左右)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조정(朝廷)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였으되 인품(人品)에 있어서나 학문(學問)에 있어서 공(公)과 같은 분은 많이 보지 못하였다. 공(公)이 만약(萬若) 이 해변(海邊) 벽지에 살지 않고 서울에 살아서 출세(出世)에 뜻을 두었다면 국가(國家)에 큰 동량(棟樑)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라 하였다. 누세종미(累世宗楣)로 봉선접빈(奉先接賓)하는 도(道)와 출입응수(出入應酬)하는 절차(節次)를 누가 흠앙하지 않으리요. 선세(先世) 묘도(墓道)의 현각(顯刻)하는 일에 있어서는 침식(寢食)을 잊고 성심(誠心)과 충정(哀情)으로 노력(努力)하였으며 또 시조(始祖)의 선단(先壇)에 옛날부터 재우(齋宇)나 제전(祭田)이 없어 항상(恒常) 유감(遺憾)으로 생각(生覺)해오던 바 종인(宗人) 발(墢)과 기달(基達)로 더불어 그 규모(規模)와 계획(計劃)을 협의(協議)한 후에 각도(各道) 각읍(各邑)을 두루 다니면서 비바람을 무릅쓰고 정성을 다하여 자원(資源)을 모아 완성(完成)하였더니 나이 더할수록 첨응(添應)이 더 심하여 끝을 맺지 못하고 세상(世上)을 버렸으니 진실(眞實)로 통탄(痛歎)할 노릇이었다. 만약(萬若) 몇 해만 수명(壽命)을 더 빌었더라도 오늘날 진설(陳設)되는 간략(簡略)한 전수(奠需)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무술년(戊戌年)에 통문(通文)을 발(發)하여 경향(京鄕)의 대보(大譜)를 청안(淸安)에서 닦을 때 청안(淸安)은 곧 방선조(傍先祖) 양무공(襄武公)의 세거(世居) 종택(宗宅)이다. 공(公)이 이 일에 도총감사(都總監仕)의 책임(責任)을 지고 막중대사(莫重大事)를 돈독(敦篤)히 하여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었다. 그리고 제전(祭田)이 넉넉지 못한 것과 종택(宗宅)이 허물어진 것을 일체(一切) 새롭게 넓히고 수리(修理)하였으며 또 논과 밭을 얼마쯤 마련하여 종가(宗家)로 하여금 궁색(窘塞)을 면(免)케 하였다. 또 시조(始祖)의 단사(壇祀)에 전헌(奠獻)하는 것이 자주 개체(改遞)되는 것을 미안(未安)히 생각(生覺)하고 종중(宗中)의 공의(公議)로 일정(一定)한 절차(節次)를 정(定)하여 시행(施行)케 하였다.
 경술년(庚戌年)에 나라 일이 크게 글러졌음에 공(公)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빈 터가 된 것을 아프게 여겨 문을 굳게 닫고 자취를 감추고 남의 부름에도 참여(參與)하지 않고 날로 고상(高尙)한 풍월천석(風月泉石)의 시(詩)를 외우며 그 비분(悲憤)한 여생(餘生)을 보냈다. 무오년(戊午年) 4월(四月) 14일(十四日)에 침실(寢室)에서 고종(考終)하시니 향년(享年)이 70(七十)이라. 부음(訃音)이 나가자 사우(士友)들이 모두 슬퍼하며 말하기를 덕망(德望)이 높은 거사(巨士)가 사라졌다 하였다. 처음에 현산(峴山) 유좌지원(酉坐之原)에 장사(葬事)하였다가 다시 호전(虎田) 선조내(先兆內) 좌록(左麓) 부건지원(負乾之原)에 이장(移奉)하였다.
 공(公)이 장중(莊重)한 자품(資禀)의 품성(品性)을 지니시고 고매(高邁)한 지기(志氣)를 가지시어 지난날의 암락(岩落)한 기개(氣慨)는 큰 출세(出世)를 기대(期待)했으나 때가 아님을 자각(自覺)하고 부운(浮雲)같은 세상(世上) 일에 허무(虛無)하게 좌왕우왕(左往右往)하느니 보다 차라리 가학연원(家學淵源)의 아름다움에 침잠(沈潜)하여 옛 성현(聖賢)들이 훈고(訓誥)하던 글을 탁마(琢磨)하고 힘써 부지런히 읽어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도(道)를 실천(實踐)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 깨닫고 나날이 선(善)하고 의(義)로운 일이면서 적다하여 소홀(疏忽)히 하지 않고 행(行)하는데 노력(努力)하니 몸에 엄(嚴)하던 기운(氣運)이 점점(漸漸) 너그럽고 화평(和平)한대로 나아가고 교만(嬌慢)하게 자랑하는 뜻은 점점(漸漸) 온순(溫順)하고 유화(柔和)한데로 기울어져 일언일행(一言一行)이 남에게 애이(厓異)함이 없어서 모든 사람마다 머리가 수그러지고 듣는 사람마다 흠모(欽慕)하였으니 진실(眞實)로 학문(學問)의 공(功)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러한 인격(人格)의 소유자(所有者)가 되었으리요.
 또 자기(自己)의 소견(所見)만을 옳다하지 않고 남의 의견(意見)을 그르다 하지 않고 오직 좋은 일이며 의(義)로운 것이면 좋고 행(行)했으니 깊은 사의(思誼)가 종족(宗族)에게 높은 신의(信義)가 향당(鄕黨)에 드러나 큰 종사(宗事)에 있어서나 병신년(丙申年) 국모의거사건(國母義擧事件)같은 국사(國事)에 있어서도 향민(鄕民)들이 믿고 따라 나라에도 영광(榮光)되게 하였다. 이같이 그의 몸에 쌓인 것이 이미 후(厚)한 고(故)로 문사(文辭)로 발(發)하는 것도 또한 깊고 그윽하며 높고 굳세어 속된 선비들이 조박(粗粕)하고 재치있는 글과는 다른 문화적(文化的) 가치(價値)있는 저술(著述)이 적지 않았는데 누차(累次)의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고 다만 시문(詩文) 몇 편(篇)만 집에 간수해 있을 뿐이다.
 배(配)는 순흥안씨(順興安氏)니 호선(浩善)의 여(女)이며 공(公)보다 10년(十年) 먼저 졸(卒)하고 묘(墓)는 집 뒷산(山) 유좌지원(酉坐之原)에 있다. 4남5녀(四男五女)를 두었는데 장남(長男)은 호(皞)이요 다음은 창(昶) 연(曣) 학([日學])이요 여(女)는 순흥(順興) 안용식(安鎔軾) 울진(蔚珍) 장병옥(張秉玉) 평산(平山) 신유환(申裕煥) 김녕(金寧) 김순용(金順龍) 정선(旌善) 전해룡(全海龍)에게 출가(出嫁)하였다.
 호(皞)는 아들이 없어 종제(從弟) 엽(曄)의 자(子) 재우(載宇)로 사자(嗣子)를 삼고 여(女)는 무안(務安) 박종한(朴鍾漢)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창(昶)이 또한 아들이 없어 족제(族弟) 환(晥)의 아들 윤곤(允坤)으로 뒤를 이었고 여(女)는 순흥(順興) 안승원(安承源) 순흥(順興) 안맹원(安孟源) 파평(坡平) 윤전(尹鈿)에게 출가(出嫁)했다. 연(曣)이 1남1녀(一男一女)를 두었으니 남(男)은 재순(載舜)이요 여(女)는 순흥(順興) 안용발(安鎔浡)에게 출가(出嫁)하였다. 학([日學])이 2남(二男)을 두었는데 재린(載麟) 재봉(載鳳)이다. 재우(載宇)가 4남3녀(四男三女)를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덕진(德鎭)이요 다음은 석진(碩鎭) 한진(漢鎭) 익진(翼鎭)이요 여(女)는 신안(新安) 주재수(朱宰壽)에게 출가(出嫁)하고 나머지는 어려서 기록(記錄)하지 아니한다.
 찬종(燦宗)이 이웃 고을에 살고 있어 공(公)의 훌륭한 풍채(風彩)와 뛰어난 거동(擧動)을 잘 듣고도 한번도 승배(承拜)치 못함을 한(恨)스럽게 여겼더니 하루는 공(公)의 손(孫) 재우(載宇)가 공(公)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나에게 장덕지문(狀德之文)을 청(請)하거늘 스스로 부족(不足)함을 느켜 감(敢)히 이런 일을 감당(堪當)치 못하나 일찍이 들으니 인물평(人物評)이 산악(山岳)과 같은 기상(氣像)을 갖추었고 하해(河海)와 같은 도량(度量)을 품어 그 넓고 깊은 모양이 외형(外形)으로는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느끼게 하고 행실(行實)로는 가(可)히 천하(天下)가 본받을 만한 모범(模範)이 된다 하였다. 또한 가장(家狀)에 기록(記錄)된 바가 소문(所聞)과 꼭 같으므로 드디어 그 대개(大慨)를 꿰매어 효간(孝懇)을 막음하고 또 평일(平日)에 앙모(仰慕)의 정성(情誠)을 붙여 이르노라.
  세(歲) 기해(己亥) 모춘(暮春) 상완(上浣) 대흥(大興) 백찬종(白燦宗) 근찬(謹撰)

1)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 다른 사람의 자식(子息)은 내가 가르치고 내 자식(子息)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付託)하여 가르친다는 말. ≪맹자(孟子)≫의 <이루(離婁)> 상편(上篇)에 나오는 말.
b-055.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31 08:45 저자 ssio2